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넘은 엄마의 인공골반수술... 아들 간병의 시작

강충민 2024. 6. 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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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제 어머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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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충민 기자]

지난 어버이날(5월 8일) 이었습니다. 엄마는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못 걷겠다 했습니다. 평소 아파도 잘 말하지 않던 터라, 견디기 힘든 상황임을 알았습니다. 부랴부랴 가까운 정형외과를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아프면 바로 얘기를 하라고 몇 번을 힘주어 말했고, 엄마는 "알았저게. 알았저게"(알았다, 알았다) 했지만, 그 대답을 믿진 않았습니다. 엄마가 당신 스스로 '아프다' 말 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엄습해야 가능한 일임을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정형외과 의사는 바로 찍은 X –레이 사진을 보고, 허리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손으로 엄마의 아픈 부위를 찾고는 허리가 아니라 골반이 문제인 것 같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응급으로 좀 큰 병원으로 가서 CT나 MRI를 찍어보라고 해서, 했습니다. 급하게 큰 병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 수술 후 중환자실  수술하고 중환자실에 하루 있었습니다. 소변줄, 링거줄을 뗄까봐 양쪽 팔을 묶었는데 자꾸 풀어달라 했습니다.
ⓒ 강충민
 
다음날(5월 9일) CT와 MRI를 찍고 난 후, 엄마의 골반은 부러졌고, 그걸로 지탱하려니 허리에도 통증이 온 것이라 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며, 만약 하지 않으면 누워서 지내는데 그러다 골근육이 빠져 돌아가시는 수순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엄마는 충분히 인공골반수술이 가능하다 했습니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바로 월요일(5월 13일) 수술 날짜를 잡았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엄마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1급 시각장애인입니다. 1983년 갑자기 실명한 후천적 전맹입니다. 그러니 누가 엄마 간병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아흔 네 살의 엄마를 타인이 간병하다, 자칫 더 큰 사고가 발생하진 않을까, 지금껏 생활해 온 공간과 다른 낯선 병실에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컸어요. 이 물음에 각시는 명쾌하게 해답을 내렸습니다.

"당신이 해야지. 당신 지금 딱 백수잖아!"

각시의 말에 항변을 하고 싶었습니다. '난 백수가 아니다, 엄연히 감귤농장을 하고, 문화관광해설사를 하고 있고, 틈틈이 한국어도 가르친다'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각시가 내게 말한 '당신은 백수'라는 의미는 적어도 시간에 그닥 구애를 받지 않는 상황임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구구절절하게 백수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도 우습고, 사실 그게 본질은 아니니 제가 엄마를 간병하기로 했습니다. 쉽게 생각했습니다. 내 엄만데요.

엄마 병원 간병의 시작

입원한 병실은 5인실인데, 엄마처럼 대개가 골반, 허리,등의 문제로 입원한 분들이었습니다. 환자 다섯에 간병인이 나를 포함한 열 명인데, 저만 혼자 남자였습니다. 오히려 저만 남자라서 병실 분들이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기저귀의 접착할 수 있는 부분이 위로 가고, 속 기저귀만 갈고 팬티 기저귀는 하루 정도 써도 된다고 알려 주었고, 휠체어에도 환자복의 두 다리 끝을 한 손으로 잡아 고정시켜 앉히는 것도 자근자근 알려주었고요.
 
▲ 세수시키기  저도 애기 때 엄마가 세수를 시켰겠지요.
ⓒ 강충민
 
고백하건대, 엄마가 빨리 기운차려야 내가 조금이라도 편할 거라는 얄팍한 이기심이 더 컸는지 모릅니다. 이런 나의 바람에도 어떤 날은 엄마는 아예 밥을 한 숟가락도 먹지 않았습니다. 먹어야 집에 갈 수 있다며 애원과 달래기를 반복해도 도리질만 했습니다.
엄마는 컨디션이 안 좋을 땐 "원재어멍 언제 왐시니?"라며 당신의 며느리, 즉 각시를 찾았습니다. 그럴 땐 내 뒤끝이 작렬했습니다. 세수 시킬 때 얼굴을 세게 박박 문지르면, 엄마는 "아야 너미 세게 밀엄쩌께"(아야 너무 세게 밀고 있어) 하면 그 말에 천연덕스럽게 "때 막 하수다"(때가 아주 많아요) 했습니다. 나는 참 나쁜 아들입니다.
 
