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간다! 못하는 게 없는 원더 원지
Q : 방송과 광고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데, 최근까지 매니저가 없었다고요. 혼자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링까지 다 하고 다녔나요?
A : 지난 4월부터 매니지먼트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지금도 메이크업만 숍에 가서 받지 헤어는 그냥 ‘빠마’하고 다니고, 옷도 제가 사서 입어요. 요즘 쇼핑 중독입니다. 취향이 명확해서 알록달록하고 과한 걸 좋아하거든요. 딱 오늘 콘셉트처럼! 신발, 안경, 모자 같은 걸 엄청 사놔요. 해외 나가면 ‘원앤온리’인 빈티지나 독특한 옷들을 많이 사요. 얼마 전 신림동 원룸에서 맞은편 투룸으로 이사했는데, 이젠 드레스룸이 필요합니다.(웃음)
Q : 성공한 것에 비해 소박한 이사였네요!
A : 원룸에 5년 정도 살았는데, 집이 너무 좁으니 물건 둘 때도 없고 갑자기 화가 많이 나서 다음 날 바로 계약해버렸어요. 그래도 투룸이 되니 훨씬 살기 편해요. 하반기 정도에 좀 덜 소박한 곳으로 가볼까 하고 있습니다.(웃음)
Q : 여행이 업인 건 어때요? 이 일의 기쁨과 슬픔은?
A : 좋아하는 게 생업이 된 거죠. 제 사주를 보면 제가 5대륙 6대양이 활동무대라고 하대요. 어느 도시에 가든 현지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는 게 기쁨이에요. 이젠 여행이 일상이라 그냥 집에서 규칙적으로 먹고 자는 게 여행 같아요.(웃음) 너무 자주 집을 비우다 보니 PT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일상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게 이 일의 슬픔입니다.
Q :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아무것이나 잘 먹는 편인가요?
A : 네. 꼭 맛있는 걸 찾아 먹어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잠도 일찍 자요. 물갈이도 안 하고, 세수하고 아무거나 발라도 뭐 안 나고, 머리도 린스도 안 하고 드라이도 안 해요. 고산병도 없고요. 완전 여행에 최적화된 스타일이죠. 옛날엔 벽이랑 천장만 있으면 잤는데, 요즘엔 한 살 한 살 더 먹으니까 매트리스도 있었음 좋겠고 개인 화장실도 있으면 좋겠고 뭐 그렇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사는 거죠.(웃음)
Q : 여행에도 재능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A :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 날씨, 언어, 식사, 숙소, 생활 방식, 교통수단이 다 바뀔 때 바로바로 적응해야 해요. 그리고 일정이 틀어질 때 순간적인 대처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차가 연착하거나 숙소가 갑자기 취소될 때도 많거든요. 그런 게 재능이라고 하면 저는 여행 재능이 있는 것 같네요! 완전 P라 계획이 바뀌면 오히려 즐기거든요.
Q : 여행 유튜버의 시대예요. 후발 주자도 무수하죠. 원지 씨는 여성 여행 유튜버로 존재감이 뚜렷해서 더 대단하다고 느껴요. 아무래도 여성으로서 여행 콘텐츠의 루틴인 과감한 흥정을 하거나, 노숙을 하거나, 처음 보는 인물을 따라가거나, 그의 집에서 자거나, 옷을 훌렁 벗고 수영을 하거나 하는 일들이 쉽지 않을 테니까요.
A : 진짜 그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여행 유튜버들은 낯선 분들 집에 가서 많이들 숙식하는데 저는 그게 안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걸 아예 캐릭터로 부각시켰어요. 내향인으로.(웃음) 숙소 방에 누워서 하는 ‘눕티비티’라는 말을 만들고, 현지의 헤어 메이크업을 받아 변신하는 뷰티 콘텐츠에 도전하고, 쇼핑 중독자 캐릭터도 만들었죠. 요즘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내년에 꼭 가보려고요. 북유럽에 그릇 사러도 가보고 싶습니다.
Q : 본격적인 첫 여행은 2011년에 간 아프리카 3개월 여행이죠?
