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고립된 학생들의 1박 2일, 기이한 청춘 영화
[김상목 기자]
소마이 신지 감독의 1985년 영화 <태풍 클럽>이 거의 40년 만에 극장에 걸린다. 그것도 첫 개봉일 만큼 국내에선 소수 열혈 팬 외에는 실체를 접한 이가 드물다. 하지만 현대 일본영화의 계보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기에 궁금해하던 이들도 제법 될 테다. 이제 확인할 기회가 도래했다. 조금 일찍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과연 어떤 영화일까? 궁금증이 풀렸다. 이런 영화였구나! 세월의 흐름이 한때 혁신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것들을 그저 과거형으로 탈바꿈해버리는 걸 숱하게 목격했기에 이 영화 또한 그렇게 '신화'가 된 것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결론은 '아니올씨다'였다. 기이한 체험이었다.
▲ "태풍 클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엠엔엠인터내셔널㈜ |
영화의 배경은 일본 내에서도 산골로 통하는 나가노 현의 한적한 시골 마을과 그곳에 자리한 중학교다. 정확하게 요일과 시각을 명시해 4박 5일 동안 이야기는 진행된다. 목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대부분의 이야기는 학교 내에서, 그리고 작은 갈래로 물줄기가 나뉜 것처럼 도쿄를 무대로 한 작은 에피소드가 갈라졌다 합쳐진다.
남녀공학 중학교 교실은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은 급격하게 성장하는 중이고, 성적으로 조숙하거나 어른들의 시선으로 보기엔 일탈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쉽게 눈에 띈다. 어른들은 대부분 그리 미덥지 못하다. 부모는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술에 절어 있고, 교사 역시 학생들이 존경하며 따를 인격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목요일 밤 몰래 야간에 출입이 금지된 수영장에서 물장난하며 논다. 그러다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수습하느라 첫날이 흘러간다.
다음날 수학교사 우메미야 선생이 수업 중인 교실에 평소 교제하던 여성의 친지들이 들이닥쳐 난장판이 벌어지고, 태풍이 다가온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아이들은 악의는 없지만, 치명적인 장난을 서로 저지르기도 하고, 마음을 몰라주는 급우에게 야속함을 표하기도, 자기들만의 비밀 만남을 이어가기도 한다. 뭔가 수면 아래에선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일어나려는 기운이 감돈다. 태풍이 다가온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것일까? 아니면 태풍은 그저 중3 학생들이 품고 있던 억압에 대한 반항심과 욕망을 표출할 구실이 되는 걸까? 불길한 기운은 삽시간에 퍼져간다.
토요일, 아이들은 부활동에 여념이 없지만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단순한 장마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교사들은 얼른 귀가하라 지시한 뒤 대충 문단속하고 건물 출입구를 잠근 뒤 나가버린다. 하지만 건물 내에는 6명의 학생이 각자의 이유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꼼짝없이 태풍이 몰아치는 교정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한편 6명 아이들 중 공부 잘하는 모범생 미카미 쿄이치의 절친이자 친구 이상의 마음을 품고 있던 리에는 갑자기 등교하던 중 사라져 가출한 상태다. 학교와 부모들은 리에의 행방을 수소문하지만 찾지 못한 상황이다. 실은 리에는 도쿄로 갔다. 그렇게 일군의 청소년들은 고립 상황에서 그동안 그들 속에 내재되어 있던 욕망을 분출시키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춤을 추는 저 유명한 스틸 이미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태풍으로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누구도 그들이 학교에 남아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알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렇게 단순한 일탈과 반항을 넘어서는 그들만의 주말이 계속된다.
▲ "태풍 클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엠엔엠인터내셔널㈜ |
<태풍 클럽>은 활자로 설명하기 힘든 영화다. 억지로 풀어내자면 악천후로 고립된 덕분에 어른과 사회의 속박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10대 청소년들의 기묘한 '해방구'가 형성되었다 소멸하는 설정이다. 굳이 압축하면 1박2일에 불과한 짧은 시공간의 은밀한 기억이다. 이것을 고스란히 푹 떠내어 보존한 것만 같은 그런 이야기다. 이걸 어떻게 3자가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연유로 영화를 '체험'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
영화 속에 담긴 시기는 1980년대의 일본이다. 고도성장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명확하고, 한창 번영을 구가하는 대도시를 동경하면서도 마땅히 꿈을 이룰 방도는 찾지 못하는 아이들의 불만이 팽배한 나가노 현 시골이다. 아이들은 숟가락을 노려보며 소원과 욕구를 표출한다. 무슨 주술이라도 하는 걸까? 옆 나라인 한국에서도 동시대 화제가 되었던, 숟가락 구부리는 초능력자 유리 겔라 열풍이 일본에서 대단했던 것의 반영이다.
