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그 얼굴만 보면 키가 하늘에 닿을 듯

2024. 6. 25.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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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시인·목사

수레국화가 만발해 우리 집 정원은 파란 꽃 물결로 넘실거린다. 바큇살처럼 생긴 방사형의 파란 색 꽃 모양에 반해 옆 지기가 심어 키운 수레국화. 밀원을 많이 품고 있는지 꿀벌들도 윙윙거리며 모여들어 저절로 수레국화에 자주 눈길이 간다.

더위가 한풀 꺾인 해 질 녘 군락을 이룬 수레국화가 키가 너무 자라서 비바람이라도 불면 넘어질 것 같다며 그녀는 말뚝을 돌아가며 박고 끈으로 묶어주었다. 평상에 앉아 수레국화를 비롯한 정원의 꽃들을 돌보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식물의 맑은 기운이 서려 있고, 얼굴에 꽃도 피어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막스 피카르의 『사람의 얼굴』에 나오는 아름다운 문장이 떠올랐다.

「 정신 줏대 살아있는 얼의 골짜기
얼굴엔 욕망과 희로애락 드러나
내면 아름다워야 맑은 기운 서려

김지윤 기자

“여인의 얼굴이 있다. 지구가 그 얼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그러자 그 얼굴 속에 꽃들이 남아 있다. 그런 얼굴은 꽃시계와 같다. 시간마다 다른 꽃이 핀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 표정은 꽃시계와 같은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없이 바뀐다. 무릇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내면이 투영된 거울. 사람의 얼굴은 감추어진 내면의 욕망, 파도치는 내면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드러낸다. 가식으로 표정을 지어 상대를 속이려 해도 결코 오래가지 않는 법. 사랑과 미움의 감정, 불꽃처럼 타오르는 열망과 재처럼 식어버린 냉담 또한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고 만다.

꽤 여러 해 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마임 배우 유진규를 만난 적이 있다. 다양한 얼굴을 연기하는 재능을 갖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오직 얼굴과 몸으로만 연기할 수 있는 마임 배우. 내가 참여한 지역의 시 낭송 모임에 유진규도 찬조 출연을 했는데,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평소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선생은 다면의 얼굴을 연기할 수 있는 마임 배우인데, 개인적으로 감정이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도 원하는 얼굴 표정을 연기할 수 있나요?”

“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마음을 비우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표정을 연기하면, 몸의 어떤 부분인가가 그 거짓 표정을 드러내지요.”

“아하, 속일 수 없다는 것이군요?”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는 못 속여요. 몸은 우리 마음보다 현명하거든요.”

현명한 바디(body). 현명하고 정직한 거울인 바디는 결코 거짓을 연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 바울로는 사람의 몸을 ‘신령이 거하는 장소’라 했고, 도인 유영모는 인간의 얼굴을 ‘얼의 골짜기’라고 했던 것일까. 얼의 골짜기! 얼마나 의미심장한 표현인가. 얼이 모인 얼굴은, 정신의 줏대가 살아 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아무리 화장발로 얼굴을 아름답게 꾸며도, 그 내면이 더럽고 추악하다면 그 얼의 골짜기에는 악취만 진동할 것이다. 아무리 못 생기고 주름투성이 얼굴일지라도 그 내면이 아름다우면 그 얼의 골짜기에는 그윽한 향기가 풍길 것이다.

“눈썹과 이마 사이에 은연중 맑고 잔잔한 물과 먼 산의 기운을 띠고 있으면, 바야흐로 더불어 고아한 운치(韻致)를 말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 선비인 이덕무의 말. 그가 말한 ‘눈썹과 이마 사이’는 사람의 얼굴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이는데, 그 사람의 얼굴에 맑고 잔잔한 물과 먼 산의 기운을 띠고 있으면 ‘운치’, 즉 고상하고 우아한 멋을 나눌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얼굴을 지닌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절로 시흥(詩興)이 솟아나리라.

하지만 재물과 이욕, 명예와 아집에만 사로잡힌 얼굴에는 고아한 운치를 나눌 만한 기운이 서릴 리 만무하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가꾸기에 혈안이 된 사람, 또 그런 외화내빈(外華內貧)의 모습에 이끌려 자기 영혼을 팔고 살아가는 이의 얼굴에 이런 기운이 서릴 리 만무하다.

하늘의 명을 오롯이 받들어 살려고 애썼던 함석헌은 ‘얼굴’이란 시에서 “무엇하러 왔나? 얼굴 하나 보러 왔지”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그 얼굴만 보면 키가 하늘에 닿을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아진다고. 하지만 함석헌도 그토록 애타게 보고 싶은 얼굴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신적인 겸허와 품위가 함께 깃들인 그런 얼굴을! 시의 결구를 보면 그런 안타까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저 마주 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고진하 시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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