A : 남아공,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말라위,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를 갔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종이 지도랑 가이드북 가져가고, 블로그나 카페에서 아프리카 여행 고수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기도 했어요. 근데 가기 전엔 졸았는데 가보니까 별거 없던데요?(웃음) 내가 잘 몰라서 막연하게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닐 때가 많더라고요.
Q : 그때는 여행 유튜버로서 콘텐츠를 찍으러 간 게 아니고 오롯이 자신을 위해 갔죠.
A : 진짜 그랬죠!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다 때려 부어서, 이때 아님 언제 해보겠냐는 마음으로 갔어요. 스마트폰도 없이 오롯이 24시간 현지를 계속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즐기면서. 어찌나 심심했는지 일기를 썼어요. 오늘은 어디 가고 뭘 했다. 그런 경험을 해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Q : 왜 그렇게 고생스러운 아프리카를 택한 거예요?
A : 어릴 때부터 모험가나 탐험가가 되고 싶었어요.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영화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세계 7대 불가사의,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학창 시절에 가세가 기울어 단칸방에서 지내면서 공간적인 결핍이 컸거든요. 4명이 누우면 딱 끝나는 진짜 요만한 방이었어요. 나중에 아버지는 이혼해서 나가시고 여자 셋이서 그 방에서 살았죠. 그때 아프리카 초원 같은 드넓은 곳을 달려보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여행에선 내 공간이 아예 없으니까, 역설적으로 모든 게 다 열려 있기도 하잖아요.
Q : 그땐 마음고생도 했겠어요.
A : 별생각 없었어요. 뭐, 좋지는 않았지만 딱히 비관하지도 않았어요.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간에 그랬어요. 학교에서도 잘 지냈고요. 보면 반의 모든 애들과 친한 애가 있잖아요. 소위 말하는 일진부터 만화 좋아하는 친구까지 다 잘 지냈어요.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데 얕고 넓게 친했죠. 제가 저소득층이다 보니 항상 급식 당번을 해서 급식을 먹었는데, 밥숟가락 쥔 권력자잖아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웃음)
Q : 그거 대단한 능력인데요.
A : 모두와 깊게 친한 건 아니고, 누구와도 껄끄럽지 않을 정도로 친한 그런 수준이에요. 남에게 기대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바라지 않으니, 상대도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그래서 제게 편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Q : 콘텐츠에서도 보면 원지 씨는 절대 선을 안 넘더라고요.
A : 내가 싫은 건 남도 싫겠지. 그 생각대로 합니다.
Q : 개인주의는 어떻게 형성하게 된 태도예요? 타고나길 그랬나요?
A : 타고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엄마를 잘 안 찾았대요. 엄마가 집을 비운다고 울지도 않고, 엄마가 “뚜껑 열어줄게” 하면 “내가 열 거야”라고 하는 애였다고.(웃음)
Q : 씩씩한 아이였네요. 게다가 성실했어요. 전액 장학금을 받고 건축학과에 입학했죠.
A : 제가 지구과학, 생물, 화학 같은 걸 잘해서 이과를 갔거든요. 미대를 가고 싶었는데 실기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가장 예술적으로 보이는 건축학과를 갔어요. 장학금은 저소득층 이공계 국가장학금 대상자라 신청했더니 된 거예요. 벼락치기도 좀 잘하긴 했지만.(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불평을 안 했던 건 좋은 집 생활이 어떤 건지 몰랐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그렇구나’가 되는 거죠. 근데 저는 힘들었던 시절은 잘 기억도 안 나요. 분명 힘들었는데, 여러 번 울기도 했는데, 그 감정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아요.
Q :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잘 흘려보내나 봐요.
A : 좋은 것도 잘 까먹어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 아무리 좋은 과거도, 안 좋은 과거도.” 과거에 잘살았다고 지금 잘사는 거 아니잖아요. 못살았다고 지금 못사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 벗어나야 현재를 살 수 있어요. 현재를 사는 성격이라 미래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진 않습니다. 적금도 안 들어서, 얼마 전 은행에 가서 예금 하나 들었는데 “이러면 안 되신다”고 혼났어요.(웃음)
Q :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스타트업을 창업하기도 하고, 프리랜스 그래픽 디자이너와 영상 제작자로 일하기도 했어요. 다채로운 커리어 패스예요.