조금만 비판적으로 따져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도 물질적 풍요로는 채워지지 않던 공허함을 느끼던 사람들은 앞다퉈 그렇게 흥미 위주로 잔뜩 부풀려놓은 미디어에 자발적으로 빠져들던 시절이다. 리에는 그런 도쿄를 동경해 등교하다 말고 무작정 대도시로 향하지만, 그곳의 외적 풍요와 그 이면의 차가움은 낯선 외계와 다름없다. 좋아하지만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절친 쿄이치 군은 공부를 잘하고 집도 유복하니 도쿄로 고교 진학을 할 테지만, 자신은 이 시골에서 뻔한 인생을 살 것이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리에를 감싸고 있다.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고 성적 일탈에 호기심을 보인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엔 너도나도 그랬다. 다만 금기시하며 은밀하게 취급했을 뿐이다. 40년 전에 완성된 이 영화는 그런 동병상련의 비밀 공감대를 수면 위로 태풍의 기운처럼 뿜어내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고립된 교정에서 그들만의 축제가 시작되자 그 기세는 통제할 수 없이 폭주하게 될 수밖에 없다. 동시대 한국의 청춘 세대는 군사독재와 그에 통제되는 억압적 사회 분위기 탓에 절대 불가능했던 면모다. 1968년을 전후한 전공투와 안보투쟁을 겪었고, 경제적 풍요와 함께 찾아온 다양한 문화적 시도가 축적된 바탕 아래 그저 경제호황으로 다들 흥청망청하며 안정된 사회를 살아가는 듯하던 당대 일본의 억눌린 기운이 10대 특유의 반항심과 접속해 휘몰아치는 주말, 그리고 태풍이 지나가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활짝 갠 날씨, 하지만 분명 그 안에 꿈틀대는 어떤 출구를 찾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영화는 그 시절에만 탄생 가능한 존재일 테다.
어른들은 <태풍 클럽>에서 철저히 객체 혹은 주인공들을 억누르는 반동적 인물/시스템에 그친다. 우리가 학원 청춘물에서 종종 기대하는, 인생의 조언자이자 스승으로 제 역할을 소화하는 이는 잠깐 등장하는 양호교사 정도에 불과하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수학교사 우메미야는 둘째 날에 일어난 소동 때문에 존경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등생이지만 고집이 세고 도덕적 결벽이 강한 미치코는 그런 우메미야의 수업을 들을 수 없다며 거세게 항의하지만, 해명을 수업 마치고 하겠다던 교사는 금방 이를 까먹고 만다. 홀로 교실에서 태풍이 다가오는 가운데 우메미야 선생을 기다리던 미치코는 고립된 가운데 모종의 위기에 처하고 만다. 아이들은 건물에 고립된 상태에서 담임인 우메미야에게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하지만, 이미 술에 취한 교사는 아이들을 구조할 경황이 없다.
그동안 내내 모범생 캐릭터를 굳혀가던 쿄이치는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을 쏟아내듯 우메미야에게 선언문을 낭독하듯 그를 규탄한다. 그리고 처음엔 한심한 듯 지켜보던 다른 5명에게 가세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해온 철학적 실존에 대해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그런 와중에 홀로 떨어져 도쿄를 방황하던 리에 역시 태풍으로 발이 묶인 채 온갖 기묘한 체험을 겪는다. 악천후에 휩싸인 도쿄는 우리가 아는 화려한 대도시의 야경이 아니라 초현실적 시공간으로 그려진다.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무정하고 차갑지만 기이한 것들로 가득한 그런 곳이다. 리에는 끝내 도쿄에 대해 이해하거나 매력을 느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사실 아이들이 동경하던 도쿄는 허상에 가깝다. 리에가 목격한 신기루 같고 위험천만한 풍경이 본질에 가까울지 모를 일이다.
▲ "태풍 클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엠엔엠인터내셔널㈜ |
40년이 다 되어 지각 도착한 영화는 그 사연 많은 상륙 과정에 걸맞게 놀라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체감한 것들을 활자로 '형언'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노릇이다. 이미지를 언어로 전환하는 영화 문법과 이를 필사적으로 텍스트로 풀려는 과정 사이의 간극이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하게 '통곡의 벽'처럼 작동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구구절절 설명을 붙이고 극중 누가 이랬다 저랬다 언급하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태풍 클럽>을 보기 전인 예비관객들에겐 망설이지 말고 얼른 경험해보시라 권하면 족할 일이다. 그래도 노파심에서 몇 줄만 더 첨부하면 대강 이렇다.
