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모델 입문 후 횡단보도 걷는 것도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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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 기자]
"뇌졸중 같은 흔적도 없고, 혈관 두께도 다 정상입니다."
지난 4월 말, 신경과 의사가 나를 보며 뇌 MRI 영상을 판독해 설명해 주었다. 다 괜찮다니 안도하며 병원을 나섰다.
작년부터 걷다가 서너 번 고꾸라지듯 넘어지거나, 버스에 오르다 다리 힘이 풀려 맥없이 주저앉곤 했다. 심지어 멀쩡하던 걸음걸이조차 뒤뚱거려지니 놀랄 수밖에. 혈액검사 등 이런저런 검진으로는 이상 소견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택한 절차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 병은 아니었고, 근력이 떨어져 있어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었다.
▲ 인천고령사회대응센터의 시니어모델 입문과정 모집 공고 |
ⓒ 김유경 |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며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지자체가 무료로 실시하는 과정이라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그렇게 지난 5월 3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주 2번 총 6시간, 13번을 만났다. 5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시니어 중심 25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함께 시작했지만 마지막에 런웨이를 걸은 건 19명뿐이었다.
워킹 연습, 프로필 촬영... 잘 걸으려다가 왼발에 염증까지
모델의 기본은 워킹에 있단다. 소위 '모델 워킹'은 곧은 일자 워킹이다. 몸의 중심이 잡혀야 가능하다. 나는 모두 함께하는 연습실에서 넘어질 듯 삐뚤빼뚤 걸었다. 볼썽사나울 건 처음부터 각오했지만, 보폭까지 넓혀야 하니 난제였다.
몸과 마음이 하나이고자 애쓰다가 왼발 힘줄에 염증이 생겨 몇 주간 정형외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비바람이 치던 지난 5월 11일, 집에서 10여 분 거리 병원까지 발을 내디딜 때마다 강한 통증이 쓰나미가 되어 나를 뒤흔들었다.
물리치료 후 돌아오는 길에는 아예 우산을 접었다. 그리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일자 워킹을 시도했다. 남이야 보든 말든 나는 절룩거리지 않고 걷고 싶었다. 그렇게 2주가 지나자, 통증이 왼발에서 오른발로 옮겨지더니 점차 몸의 균형이 잡혀갔다.
정형외과 원장님은 조심하라면서도 하이힐을 신고 모델 워킹을 하겠다는 나를 응원했다. 그 통과의례를 거치며, 모델 워킹 연습이 근골격에 선한 영향력을 끼침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파란 신호등이 켜진 도로선을 모델 워킹으로 밟으며 건너간다.
▲ 지난 5월 24일 프로필 촬영 당시 사진(보정 없음) |
ⓒ 김유경 |
디자이너 의상을 홍보하는 모델에게는 연기력 또한 필수다. 디자이너의 의도를 헤아려 의상의 매력을 드러내야 한다. 의상과 하나 된 연출이 관객에게 호감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매사 논리를 앞세우는 나는 그렇게 감성적으로 어필해야 하는 현장과의 유연한 조화가 부족했다. 시니어모델의 아름다움은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으로 다져진 내공이 연륜 쌓인 외면으로 자연스레 스며 나오는 것일 터, 나는 갈 길이 멀구나 싶었다.
한편, 강사가 제시한 콘티를 놓고 이해한 바가 달라서 참가자들 사이 여러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런웨이는 저마다의 기량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팀워크가 융합돼야 성공할 수 있다. 배려와 겸허한 태도, 순발력 등 인성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다.
키 차이도 다르겠으나 이제까지 살아온 성품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콘티에 맞게 자비 의상을 준비할 때의 마음가짐과 구매력 등 참가자들은 모두 '다름 투성이'다. 서로의 다름에 담담하려면 마음의 빗장을 풀고 있어야 한다.
드디어 런웨이에 서다
지난 14일 인천시청 중앙홀에서 수료 기념 패션쇼, '다시, 설레임'이 개최됐다. 이날 새벽 5시부터 헤어 메이크업이 시작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인천시청 본관 로비에서 리허설을 2번 했다. 나는 잠깐 딴생각에 빠져 순서를 놓치기도 하고, 화장실을 지나쳐 가다 뒤에 오던 동기가 일깨워 줘 돌아서기도 했다.
청심환을 챙겨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대 의상을 세 번 갈아입어야 하는 어둡고 비좁은 공간은 느긋한 마음을 자꾸 밀어냈다. '써니' 복장을 위해 목에 장미 코르사주를 둘렀는데, 나중에 그 매듭이 풀리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다.
▲ 우아하고 아름다운 드레스 탑 포즈. 지인들이 보내준 사진. |
ⓒ 김유경 |
돌아보니 이날 나는 비록 순서는 틀리지 않았지만, 팀원과 열을 맞추거나 관객을 향한 시선 처리는 미흡했다. 특히 드레스 워킹 중에 떨어진 귀걸이를 찾아 움켜쥐었다. 걷는 도중은 아니었고 출발점에서 대기 중이었지만, 옥에 티가 될 손동작 실수를 보이고 말았다.
초대장을 받고 온 지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아예 에어컨 설치를 빼 버린 내 결정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듯, 반응도 그랬다. '잘 어울린다'와 '용기 있다'가 그것. 나의 어떤 측면을 많이 보았는가에 따라 갈린 거다.
▲ 패션쇼를 마치고(오른쪽에서 6번째가 필자) |
ⓒ 김유경 |
수료식 이후 나 또한 자문한다. 진정 시니어모델이 되고픈가. 나는 몸치에다가 연기력도 꽝이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보다는 혼자 있는 게 좋다. 나보다 남을 더 의식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라서 별로 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델 워킹은 좋아한다.
100세 시대에 필요한 건 돈과 건강과 할 일이다. 요즘 내게 급선무는 '건강'이다. 근력을 키워 일상을 꿋꿋하게 이어가기다.
과거 약했던 근력은 모델 워킹을 익히며 확실히 좋아졌다. 이젠 한 발로 서서도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오후가 되면 무겁던 다리가 차츰 가벼워졌고, 엉덩이가 무거워 잘 달릴 수 없었던 것도 개선됐다고 느낀다.
앞으로 시니어모델로서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모델 워킹을 하며 배운 장점들은 고스란히 내 곁에 머물 수 있다. 내 삶의 런웨이는 일상에서 계속되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대만족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브런치에도 게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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