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시각각] 정부에 ‘오지라퍼’ 좀 있으면 어때서
지난주 한국은행의 공식 보고서에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직접 나서 공개 반박했다. 정책 충돌이나 혼선으로 비칠까 봐 정부 내 이견 노출을 꺼리는 게 보통인데 참 이례적인 장면이다.
한은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식료품·의류·주거 같은 의식주 비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보다 비싼 반면, 전기·도시가스와 대중교통 등 공공요금은 싸다. 2023년 기준으로 식료품은 OECD 평균의 1.5배 이상인데, 공공요금은 0.7배 수준이다. 과일 등 농산물은 생산성과 개방도가 낮고 유통구조가 비효율적이어서, 의류는 브랜드 선호에 따른 고비용 유통구조 탓에 비싸다고 한은은 점잖게 분석했다. 하지만 행간을 읽어 보면 농민과 농업 보호에 주력해 온 농정, 명품을 너무 사랑하는 소비자를 향한 소리 없는 비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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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책 공론장 만든 한은·금감원
‘시끄러운 토론’ 피할 이유 없어
단, 용산은 논쟁 대신 교통정리를
」
우리 농업의 생산성은 OECD 하위권(27위)이다. 한국 소비자의 1인당 명품 구매액(2022년)은 325달러로 미국(280달러)과 중국(55달러)을 뛰어넘는 세계 1위다. 고급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낮다. 즉, 비싸도 꾸준히 산다. 그러니 일부 해외 브랜드는 국내 가격을 더 높게 책정하곤 한다. 농산물 개방으로 경쟁 압력을 높이고 소비자는 좀 합리적 구매를 했으면 하는 한은의 바람이 담겨 있다고 본다.
송미령 농림부 장관은 ‘농업 분야의 특수성’을 거론하며 반박했다. 물가 수준 통계와 개방도 산정 방식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주장이다. 과일 등 농산물 수입처 확대가 힘든 데 대해 농림부는 검역의 문제라고 시종일관 설명한다. 상호주의에 따라 충분한 과학적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농림부가 경제부처보다 농촌과 지역사회를 보듬는 사회부처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는 추세임은 알지만, 생산자 못지않게 소비자도 챙겨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한은은 지난 3월 돌봄 서비스 보고서를 내면서 외국인 노동자 활용과 최저임금 차등 적용의 필요성을 담았다. 노동계가 “반인권적 발상”이라며 반발했고, 한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여기저기서 논쟁을 야기하는 한은을 ‘오지라퍼’라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개의치 않는다. 그는 최근 창립 74주년 기념사에서 “법적 권한이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한국은행이 더 중립적으로 분석하고 장기적 시각에서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총재의 취임 당시 포부처럼 한국은행이 ‘한은사(寺)’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한은’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거들었다 재계가 반발하자 배임죄 폐지가 필요하다는 의견까지 내놓아 ‘오지라퍼’ 소리를 들었다. 상법이나 형법 개정은 법무부 장관의 일이다. 증시 밸류업 프로그램 등 경제를 총괄하는 경제부총리도 있다. 금감원장 소관 업무가 아닌 건 분명하지만 그의 발언이 공론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꼭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이재용 삼성 회장을 비롯해 검사 시절 기업인을 배임죄로 많이 기소했던 그가 “삼라만상을 모두 처벌 대상으로 삼는 배임죄는 폐지하는 게 낫다”고 하니까 귀에 쏙 들어왔다. 직접 해 보니 안 되겠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얼마 전 대통령실의 세금 언급은 문제가 좀 있다. 성태윤 정책실장은 종부세 사실상 폐지, 상속세율 30%까지 인하를 구체적으로 밝혔다가 나중에 “검토하는 여러 대안 중 하나”라고 톤다운했다. 야당의 감세 드라이브에 대한 정부 차원의 맞불 전략일 수는 있지만 적절하지 않다. 대통령실은 한은이나 금감원장처럼 부처 칸막이를 넘어 논쟁을 촉발하는 역할이 아니라 정부 내 논란을 최종적으로 책임 있게 교통정리하는 자리다. 정책실장이 구체적인 세율 수치까지 발표하면 지금 한창 세법 개정안을 만들고 있는 기획재정부는 뭐가 되는가. 성공한 장관이 많이 나오도록 대통령실이 힘을 실어주는 게 결국 윤석열 정부가 성공하는 길이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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