A : 저는 학교 다닐 때부터 직업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샛말로는 N잡을 하고 싶어 했죠. 회사에 다녀보니 제가 9 to 6 조직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건축설계 사무소를 때려치우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청년 창업 지원을 알아봤어요. 한국콘텐츠진흥원, 중소벤처기업부 같은 기관에 잘 찾아보면 좋은 지원 사업이 많아요. 그때 4인 팀을 꾸려서 원데이 클래스와 고객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만들었는데, 당시엔 SNS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너무 일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접고,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룰 줄 아니 로고나 포스터를 만들면서 생활비를 벌었죠. 계획 없이 마음의 소리만 따라다녔어요. 첫 회사를 퇴사할 때 “딱 1년만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게”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네요. 자유를 맛보니 돌아갈 수 없더라고요.(웃음) 그 덕에 지금도 기획서를 잘 써요. 잔기술을 많이 갖췄죠.
Q : 원지 하면 아프리카가 떠오를 정도로 아프리카 스페셜리스트죠.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우간다에서 유튜버 육성 사업을 했을 땐 어땠어요?
A : 그것도 시기가 너무 일렀어요. 2016년이면 아직 제 주변에 유튜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때거든요. 그때 우간다에서 유튜브 사업을 하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니까. 하지만 그 덕에 지금도 유튜브를 하고 있죠!(웃음) 유튜브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할 줄 아는 건 많은데 남은 것도 없고 창업하려 했던 팀과도 제 갈 길 가기로 한 후 어느 연말이었어요. 모든 게 끝인 거야. 되게 우울했어요. 그때 누워서 미국 유튜브 콘텐츠를 많이 봤어요. 그때가 2015년쯤이었는데, 지원 사업을 발견하고 ‘우간다 친구들과 만들어볼까?’ 싶었죠. 우간다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거든요. 미디어 등을 통해 비쳐진 아프리카의 모습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잖아요. 기아, 질병, 가난…. 근데 제가 가본 아프리카는 웃기고 재미있는 친구도 많고, 돈 많은 친구도 많았거든요? ‘왜 가난한 모습을 보여줘야만 돈을 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튜브는 재미있으면 돈을 주더라고요. 1년 정도 우간다에서 지내면서 영화 학교 친구들과 이런저런 시도를 했어요. ‘불닭볶음면을 먹은 우간다 친구들의 반응’ 브이로그가 반응이 좋았죠.
Q : 이후엔 LA에서 영상 제작 일을 했어요.
A : 영상 만드는 인턴으로 일하면서 미국이 저랑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능력주의, 자본주의, 개인주의가 깔끔하다고 생각했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 낸 만큼 서비스 받고, 능력만큼 대우받는 게 정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제겐 매력적이더라고요. 미국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에 시카고에 있는 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했어요.
Q : 어떻게 전업 여행 유튜버를 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나요?
A : 시카고에서 일을 그만두고 사이드잡으로 했던 유튜브를 한번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2019년쯤이었죠. 유튜브가 딱히 잘되진 않았지만, 그때는 여행 유튜버가 많이 없어서 간간이 광고가 들어오더라고요. 그때가 기업들이 블로그에 주던 광고를 유튜버에게도 조금씩 주던 시기였어요. 근데 유튜버 풀이 좁으니까 제게도 연락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본격적으로 해봐도 되겠다 싶었죠. 근데 뭔가 잘될 만하니까 코로나19가 터져 목수 일을 배웠습니다. 정부 지원 사업을 또 찾아서 저렴한 학원비로 목수 일을 배우며 브이로그로 이어가다가, 2021년도 말쯤 해외여행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어요. 그때 제대로 여행 유튜버를 해봐야겠다 싶어 해외로 여행을 떠났죠. 제가 그때 6년 차 유튜버였는데도 구독자가 5만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근데 코로나19 때 사람들이 해외여행 나가기 어려우니 여행 유튜브로 대리만족을 하면서 시장이 커졌고, 제 채널 구독자도 몇십만으로 급상승했어요. 운이 많이 따라줬죠.
Q : 이렇게 여행 유튜버로 크게 성장할 것을 예상했나요? 91만 구독자에 TV 예능에도 출연하고, 광고며 화보 촬영까지 할 정도로.