① 40년 전 구닥다리 일본 청춘물은 그저 일본영화 역사 한 구석에 기록된 화석 같은 것 아니냐?
⇒ 어떤 영화는 시공간을 초월해 특정한 시기, 특정한 체험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데 <태풍 클럽>이 바로 그런 영화다.
②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과거 세대 이야기를 지금 한국 관객이 과연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까?
⇒ 앞서 몇 차례 언급한 것처럼, 한국과 일본은 서로 앙금이 가득하지만, 역설적으로 서로 떼어내기 힘들 만큼 뒤엉켜 있기도 하다.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들, 특히 개선해야 할 문제들의 상당수가 일제강점기의 강제로 떠안은 유산이기에 시대를 초월해 익숙한 풍경으로 가득하니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다.
③ 10대 청소년들의 고삐 풀린 일탈을 보는 데 거부감이 들 수 있지 않을까?
⇒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다. 즉 실제 영화 속 주인공들과 동년배들이 아슬아슬하게 못 볼 수도 있다. 자극적이고 당황스러운 순간이 제법 있고 그 때문에 관념과 세태의 변화 영향이 없지는 않지만, 영화 속 선정적/폭력적 묘사는 모두 꼭 필요해서, 그리고 다양한 상징과 의미로 유추 가능한 '예술적 표현'의 영역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1980년대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더 높거나, 관객이 개별적으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냈거나, 영화 속 시골 학교와 유사한 분위기를 체험했다면 좀 더 민감하게 <태풍 클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체감할 수 있겠지만, 크게 중요하진 않아 보인다. 워낙 40년 전 일본 시골 중학교 청춘들이 겪던 문제와 같은 시기에 한국의 청춘들이 고뇌하던 문제는 큰 궤에서 별로 다를 바가 없고, 지금의 청소년들 역시 근본적으로 영화 속 그들이 처했던 상황과 동일선에 서 있기 때문일 테다.
겉으로는 풍요의 시대라지만 그 안에 곪아 있던 그저 안 보이게 봉합된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계에 곧이곧대로 순응하지 않겠다는 청년세대의 저항이 순수한 형태와 기운으로 이 영화 전체에 넘실대고 있다. 참으로 기이한 청춘 영화이자 어떤 궁극의 결정체를 목격하고 말았다. 아마 오랫동안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은 유령처럼 출몰할 것 같다. 시간의 풍화를 견디고 마침내 도착한 영화를 체험하고 나면 필자의 장광설이 솔직한 경탄에서 비롯된 점만은 공감하리라 확신한다.
마침내 수많은 현대 일본영화의 거장들이 이 영화가 있었기에 자신들이 존재한다며 상찬을 퍼붓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글자로는 불가능하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만 접근 가능한 '현대영화'의 모든 게 <태풍 클럽>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과장 좀 보태자면 1960년대에 <네멋대로 해라>가 프랑스에서 등장한 것에 비길 정도다. 그저 경이로운 영화를 목격하는 행운을 며칠 먼저 누린 이의 호들갑으로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작품정보>
태풍클럽 Taifu Club
台風クラブ
1985│일본│드라마, 로맨스
2024.06.26. 개봉│114분│15세 관람가
감독 소마이 신지
주연 미카미 유이치(미카미 쿄이치 역), 쿠도 유키(타카미 리에 역),
미우라 토모카즈(우메미야 선생 역)
출연 베니바야시 시게루(시미즈 켄 역), 다테 사부로(오카베 역),
이시이 토미코(야기사와 카츠에 역), 코바야시 카오리(야기사와 준코 역),
마츠나가 토시유키(야마다 아키라 역), 오미 토시노리(코바야시 역),
오니시 유카(오마치 미치코 역), 사토 마코토(히데오 역),
테라다 미노리(시미즈 류조 역), 후치자키 유리코(모리사키 미도리 역)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1985 59회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일본 영화 베스트 4위,
1980년대 일본 영화 베스트 10 6위,
올타임 일본 영화 베스트 10 공동 10위
1985 1회 도쿄국제영화제 영 시네마 컴퍼티션 '도쿄 그랑프리'
1985 10회 호치영화상 남우조연상(미우라 토모카즈)
1986 7회 요코하마영화제 감독상, 남우조연상(미우라 토모카즈), 신인여우상(오니시 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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