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 전 의장의 조언 "팬덤은 고작 0.01%, 노예되는 순간 실패"
“국회의원은 한 명 한 명이 헌법 기관입니다. 팬덤의 노예가 되면 그건 이미 잘못된 정치에요.”
김진표 전 국회의장(사진)은 25일 “후배 정치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지내고 지난달 퇴임한 그는 26일 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왔는가』를 낸다. 경제 관료와 국회의원으로서 지낸 50년의 경험과 소회를 담았다. 1974년 행정고시 합격 후 대전지방국세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김 전 의장은 국무조정실장, 재정경제부 장관, 교육부총리 등을 거쳤다. 2004년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후보로 승리한 뒤 수원에서 내리 5선에 성공했다.
그는 회고록을 쓴 계기에 대해 “어쨌든 나라나 사회를 위해서 열정을 가지고 일할 기회를 얻은 것이니, 그간 경험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갚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회고록 제목에 '축적'이라는 단어를 고른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까지 10개 정부에서 공직생활을 했다”며 “반대쪽에 대해서는 무조건 왜곡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바꿔보자는 생각을 담았다. 설령 군인이 다스린 정부였거나, 자신이 지지하지 않았던 정권의 정부였을지라도 우리 사회는 그 시간 분명 무언가를 축적해 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가 예시로 든 것은 박정희 정부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구 사회의 발달한 과학 지식이나 경영학이 행정에 도입할 수 있도록 앞장섰다. 자신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지만, 테크노크라트(전문 지식을 지닌 기술관료)가 육성될 수 있도록 KDI와 카이스트를 만들지 않았나”라며 “군부 엘리트가 테크노크라트를 양성하고 성공한 것은 개발도상국 중 대한민국뿐”이라고 말했다.
공직 생활에서 가장 보람된 순간으로는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금융실명제 도입을 꼽았다. 그는 “당시 재무부에서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실무 총책임을 지고 추진했다. 과천의 한 아지트에서 극비리에 진행했다. 땀이 뻘뻘 흐르는 몹시 더운 여름이었는데,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일을 했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 지금도 가장 큰 자부심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아쉬운 점으로는 노무현 정부의 주택 정책을 꼽았다. 김 전 의장은 “지역균형 발전은 30∼40년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가야 할 과제인데, 너무 그것에 매몰되다 보니 수도권을 지나치게 옭아맸고, 결과적으로 수도권 주택 가격 폭등을 불러왔다. 교육부총리라서 소관 업무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바꾸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불행한 일을 당하셨을 때 ‘교육부총리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정책을 수정하도록 도와야 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합리적 온건주의자’라는 평을 듣는다. 자신도 “진보정당에 있었지만, 중도적인 정치를 해왔다”고 평가한다. 그런 그가 정치활동을 마무리하며 가장 염려하는 것은 팬덤 정치다. 지난달 28일 국회의장으로서 참석한 마지막 행사인 제76주년 국회개원 기념식에서 “22대 국회에서는 대화와 타협으로 진영정치와 팬덤 정치 폐해를 피하고 살아 숨 쉬는 국회를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후배 정치인들한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네 글자로 얘기하면 ‘헌법기관’이다. 나이 먹은 장관이 젊은 국회의원 보고도 ‘존경하는’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국회의원 개인이 헌법기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헌법기관이면 헌법기관답게 행동해야 한다. 정당의 공천을 받았어도 국회의원에게 표를 준 유권자 중 당원은 5%밖에 안 된다. 팬덤? 팬덤은 0.01% 정도다. 전체 국민을 보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의장은 26일 국가적 과제를 연구하기 위한 기관인 ‘글로벌혁신연구원’ 개원식도 진행한다. 그는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을 더욱 힘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저출생 대책이나 사교육비 해결을 위한 AI 공교육 혁신, 국방과학기술 분야에서 깊이 있는 연구로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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