A : 진~짜 생각도 못 했어요.(웃음) 제가 전업 유튜버를 시작할 땐 유튜버가 방송에 나가는 사례 자체가 없었거든요? 잘돼도 유튜브란 플랫폼에서 잘되는 거였죠. 근데 제가 이렇게 방송에 출연하고 〈코스모폴리탄〉 화보를 찍고, 세상 정말 많이 바뀌었다. 오늘도 화보 찍으러 오면서 느꼈어요.
Q : 원지, 빠니보틀, 곽튜브까지 여행 유튜버 세 분이 매체를 넘나드는 대표적인 케이스죠. 〈걸어서 세계 속으로〉 〈세계 테마 기행〉 같은 방송에선 진행자의 존재감이 희미하잖아요. 그런데 여행 유튜버들은 여행지가 아닌 그곳을 걷고 있는 자신을 찍으면서 끊임없이 말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들어요.
A : 그래서 더 친근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마치 친구와 같이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기존 레거시 미디어에서도 여행 예능은 옛날부터 잘됐어요. 유튜브라는 새 플랫폼에서도 흥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고 봐요.
Q : 그래서 유튜버의 인간적인 매력이 여행지보다도 중요하죠.
A : 진짜 그래요. 자극적인 콘텐츠를 하면 조회 수가 터질 수도 있지만 구독과 다른 영상 시청으로는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뛰어난 외모라 해도 그게 영상을 계속 시청하게 하는 요인이 되진 않죠. 대중의 시선에서 나의 어떤 점이 매력적인지, 자기 객관화를 하는 과정이 아주 중요하죠.
Q : 원지 씨는 뿔테 안경, 뽀글 머리, 독특한 말투, 낙천적인 성격 등 캐릭터가 뚜렷해요. 여행이 아닌 일상 콘텐츠를 했어도 떴을 거라 생각해요.
A : 호불호가 강한 캐릭터기도 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말투가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부산 사람인데도 부산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봐요.(웃음) 사실 장르가 브이로그면 연기하는 건 한계가 있거든요. 자기 본연의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제 모습을 어떻게 나타내야 캐릭터가 될지 고민했고, 남자 여행 유튜버들이 못 하는데 나는 할 수 있는 거를 생각했고,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모습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어요.
Q : “맛있는고~”, “화 마이나네”, “호롤롤로”, “기째기째” 같은 특이한 말투로 유명한데, 이런 말투는 사투리도 아니고 원지만의 것이라 더 재미있어요.
A : 그냥 제 입말이에요. 유행어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오는 대로 뱉거든요.(웃음)
Q : 목수 일은 왜 해보고 싶었어요? 영상 편집이나 그래픽 디자인과 목수는 정말 다른 일 같은데.
A : 제가 손재주가 있어요.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해요. 자랑 맞아요.(웃음) 어릴 때부터 색종이 잘 접었어요. 어른들이 저한테 “손재주 좋은 손이다”, “야무진 손이다”라는 얘기를 많이 하세요. 그리고 전 테트리스처럼 효율적으로 공간을 구상해서 딱딱 짜맞출 때 쾌감을 느껴요. 그런 면에서 목수가 적성에 딱 맞죠. 사실 유튜브나 그래픽 디자인은 인풋 대비 아웃풋이 명확하지 않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될 때도 안 될 때도 있죠. 그런데 목수 일은 대패질을 열 번 하면 열 번 한 만큼 예뻐져요. 아주 정직하죠. 그게 엄청난 힐링이 돼요. 나무의 촉감도 편안하고요.
Q : 여행 굿즈 브랜드 ‘홀롤롤로’ 웹사이트도 오픈했죠.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가 귀엽던데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나 봐요.
A :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아이디어가 시각적으로 구현됐을 때의 쾌감! 그리고 그것이 유용할 때 희열을 느껴요. 여행 다닐 때 카드, 호텔 키, 입장권, 지하철 패스들을 넣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지갑이 딱히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만들어버렸죠. 홀롤롤로의 제품은 제가 동대문 가서 직접 원단 떼 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했어요. 폰트부터 패키지까지. 사실 이쯤 되면 도와주실 분을 찾을 만하거든요. 그런데 이상한 자존심이 있어서 혼자 다 해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혼자 했는데 할 만하더라고요.
