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작다"며 여친과 결별, '거지'가 된 남자
[김상목 기자]
보이저 1호, 1977년 발사된 세계 최초 외 우주 탐사선이다. 2024년 현재 지구로부터 245억km 떨어진 우주를 항해하며 계속 멀어지고 있다. 보이저 1호는 1990년 태양계를 벗어나기 전 1장의 '셀카'를 찍었다. 별것 아닌 일 같지만, 정교하게 계산된 궤도를 비트는 일인 터라 논란이 거셌다고 한다.
하지만 <코스모스>로 알려진 과학자 칼 세이건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보이저 1호는 현재까지 최고 장거리 셀카를 찍는 데 성공한다. 제창자인 칼 세이건은 이 사진 중 지구 부분을 가리켜 '창백한 푸른 점'이라 명명한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대한 우주에서 현재까지 인류가 발견한 유일한 푸른 행성의 또 다른 호칭이다. 그리고 <코스모스> 서문에서 언급된 '창백한 푸른 점'의 형상을 한 우주의 먼지 같은 작은 별 안에서 우리는 아옹다옹 살고 있다.
영화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는 명백히 칼 세이건의 짧은 서문 메모에 담긴 함의를 쫓아가는 이야기다. 처음 보기엔 어느새 대중적으로 익숙해진 멀티버스 평행우주(세계) 설정을 'B급' 감성으로 펼쳐내지만, 그 속에 담긴 주제의식은 '창백한 푸른 점'의 그것과 거의 어긋남이 없다. 3개의 독립적 단편이 옴니버스 형태로 조합되지만, 곰곰이 관찰하면 일련의 '설계'가 느껴진다.
다만 '키치'적 잡동사니와 마블의 그림자, 존재론적 고찰이 혼재되다 보니 관객은 각자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본 작품에 대해 각자 다른 감상에 도달할 테다.
▲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영화 스틸 이미지 |
ⓒ (주)인디스토리 |
영화의 첫 번째 에피소드이자 2019년 독립된 단편으로 선공개된 작업이다. 웬만큼 '튀지' 않고서는 존재감을 얻기 힘들 법한 평범한 외모에 어중간한 등수로 기록되는 여자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
그는 하라는 공부 대신에 과학상식을 전한다는 유튜브를 소리를 줄인 채 탐독하는 중이다. 조회와 구독자를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된 숱한 유튜버들이 그렇듯, 학생이 빤히 시청하는 과학 유튜브 채널 역시 유사과학을 오가며 우생학적 잡설을 쏟아낸다. 학생은 생명체의 본능은 번식을 통한 DNA 영속이며 우수한 유전자가 승리한다는 아슬아슬하게 우생학 경계선에 맞닿은 그 유튜브 영상을 보던 중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게 된다.
그는 가방을 메고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탈주'를 감행해 유튜버를 만나러 간다. 자칭 '특별 자율학습'의 시작이다. 그러나 경탄하며 넋을 잃은 듯 보던 유튜브 채널의 실상은 별 볼일이 없었다. 주인공은 혼란에 빠져 PC방에서 검색하며 진리를 찾으려 해본다. 당연히 될 일이 없다.
대신에 옆에서 꾀죄죄한 행색으로 '야동'을 보던 남루한 행색의 젊은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간신히 봉변을 모면하게 된다. 천변에서 난감해하던 그에게 돌멩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45억 년을 살았다는 존재를 영접했지만, 학생은 꼰대 같은 소리만 늫어놓는 돌멩이가 마음에 안 드는지 냅다 집어던져 버린다. 하필 성당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그는 고해성사를 청한다. 내친김에 신부에게 신의 존재와 우주의 섭리를 묻지만, 믿음이 무너진 세계에서 신부 역시 근본적 질문에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영화 스틸 이미지 |
ⓒ (주)인디스토리 |
여기 한 명의 디오게네스가 있다. 그는 교외의 어느 초원에서 평범한 이들은 누리기 힘든 사치를 마음껏 만끽하는 중이다. 바로 벌건 대낮에 비타민D를 충전할 수 있는, 즉 햇볕을 쬐며 낮잠을 자고 있다. 달콤한 광합성 시간에서 깨어난 그는 기지개를 켜며 자신이 지금의 깨달음에 이른 과거를 회고하기 시작한다.
