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순직과 더불어 끝난 7년간의 전쟁
이순신 장군 해전 현장 탐사 대원들이 15일간 항해를 마친 후 쓴 항해기입니다. 1차 항해는 5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동방항로, 2차 항해는 6월 3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방항로로 15일간입니다. <기자말>
[오문수 기자]
▲ 남해군 문화관광과에서 다운받은 사진으로 이순신순국공원일대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와있다. 바다 가운데 길게 뻗어나온 반도의 숲속에 '이락사'와 '첨망대'가 있고 그 뒷편 바다가 관음포다 |
ⓒ 오문수 |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건 달이다. 달마저 구름속에 들어가 숨어버리면 의지할 것이라고는 별이다. 달이 빛이라면 별은 방향타다. 천문기구와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별자리는 밤길을 가는 사람들의 길잡이였다. 대표적인 별이 북극성이다. 밤에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북극성을 보고 갈길을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 제 살길만 찾아 백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당파싸움과 사리사욕에만 치중하다 국난을 초래한 권력자들에게 진저리 치던 백성들에게 이순신은 큰 별이었다. 비천한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였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의 종지부를 찍는 최후의 전쟁에서 왜적의 총탄을 맞고 순직했다.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참전한 명나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을 궤멸시키다시피한 일본군은 연이어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켰다. 조선이 함락되면 명나라가 직접 공격받을 것을 우려한 명나라는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참전하여 사로병진작전에 돌입했다.
▲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가 남해대교 아래 정박하고 있다. 야경모습이다 |
ⓒ 오문수 |
5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 보름간 진행됐던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의 주된 관심사는 수로군에 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칠천량 패전으로 조선이 사라질 위급한 순간에 명량해전 승리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것이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앉았던 재상들을 보고 말하기를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또 장차 패하겠구나! 진린과 같이 군중에 있으면 견제를 당하고 의견이 틀려서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이것을 제지하면 화를 더 낼것이고 그대로 두면 한정이 없을 것이니 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을 면할 수 있겠는가?"
명군은 자국 영토에서의 전쟁을 피하려고 참전한 것이었지만 조선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침략국인 일본군 못지않게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이순신은 처음부터 진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접대를 극진히 했을 뿐 아니라 몇 차례 전투에서 거둔 전공을 진린에게 돌리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의 <행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1598년 7월 18일 일본 군선 백여 척이 녹도를 침범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진린과 이순신이 연합함대를 구성해 출동했다.
그 모습을 본 일본 군선 2척이 도주했다. 이때 녹도만호 송여종이 전선 8척을 동원해 적선 11척과 접전해 적선 6척을 모조리 포획하고 적의 머리 69급을 베어 용맹스럽게 귀환했다. 이 해전의 결과는 당일 고금도에 보고되었고 운주당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었던 통제사와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도 보고되었다.
소식을 들은 진린은 명나라 수군이 활약하지 못한 것에 격분해 술잔을 내던졌다. 통제사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지린과 계금에게 각각 40급과 5급의 수급을 취하게 하여 이들을 달랬다.
1598년 9월 중순경 조·명 연합군은 수륙합동작전을 계획했으나 유정은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유정의 태도에 화가 난 진린이 이순신과 함께 수군 단독작전에 나선 것은 이순신 때문이었다.
"이모(이순신)는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다시 세운 공이 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일본군이 철군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유훈을 받은 일본군부는 조선에서의 철군을 결정하고 출병해 있던 장수들에게 '화의(和義)'를 성립시키고 11월 중순까지 귀국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이에 따라 순천 예교성에 주둔해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10월 중순부터 유정 측과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고니시 유키나가와 유정 간의 강화 협상에 제동을 건 것은 진린과 이순신의 조·명 연합함대였다. 철군 기한인 11월 중순이 다가오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11월 13일 10여 척의 선발대를 부산 쪽으로 출발시켰으나 연합함대에게 격퇴되어 예교성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과 남해 등지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소식은 곧 연합함대에게 알려졌고 두 장수는 함대를 노량해협 근처로 옮겨 구원군을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조·명 연합함대와 일본 함대간의 노량해전 시작
▲ 노량해전지도로 지인인 박근세씨가 보내왔다 |
ⓒ 박근세 |
한편, 연합함대는 노량 해협 좌측에 포진한 진린 휘하의 300여 척과 우측 관음포에 주둔한 이순신 함대의 80척이었다. 19일 새벽 2시, 양측 함대가 노량 해협에서 정면으로 맞섰다. 북서풍이 부는 가운데 바람부는 쪽 풍상에 있던 연합함대가 화공을 펼치자 풍하에 있던 일본 함대는 절대적으로 불리해졌다.
연합함대의 화공에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퇴로를 찾아 관음포쪽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관음포는 막다른 골목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일본군은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치열한 혼전이 벌어진 가운데 진린의 배가 포위당해 위험에 처했을 때 이순신이 구해줬고, 이순신의 배가 포위당해 위험에 빠졌을 때 진린이 구원했다.
▲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벌어진 전투를 그린 노량해전도. 지인인 박근세씨가 보내왔다 . |
ⓒ 박근세 |
▲ 남해 이락사 가는 길에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비가 보인다. '이락사'는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셨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
ⓒ 오문수 |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戦方急 慎勿言我死)
이순신의 순직과 더불어 7년간의 전쟁도 끝났다. 아울러 힘없는 백성들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던 큰 별도 떠나갔다.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첫날 방문한 곳은 남해 충렬사다. 충렬사에 들러 이순신 가묘에 헌화한 기사를 보고 지인의 문자가 왔다. "시신은 있어요?" 순간 "누군가 퍼뜨린 가짜 글을 보고 현혹되어 아직도 저런 문자를 보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답사기를 끝내며 '이순신 자살설과 은둔설'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다.
이순신 자살설과 은둔설... 존경받는 어른을 시기하는 세태가 안타까워
"이때에 순신의 위명이 날로 성하여 사람들이 해중왕(海中王)이라고 칭하매 순신이 불측의 화가 있을 것을 짐작하고 드디어 투구를 벗어 제치고 선등하여 스스로 철환에 맞아 죽었다 하더라."
선조의 시기가 두려워 투구를 벗고 스스로 적의 총탄을 맞았다는 기록이 말이 되는가? 은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순신에게는 소실이 있었고 소생으로 2남2녀가 있었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로 가장하고 소실 집에서 보내다가 실제로 죽어서 장례를 지냈다고 했다.
▲ 율리안나호 조원옥 선장이 이순신 장군의 가묘 앞에서 고유문을 낭독한 후 절하고 있다. |
ⓒ 오문수 |
<은봉야사별록> 노량기사, <호남지> 이통제유사 기록에는 "송희립이 주사(舟師)를 대신하여 대첩을 이루고 뒤에 수사가 되었다. 그의 자 회가 옆에 있었는데 곡을 하려는 것을 송희립이 입을 덮어 곡을 못하도록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함께 일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며 세 번이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배에 몸을 던지며 대성통곡을 했고 명군 또한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요즈음 세상을 보면 존경할 어른이 없는 세태다. 세종대왕,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같은 존경받는 사람이 없다. 아니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잘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헐뜯어 끌어내리려고 한다. 어려운 때에는 온 국민이 존경할 만한 어른이 필요하다. 동일시 대상이 필요하다.
온 국민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큰 별이 그립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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