정부가 들고나온 ‘전세 폐지론’…가능할까
전국을 뒤흔든 전세사기 여파로 빌라 역전세난이 심각해지자 정부가 또다시 전세 폐지론을 꺼내들었다. 전세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편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가운데 전세가 사라지면 임대차 시장이 대혼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다.
빌라 전세사기 여파로 부작용 커져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최근 “(전세가) 가격 하락과 맞물리면 고의적이든 비고의적이든 사기가 발생할 수 있다. 없어져야 할 제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토부 수장이 전세 폐지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도 지난해 “수명이 다한 전세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편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세는 전 세계 다른 국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의 독특한 임대차 제도다. 집주인은 집을 내어주는 대신 전세보증금을 받아 넉넉한 자금을 융통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세입자 입장에서도 주거비 부담을 줄이고, 전세금을 종잣돈 삼아 내집마련의 발판으로 이용했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오랜 기간 전세 제도가 뿌리내려왔다.
정부가 갑자기 전세 폐지론을 들고나온 이유는 뭘까. 근본적인 배경을 들여다보면 임대차법 시행에 따른 전세 시장 혼란 영향이 크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00년 7월 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상한제 등 임대차법 시행으로 전세 시장이 대혼란을 겪었다. 전월세상한제는 전월세 가격 인상률을 5% 이내로 제한하는 제도다. 또한 계약갱신청구권을 통해 세입자가 기존 2년에서 4년(2년+2년)으로 계약 연장을 보장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임대차 시장 안정을 위해 임대차법을 시행했지만 예상보다 부작용이 컸다. 임대 기간을 4년 동안 유지해야 하고 임대료도 5%밖에 올리지 못하면서 집주인들은 앞다퉈 전세 물량을 거둬들였다. 전세 매물이 급감하다 보니 전셋값은 급등했고, 아파트 전세를 구하지 못한 서민층이 값싼 빌라 시장으로 대거 이동했다. 빌라 수요가 몰리다 보니 빌라 매매, 전세 가격이 동시에 뛰었고, 건설업자들은 앞다퉈 빌라를 지었다. 전국 부동산 시장을 뒤흔든 전세사기 사태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분석이다.
정부가 서민 주거 안정을 취지로 무분별한 전세대출을 제공한 것도 전세 시장 혼란에 한몫했다. 전세금을 매매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전세대출 규모가 급증했고 전셋값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는 빌라에 대한 불신이 심해지면서 빌라 전셋값이 급락하고 아파트 전셋값은 폭등하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다방이 국토교통부 실거래가공개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올 1~5월 전세 거래 중 절반가량인 46%가 기존 전세보증금보다 시세가 하락한 ‘역전세’ 주택이다. 서울 강북권에서는 2년 전 대비 전셋값이 5000만~6000만원씩 하락한 빌라가 수두룩하다.
빌라 시장이 역전세난에 내몰린 것은 전세사기 여파가 크지만 정부 대책도 영향을 미쳤다. 전세금 미반환 사고가 늘자 정부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금 반환보증보험 가입 요건을 강화했다. 당초 ‘공시가격의 150%’였던 보증보험 가입 요건을 ‘공시가격의 126%’로 높였다. 이를 두고 임대인들은 정부가 빌라 전세 가격에 직접 개입해 빌라 시장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고 반발한다. 불안한 세입자들이 보증보험부터 받으려다 보니 집주인은 빌라 가구마다 수천만원씩 전세금을 돌려줘야 해 역전세난이 빚어졌다는 분석이다.
아파트 시장은 딴판이다. 실수요자들이 빌라 전세를 외면하면서 ‘아파트 쏠림’ 현상이 심화돼 아파트 전셋값은 연일 치솟는 모습이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지난해 8월부터 올 5월까지 10개월 연속 상승세다. 올 5월 기준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은 6억58만원으로 전년 동기(5억7094만원) 대비 3000만원가량 뛰었다.
빌라는 역전세난, 아파트는 전세난을 겪을 정도로 전세 시장이 혼란에 빠진 만큼 전세 제도 폐지가 절실하다는 것이 전세 폐지론자들 주장이다.
전세 대안은 없나
‘에스크로’ 도입…기업형 임대주택 검토할 만
전세 제도를 없애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전세 제도가 사라지는 것은 시장의 역할인 만큼 정부가 강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값비싼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전세는 임차인의 주거 안정, 내집마련을 돕는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세 제도를 갑자기 없앨 경우 최대 20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보증금 반환도 문제다. 대출 등 금융 시스템 마비로 이어져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전세 자체를 폐지할 것이 아니라 위험한 전세 거래를 최대한 줄이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 이를 위해 ‘에스크로 제도’가 대안으로 거론된다. 에스크로 제도는 부동산을 거래할 때 이해관계 없는 금융사 등 제3자가 개입해 안전 결제를 보장하는 제도다. 기존처럼 집주인이 아닌 제3기관에 전세보증금을 맡겨놓는 개념이다.
일부 집주인은 보증금으로 무분별한 갭투자에 나서다 전세 만기가 도래했는데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에스크로 제도를 도입하면 전세사기 사태를 방지하고 전세보증금이 갭투자에 흘러가는 부작용도 차단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다만 전세보증금을 일종의 ‘무이자 대출’로 인식하는 집주인 반발이 변수다. 에스크로 제도를 도입할 때 보증금의 10~30% 등 일부라도 예치하는 집주인에게 세금 감면 등의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임대인은 전세금을 받아서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고, 임차인 입장에서 전세금 보호는 기존 전세보증보험 같은 제도를 적용해도 되는 만큼 에스크로를 전면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멀리 보면 전세 제도 대안으로 기업형 장기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하는 것도 방법이다. 기업형 장기임대주택은 기업형 임대사업자가 100가구 이상 주택을 20년 이상 장기 운영하는 민간임대주택이다. 리츠 방식으로 운영 가능하다. 아파트 민간등록임대사업자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는 의견도 설득력 있다. 다주택자를 활용해 실수요가 많은 민간 아파트 전세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다.
전세 제도를 한꺼번에 폐지하기는 어렵지만 월세 제도가 점차 안착되는 분위기라 월세 시대 도래를 준비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윤재호 메트로컨설팅 대표는 “보증금이 높은 임대 계약을 줄이고 월세 인센티브를 높이면서 전세에서 월세 시대로 차근차근 전환하는 방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5호 (2024.06.26~2024.07.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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