어릴 적 누구나 제출해 봤을 장래희망. 과거의 주인공은 '아빠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며 소박한 꿈을 기재한다. 그걸 지켜보던 아빠는 함박웃음 대신에, 꿈은 그런 게 아니라며 화를 낸다. 꿈이란 모름지기 거창하고 궁극적인 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빠를 진정시키기 위해 소년은 고심한다. 아빠는 '세상의 왕이 돼야 한다'며 길길이 날뛴다. 지금 세상에서 왕은 없으니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한 끝에 소년은 대통령이 꿈이라 수정한다. 아빠는 '내 아들이면 당연히 그래야지!' 하며 기뻐한다. 그 순간 소년의 운명은 결정된다.
그 첫 단계로 소년은 학급 반장 선거에 출마한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 말마따나 무엇을 할지 고민한 적이 없이 그 자리에 오르기만 바라던 소년의 공약은 형편없다. 그 대신에 실질적인 대가를 제공하는 상대 후보가 압도적인 득표 차이로 당선된다.
소년은 소년만화 주인공처럼 언젠가 '짱'이 되겠다며 굳게 다짐했지만, 학교의 진짜 '짱' 무리가 찾아와 '어디서 감히' 하며 소년을 구타한다. 그는 1/40 반장도, 1/200 '짱'도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좌절을 겪던 그는 첫사랑 '선미'를 만난다.
시간이 흘러 고3이 된 소년은 여전히 어릴 적 꿈을 잃지 않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다음 단계로 올라서려면 서울대에 진학해 발판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의 성적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평범한 대학에 입학해 술독에 푹 빠진다. 이 좋은 걸 이제야 알았다니. 그는 '정경유착'의 찬란한 미래를 함께할 외국인 유학생 '빌'과 술 냄새 진동하는 대학 생활을 이어간다.
#세 번째 우주 : '진실을 아는 자'
▲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영화 스틸 이미지 |
ⓒ (주)인디스토리 |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첫사랑과 재회해 누리던 짧은 행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커플이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잔디밭에 누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커플이지만, 남자는 '우리의 사랑은 지속 가능한 시간이 제한돼 있어 1년 9개월 후면 식을 것'이라는 둥 초를 치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화가 난 여자는 '헤어지자는 말 빙빙 돌려서 하지 말라'며 남자를 후려치고 떠나버린다. 딱히 지금 헤어지자는 의도는 아니었던 남자는 당혹스럽다.
남자는 이후로도 계속 분위기 망치는 소리를 쓸데없이 여기저기 늘어놓다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역설적으로 그가 오욕을 뒤집어 써준 덕분에 그와 접촉한 이들은 스트레스를 풀긴 했다.
남자는 계속 무례한 오지랖을 부려대다 흠씬 맞는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겐 '어차피 그렇게 열심히 살아봐야 치매에 걸려 얼마 못 살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여자 고등학생에겐 '변두리 인생밖에 미래가 딱히 없을 것'이라고,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은 한일 취객들에겐 고도의 양비론으로 약을 올리다 집단구타를 당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적은 피켓을 들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겐 말도 꺼내기 전에 둘러싸여 폭행을 당한다.
만신창이가 된 그는 자신을 구원해줄 여자친구에게 화해를 제안하지만, 임시방편으로 구원의 천사를 찾는 그의 간계는 어김없이 빗나간다. 결국에 또다시 여자친구에게 분노의 주먹을 제대로 맞고 쓰러진 그를,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거지가 된 남자가 구조한다. 그에게서 현자의 풍모를 본 남자는 필사적으로 세상의 진실을 캐묻지만, 대답을 듣고 난 그는 그래도 거지보다는 자신이 더 우월한 유전자라며 정신승리로 일관한다.
시스템 손바닥 안에 갇힌 세태를 풍자하다
각각 10대와 20대 전후반으로 추정되는 세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그저 영화를 보게 될 대다수 관객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존재들이다. 우리 사회 대다수를 구성하지만 무색무취하게 단지 숫자와 통계로만 분류되는 이들의 전형으로 설정된다. 문제아도 엘리트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주목받을 일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개별의 삶은 결코 수치로만 규정될 것이 아니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집요하게 각인시키려 애쓴다.
10대를 대변하는 여고생은 그중에 가장 파국에서 벗어난 이로 설정된다. 땡땡이를 친 덕분에 혼은 좀 나겠지만 결국 원래의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세 주인공 중 가장 평범한 현인에 가까운 존재다. 자신은 어차피 우월 유전자가 아니고 현실의 시스템을 초월하기란 만만하지 않으니 주어진 일상에 매진하며 하하호호 친구와 어울리는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단품으로 선공개된 이 첫 번째 에피소드가 장편으로 확장된 이야기의 가장 기원이라 본다면, 해당 이야기의 결말이 가장 원론적인 주제가 될 테다.