Q : 멀티테이너로서의 성장 가능성이 엿보이는데, 여행을 떠나 다른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출연한다면 무엇을 해보고 싶나요?
A : 곽튜브 같은 친구를 보면 연예인으로서의 끼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달라요. 저는 기획과 제작, 브랜딩 쪽이 훨씬 재미있고 해보고 싶어요. 홀롤롤로로 미국에도 진출해보고 싶고요. 너무 혼자 하는 거에 익숙하다 보니 같이 일하는 법을 모르는 게 제 최대 단점인데, 인력도 고용하고 시스템화를 해야 브랜드도 키워갈 수 있으니 배워가려고요.
Q : 미국 영주권을 취득해 이민기 브이로그를 올리기도 했어요. 훗날 미국에서 거주할 생각도 있나요?
A :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웃음) 진짜 미국 가서 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미국 영주권을 신청하고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업무가 중단돼 4년 뒤에야 나온 거예요. 그래서 이민기를 찍기도 했는데, 마침 예능 〈지구마불 세계여행〉 등 여러 기회가 많아지면서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다가 한국에서의 일정이 많아져서 이젠 들어왔죠. 물 흐르듯이 살고 있는데, 지금도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긴 합니다. 홀롤롤로 제품을 미국에서 팔아보려고 사업자 등록도 신청하고 왔어요.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해요.
Q : 원지에게 재미란 뭔가요?
A : 내가 좋아하는 걸 명확히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 그러니까 취향을 행하는 것. 브랜드 얘길 많이 했지만, 저는 사업가 타입은 아녜요. 물론 자본주의 만만세고 돈 좋아하는데, 저는 이윤이 아니라 재미가 최우선이거든요. 한창 주식 열풍이 불어서 저도 한번 해봤는데, 돈으로 돈을 버는 게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 시간에 그냥 재미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었죠. 홀롤롤로도 사업적으로 생각하면 만들어서 팔 수 있는 제품은 정말 많은데, 제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제품만 만들고 있어요.
Q : 그런 원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뭔가요?
A : 자유를 잃는 거요. 제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되면 화가 ‘마이’ 나요.(웃음) “그거 하면 돈 안 돼”, “너 나중에 뭐 먹고 살래?”는 식의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인생 모토가 “Lazy but not stupid”에요. 남들이 보기엔 게을러 보여도 똑똑하게 살려고 하고 있으니, 다들 마이웨이로 잘 살아보자고요!”
Q : 경제적 자유를 이룬 지금까지도, 타협하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A : 고집이 더 세졌어요. “에이씨~! 어쩌라고! 해버릴 거야!” 같은 상태랄까.(웃음) 지금 제 취향은 제 모든 경험과 소비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바꾸고 싶지 않아요.
Q :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A : 남들이 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어릴 때는 두려움이 좀 있었는데, 제가 워낙 특이한 선택지를 많이 선택해 여러 경험을 하다 보니,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닌데?’라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한국에서의 기준이 외국에 나가면 아닌 경우도 많았고, 사람마다도 달랐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겠구나! ‘간땡이’가 커졌어요. 남들의 말이나 보편적인 기준으로 선택하면 항상 ‘그냥 내 마음대로 해볼걸’ 하고 후회가 남아요. 전 후회 없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 어떤 게 용감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A :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우리나라는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 게 쉽지 않아요. 특히 부모님이라든가 상급자의 말은 거역하기 어렵죠. 그런데 저는 성인이 되면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는 한에서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내가 감당할 수만 있다면요.
Q : 원지 씨는 용감하네요.
A : 어! 그렇네요. 오, 나 용감한 사람이었어요.(웃음)
Q : 원지는 무엇을 믿나요?
A : 옛날에 저희 어머니가 그랬어요. “우리 집에는 물려줄 게 하나도 없으니, 네 머리와 몸뚱이만 믿고 가라.” 저는 그 말에 기대서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나만 믿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어디로든 가면서요.
Q : 다음 행선지는 어딘가요?
A : 스리랑카요. 〈지구마불 세계여행〉에 같이 나왔던 (원)진아가 가보고 싶대서 같이 가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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