▲ 병실 스트레칭  틈틈이 스트레칭을 했습니다. 간병은 체력이다. 를 되뇌이면서요.
ⓒ 강충민
 
금요일 저녁에 각시가 와서, 일요일 아침까지 교대해주었는데, 그때가 휴식이었습니다. 엄마 역시, 각시가 오면 미주알 고주알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의 며느리에게 '원재 아방이 세수를 아주 아프게 시켰다'고 더 과장되게 토로했다더군요. 묘한 배신감이 들었지만 뭐 어쩔 수 없죠. 사실이니까요.

간병은 무료함과 긴장의 공존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운동을 했습니다. 새벽 네 시쯤, 엄마의 옅은 코 고는 소리가 달게 들리면, 병원 1층부터 6층까지 계단을 15회 올랐습니다. 낮에는 자주 침대 모서리 한 켠에서 스트레칭을 했습니다. 간병은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되뇌이면서요.

기저귀를 처음 갈 때, 엄마와 실랑이를 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아들에게 보여주는 게 부끄러웠나 봅니다. 아 참 묘한 감정이더군요. 양 손으로 바지춤을 꼭 잡은 엄마의 손을 살며시 풀면서 귀에 대고 얘기했습니다.

"엄마 조금만 더 참자!..."

뜬금없는 내 말에 스르르 엄마의 손이 풀렸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엄마에게 무얼 참으라고 했는지. 참으면 어떻게 나아질지, 왜 그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만 42년 시야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살아왔는데, 여기서 더 참으라니... 그동안의 엄마의 슬픔, 외로움은 생각하지 않은 지극히 무책임한 타자(他者)의 시선으로 내뱉은 것이지요.
 
▲ 꽃향기를 맡는 엄마  나아지면서 병원3층 정원을 자주 갔습니다. 금계국 한 송이를 꺾어드리니오래도록 향기를 맡았습니다.
ⓒ 강충민
 
소변줄, 링거줄을 떼고 엄마는 보행연습을 시작하면서 한결 좋아졌습니다. 보행연습을 하고 3층 정원에서 쉴 때면 초여름 볕에 지긋이 눈을 감고, 오늘이 몇 일, 무슨 요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정원에 핀 금계국 한 송이를 꺾어주면 오래오래 그 향기를 맡았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 그냥 좋았습니다.
퇴원하고도 간병, 그래도 좋습니다
 
▲ 자리물회 만들기  병원에 있을 때, 먹고 싶다 던 자리물회를 만들어드렸습니다. 한 그릇 다 비우고 맛있게 먹었다 하셨습니다.
ⓒ 강충민
 
6월 12일, 엄마는 정확히 35일을 입원하고 퇴원했습니다. 집에 온 다음 날 엄마에게 자리물회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병원에 있을 때부터, 엄마는 자주 자리물회를 먹고 싶다 했습니다.

잘게 자리돔을 썰고, 억센 가시를 잘게 다졌습니다. 썬 자리돔에 오이, 미나리, 부추, 무를 채 썰어 날된장에 참기름, 매실액, 다진 마늘을 넣고 비볐습니다. 점심으로 밥 한 공기와 자리물회를 드렸습니다. 천천히 다 드시고 엄마는 한 마디 했습니다.

"산도록허게 맛 좋게 잘 먹었져. 하도 좀지롱허게 썰어신고라 빼도 다 먹어져라."
(시원하게 맛있게 잘 먹었다. 워낙 잘게 썰었는지. 뼈도 다 먹을 수 있었어.)
  
▲ 엄마의 변신  퇴원한 다음 날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엄마는 원장님에게 몇 번이나 예쁘게 잘라달라고 했습니다.
ⓒ 강충민
서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넉넉 잡고 8월 초가 되면 엄마는 더 나아져,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노래부르기, 만들기, 바깥 놀이 가는 걸 좋아합니다. 그전까지 저는 조용히 엄마 곁에 있으면 됩니다. 가끔 아웅다웅 하겠지요.
 
▲ 워커보행연습  아파트 테라스가 넓어 보행연습하기 좋습니다. 하루에 두 번 연습합니다. 열심히 연습하면 시각장애인 복지관을 다시 나갈 수 있습니다.
ⓒ 강충민
 
제 은사님이나. 친구들이 제게 얘기하더군요. "너 대단하다." 저는 그 말에 그냥 대답합니다.

"우리 엄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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