20대 전반의 평범한 대학생은 부모세대에게 주입된 과도한 목표 설정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하는 청년세대의 전형일 테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취업절벽 시대를 묘사하는 기묘한 풍자로 여러 학생 단편영화에서 애용(?)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아무리 애를 써 봐야 한국 사회에서 학벌을 포함한 제반 조건은 이미 주인공이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를 뛰어넘을 수 없다. 꿈을 그래도 계속 쫓고 싶지만, 그의 몇 안 되던 편도 하나둘 떨어져 간다.
그래도 아빠의 격려를 믿으며 미몽을 포기하지 않던 그에게 아빠가 날린 무책임한 일갈은 충격과 공포나 다름 없다. 아마 이 에피소드 속 주인공의 심정이 감독이 자기 세대를 대변해 기성세대에게 날리고픈 우회적 펀치가 아닐까. 끝내 미몽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거지가 되는 상황은 곧바로 세 번째 에피소드로 연결된다.
세 번째 이야기 속 주인공은 그렇게 기성세대와 시스템 안에 갇힌 채 길이 들여진 '노예'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런 가운데 일찌감치 포기한 여고생과 달리 이어지는 에피소드 속 20대 청년들은 참담한 실패를 겪으면서도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은 한국 근대문학 작품 제목처럼 '두 파산'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하나는 사회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다른 하나는 겉으론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인성적으로 '강약약강'을 체화한 존재가 될 테다. 그런 실정인데도 이들은 서로 내가 조금 더 낫다며 으르렁댈 따름이다.
▲ 영화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 포스터 이미지 |
ⓒ (주)인디스토리 |
아마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살을 붙여 장편화하는 경로를 거쳤을 영화에는 시간의 흐름도 확인된다. 세 에피소드의 등장인물들은 다른 에피소드에서 각각 원래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출몰하곤 한다. 첫 단편 속 고등학생 주인공은 아마 가장 시차 폭이 컸을 세 번째 에피소드에선 확연히 어른이 된 모습이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직접적으로 묶이며 영화의 화두를 보강하는 역할을 담당해 영화의 탄생과정을 거슬러볼 수 있게도 해준다.
영화에는 '쌈마이'적 면모를 갖추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어차피 대자본 투자와 빵빵한 환경에서 작업할 수 없으니 더 극단적으로 B급 정서로 승부를 걸어보자는 방향이 뚜렷하다(정작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 꽤 많은 인원이 함께했음을 알 수 있어 벙찌게 만든다). 그런 시도는 어떨 땐 피식 하는 웃음을, 어떤 때는 과잉이라 오히려 눈썰미를 찌푸리게도 만든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무심코 넘어갈, 마치 막과 막 사이 간주곡처럼 활용되는 옛날 오락실 전자오락기 초기화면 같은 도트 이미지를 유심히 보면 이야기가 확장될수록 점점 더 화면 비율이 변경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감독과 제작진이 영화의 구성과 형식을 대충 임하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 화면비의 미세한 조정 역시 품이 들어가는 일이다.
언뜻 무의미한 일상과 그에 침범하는 현학적 장광설, 그리고 그와 자주 충돌하는 키치 정서의 묘한 혼합물 같은 영화이지만, 본 작품은 현재 청년세대가 처한 대략난감한 상황을 담고 있다. 이미 기성세대가 짜놓은 판 안 주어진 룰을 자신들이 왜 감내해야 하는지 이해도 동의도 안되는 세상에 대한 치열한 풍자이자, 그저 익살에 그치지 않는 유희적 저항의 범벅이다. 물론 손오공이 실패한 것처럼 그 매트릭스 밖으로 탈주하는 데 극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이 영화를 만든 이들 역시 그 진실을 직시하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장난'을 치는 것으로 흔적을 남기려 애쓴다.
이 영화가 담은 주제의식과 표현기법의 불일치 혹은 헐거움은 한국독립영화가 청년세대, 즉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보이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자체가 2024년 한국 사회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물이라는 점은 엄연히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작품정보]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
Stars in the Ordinary Universe
2023│한국│멀티버스 코미디
2024.06.26. 개봉│69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김보원
출연 박서윤, 심규호, 오동민, 심태희, 임예은, 그리고 팡이(고양이)
음악 루모스뮤직
배급 ㈜인디스토리
2023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장편
2023 싸이파이안페스타: 한국SF 장편
2023 슬램댄스영화제: 장편 경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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