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극장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성하훈 2024. 6. 2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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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애관극장 역사 가치 강조한 <영화 도시 인천과 극장의 역사>

[성하훈 기자]

  
 윤기형 감독 저서 <영화 도시 인천과 극장의 역사>
ⓒ 도서출판동연
 
활동사진으로 불린 영화가 조선에 들어온 후 첫 극장이 생긴 곳은 인천이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이후 1892년 최초의 극장인 '인부좌'가 생겨난 것이었다. 개항지에서 생겨난 극장은 주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다가 1895년 조선인 최초의 극장이 세워졌으니 이름하여 '협률사'였다.

1902년 서울에서 개관했던 원각사(개관 당시 이름은 협률사), 1903년 극장이 생긴 부산의 '행좌', 1907년 서울 종로의 조선인 극장 단성사, 1916년 세워진 광주좌(광주극장) 등과 비교하면 인천의 극장은 다른 도시들에 앞서 있었다.

조선의 극장 문화를 선도했던 인천 '협률사'는 1911년에는 축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21년 다시 '애관'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 극장은 현재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129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무수히 많은 극장이 명멸한 가운데 극장 역사의 자부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윤기형 감독의 저서 <영화 도시 인천과 극장의 역사>는 제목처럼 조선 최초의 영화 도시였던 인천의 극장사를 담아내고 있다. 그렇다고 극장만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극장의 역사 안에 인천의 다양한 영화사가 얽혀 있다. 극장을 중심에 둔 인천영화사인 것이다.

인천 영화제작사 대표의 아들, 배우 최불암

책에는 인천을 거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최불암 배우가 대표적이다. 부친인 최철은 1935년 설립된 건설영화사의 대표였다. 영화사 창립작품으로 <무영의 악마>를 제작했고, 1947년에는 흑백 35mm 영화 <수우>를 제작했다. 현재 인성초등학교 자리인 최철의 집을 세트장으로 활용했다. 안종화 감독이 연출했고, 복혜숙, 전택이, 신카나리아 배우 등이 출연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수우> 개봉을 준비하던 도중 서울에 갔던 최철이 갑자기 별세하게 된다. 이후 모친인 이명숙 여사가 동방극장 지하에 다방을 차렸고, 최불암 배우는 어머니 덕분에 동방극장을 드나들며 영화를 보게 된다. 대배우로 성장하게 만든 바탕엔 극장이 자리한 것이다. 모친이 운영했던 다방은 인천 문인들과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신극 배우 복혜숙과 춘사 나운규 선생이 사랑했던 인천 최고 명기 오향선(유신방)은 인천의 기생조합인 용동권번 소속이기도 했다. 당시 기생은 연예인이면서 예술인이었고 신여성이었다.

1922년 스타가 된 복혜숙은 1920년대 말 일금 800원을 받고 인천 용동권번으로 화적을 옮겼고, 오향선은 나운규의 눈에 띄어 유신방이라는 예명으로 1928년 인천 애관에서 개봉한 영화 <사나이>에 출연했다. 이후 나운규의 작품에 계속 출연했으나, 나운규가 영화에 쏟을 열정과 시간을 유신방에 쏟아부으면서 '조선 영화계의 요부'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애관극장에 대한 애정
 
 조선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
ⓒ 애관극장 제공
 
<영화 도시 인천과 극장의 역사>에 따르면 조선 최초의 영화도시였던 인천에 꽤 많은 극장이 존재했다. 대형 멀티플렉스를 제외하고 64개의 단관극장이 있었다. 번창하던 인천 극장사의 쇠락에는 대기업 상영관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1999년 12월 두 번째 멀티플렉스로 개관한 CGV인천14는 단관극장의 시대를 저물게 만든다. 인천 지역 극장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극장은 애관극장과 부평의 대한극장, 폐관됐다가 다시 같은 이름으로 다시 생겨난 동인천 미림극장 등에 불과하다.

저자는 인천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지거나, 현재 남아 있는 모든 극장을 기술하고 있다. 극장이 있던 곳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쓴 발품의 기록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옛 자료를 뒤적여 하나하나 확인했고 직접 극장이 있던 자리를 찾아가 시대의 변천 속에 극장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냈다. 극장에 대한 개인의 잊지 못할 추억을 함께 기록했기에 인천 영화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무엇보다 책에서 강조되는 건 조선 최초 극장으로 가장 오래 역사를 유지하고 있는 애관극장에 대한 사랑이다. 영화도시 인천에 대한 자부심을 극장에 두고 있다. 애관극장을 강조하는 이유는 극장의 생존이 불확실해 지고 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 "한국 최초의 극장, 이렇게 소중한데 왜 보전 못하나").

인천영화사의 출발은 애관극장을 떼 놓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극장 건물에 100년 넘은 역사가 오롯이 간직돼 있다. 이는 단순히 인천만이 아닌 한국영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만큼 존재가치가 큰 극장이다. 개발 논리를 앞세워 허무는 데 집착하기보다 계속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고, 오래된 건물을 문화유산으로 유지하는 것은 후대의 사명이기도 하다.

저자가 <영화 도시 인천과 극장의 역사>에서 애관극장에 방점을 찍는 이유다. 비단 저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최불암 배우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많은 단관극장이 사라졌고, 여기에 129년의 역사를 이어온 애관극장마저 매각된다면 우리의 역사와 가치를 영영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애관극장은 인천의 문화적 자부심이자 원천 그리고 근대 문화사의 자존심"임을 강조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과 전노민 배우, 지상렬 개그맨 등도 오래된 극장이 갖는 가치의 중요성과 함께 반드시 유지해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애관극장 살리기에 적극적인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철거된 원주 아카데미 극장은 60년 넘은 유산을 없애버렸다는 점에서 논란이 분분했다. 애관극장은 원주의 길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최초의 극장으로서 상징성을 갖고 계속 보존될 것인가?

<영화 도시 인천과 극장의 역사>는 다양한 화보와 함께 역사적 유산의 중요성을 상기하게 한다. 저자인 윤기형 감독은 인천 출생으로 2011 다큐멘터리 〈고양이 춤〉을제작·연출했고 2021 애관극장에 대한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사랑한다>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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