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의 미래는 내다봤지만 가족의 미래는…[내 인생의 오브제]
막내딸 지은은 아버지를 이렇게 기록했다.
故 구자학 아워홈 회장. 삼성·LG그룹의 굵직한 계열사 대표를 두루 역임한, 그것도 30년 가까이 최고경영자를 지낸 그는 나이 70에서야 자신의 회사를 가진다. LG유통의 작은 사업부를 분사해서 만든 아워홈. 고작 2000억원 규모의 회사를 맡게 된 날.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내내 얼굴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워홈, 친근감 있잖아, 너무 좋아”라며 싱글벙글하던 구 회장이었다. 은퇴하면 양평에 작은 식당 하나 차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에게는 행운이었을 것이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자의 셋째 아들이자 구자경 명예회장의 동생인 구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둘째 딸인 이숙희 씨와 결혼한다. 이병철 회장이 사위를 참 많이 아꼈다. 한일은행 행원으로 첫 직장 경험을 한 그를 이병철 회장이 불렀다. 새로 시작한 언론 사업인 라디오서울과 동양TV 이사를 맡았다. 그리고 1973년 삼성이 호텔 사업에 진출하면서 호텔신라 사장에 취임했고 이듬해엔 중앙개발 사장을 함께 맡았다. 지금의 에버랜드가 그 언저리에 개장한다. 그러고는 1980년 본가로 돌아온다. 럭키(현 LG화학), 금성사(현 LG전자) 등 LG의 핵심 계열사를 진두지휘하다 고희(古稀)가 돼서 맡은 게 식품 사업하는 아워홈이다. 과거 30년간 일했던 회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조직이지만 신분 면에서는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그전까지는 월급 사장이었고 그때부터는 오너가 된 것.
그는 업의 본질을 꿰뚫었다. 핵심은 구매와 물류. 식품의 생명은 신선도. 거기서 품질과 가격이 결정되는데 그게 경영에서는 구매와 물류다. 사람의 몸에 비유하자면 동맥과 척추. 2004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컨설팅사에 근무했던 막내딸을 회사로 끌어들이면서 처음으로 맡긴 업무도 바로 구매와 물류였다.
오너 경영인이 된 그는 전국 각지의 현장부터 점검했다. 제조공장과 물류센터는 물론 연수원에 가서는 침대에 누워도 보고, 불쑥 화장실 들어가 샤워기도 틀어보고, 강당 의자를 바닥에 끌어 소음이 얼마나 심한지 체크도 했다. 그런 현장 경영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미래에 대한 준비였다. 매년 6월이면 일본 식품공업 박람회를 찾았다. 최신 설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봤다. 그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간부를 호텔 방으로 불렀다. 연구개발과 설비투자에 대한 회의를 직접 주재한 것이다. 감이 살아 있을 때 해야 한다며 한국 돌아가 하면 늦는다고 다그쳤다. 그렇게 해서 매출 2000억원짜리 회사를 10배로 키웠다.
그의 이런 경영 철학을 상징하는 유품이 하나 있다. 자이스란 독일의 광학 기업이 제조한 망원경을 유별나게 좋아했다. 구 회장 작고 후 1년이 지나 아워홈 마곡 본사에 추모 공간을 마련했는데 이곳에 전시돼 있다. 늘 멀리 미래를 보려고 했던 구자학 회장. ‘최초는 두렵지 않다’는 신조는 그렇게 탄생했다. 겁먹지 말고 남들보다 한 발짝 앞서가자는 그의 경영관을 담은 망원경.
그렇게 업의 미래는 꿰뚫은 그였지만 가장 잘 알 것 같은 가족의 미래는 보지 못했다. 아들 하나 딸 셋. 지분을 대강 4:2:2:2로 나눴다. 가족 간의 화합을 원했지만 결과는 지독한 남매간 다툼. 그것도 4차에 걸친 경영권 분쟁. 안타깝게도 구 회장이 20년을 넘게 가꿔온 가족회사는 이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를 운명에 처했다.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5호 (2024.06.26~2024.07.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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