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조국에서 비굴하지 않겠단 몸부림

김성호 2024. 6. 2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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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762] <정무문>

[김성호 기자]

나라가 쇠락하고 법과 문화가 짓밟히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이 오죽할까. 나라를 빼앗기고 외세의 강점을 당하였던 35년 동안의 고통을 기억한다. 세도정치와 외세의 침탈까지 조선말기의 참담함이란 또 어떠했는가. 그 치욕의 역사 가운데서 한국인에게 자긍심이라 할 것은 과연 있었을까 돌아본다.

청나라의 사정도 다르지가 않았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18세기 누렸던 세계 최강대국의 영광을 잃어버린 청나라다. 제국의 전성기로부터 채 100년이 되지 않았던 1840년,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다. 겨우 수만의 신식 군대에게 와르르 무너진 대제국의 군사력은 이후 수십 년 간 제국의 이권을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게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처음엔 영국과 프랑스였고 나중엔 서양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 그리고 마침내 일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가 중화의 중심을 군홧발로 디뎠다.

마침내 제국이 멸망을 코앞에 둔 1910년, 한 인물이 세상을 떠난다. 겨우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 뛰어난 무술로 일대의 종사라고까지 불렸던 무인 곽원갑이 바로 그다. 특히 그는 쇠락한 청나라의 자긍심을 지킨 무인으로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큰 틀에서 쿵푸라 불린 중국 무술이 서양의 복싱과 레슬링 등에 비해 허약하다는 비난을 적극 맞서온 것도 그와 관련이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 레슬러며 영국 복서 등과 설전이 오간 일화가 꽤 유명하기도 하다.
 
▲ 정무문 포스터
ⓒ 조이앤컨텐츠그룹
 
중국이 무인 곽원갑 거듭 되살리는 이유

특히 중화민국의 초대 설립자이며 지금까지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이 곽원갑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쑨원이 곽원갑을 후원해 정무체육회를 설립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체를 단련하는 젊은이들을 양성하고자 했을 정도다. 그러나 곽원갑은 정무체육회가 세워지고 불과 석 달 만에 급사했다. 그를 진료한 게 일본인 의사이고 평소 지병이 없다가 그의 진료를 받은 뒤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점은 곽원갑이 독살되었다는 의심이 널리 퍼진 계기가 됐다.

그 때문일까. 중국과 과거 홍콩 영화계에선 끊임없이 곽원갑을 내세운 작품을 찍어내왔다. 특히 이소룡으로부터 성룡과 이연걸, 견자단 등으로 이어지는 무술 중심의 액션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관련한 작품을 제 필모그래피에 새겨두려 하였다. 그 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이소룡의 <정무문>을 따를 영화는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해야 옳을 것이다. 그건 이소룡이란 배우의 특별함과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흔치 않은 기세, 그리고 낭만 때문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정무문>은 곽원갑이 세운 정무체육회를 떠올리게 하는 문파다. 영화의 시작은 곽원갑의 장례식이다. 곽원갑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건강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고, 제자들이 하나둘 그 장례식에 참석한다. 첸(이소룡 분)은 곽원갑이 각별히 아낀 제자로, 그 죽음을 유달리 애달파한다. 장례식에서 몸부림치며 관을 파헤치려하여 사형이 막대로 뒤통수를 갈겨 기절시켜야 했을 정도.
 
▲ 정무문 스틸컷
ⓒ 조이앤컨텐츠그룹
 
나약과 비굴의 사슬을 끊으려는 몸부림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무문에 곽원갑의 제자들이 두루 모인 자리가 열린다. 이 자리에 불청객들이 액자 하나를 들고서 찾아온다. 액자엔 '東亞病夫'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동아병부, 직역하자면 동아시아의 병자라는 뜻이다. 아편전쟁 뒤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된 청나라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상징하는 글귀를 불청객들이 곽원갑의 제단 앞에 전한다. 그들은 인근에 있는 일본 공수도 본거지인 홍구도장 제자들이다. 첸을 비롯한 정무문 제자들이 분개할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장 싸울 수도 없는 일이다. 곽원갑의 가르침이란 건강을 지키고 스스로를 단련하며 남과 싸우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래도 스승의 위패 앞에서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미 외세에 굴복한 청나라 공권력이 저들의 편을 들어줄 리도 만무하고 말이다. 정무문의 문을 닫지 않기 위해서라도 눈앞의 굴욕을 참는 것이 낫다고 수제자인 사형은 결정한다.

혈기 넘치는 첸은 이러한 결정이 참기 어렵다. 가뜩이나 기도류며 공수도, 검도 따위를 수련하는 홍구도장 제자들이 저들을 수시로 모욕해오지 않았던가. 마침내 첸은 몰래 쌍절곤과 동아병부 액자를 챙겨서는 홍구도장에 들어선다. 그리고 저 유명한 이소룡의 쌍절곤 액션신이 펼쳐지는 것이다. 홀로 도장을 완전히 박살내고 돌아온 첸, 그로부터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돌아간다.
 
▲ 정무문 스틸컷
ⓒ 조이앤컨텐츠그룹
 
죽음보다 삶이 낫다고 누가 말했는가

홍구도장 일본인 무인들이 정무문을 습격해 중국인 무인을 학살하는 장면은 지금 보아도 충격적이다. 첸이 다시금 복수를 위해 홍구도장을 찾고,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며 상대를 제압하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뒤를 이은 성룡과 이연걸, 견자단의 무술연기와는 단연 차별화되는 이소룡의 무술연기가 돋보인다. 사람을 짓밟고 그 죽음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는 듯한 표정과 기괴한 기합들이 스크린을 넘어 보는 이의 감각을 깨운다. 이와 같은 특별함 때문에 반세기가 지나서까지 이소룡과 그의 캐릭터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강렬하다.

영화는 마침내 첸의 복수가 성취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첸의 복수가 무엇인가. 영화 초반 정무문을 찾아온 불청객 앞에서도 끝끝내 이성을 부여잡으며 스승의 말씀을 되새겼던 수제자는 영화 막바지에서 마침내 제가 틀렸음을 인정한다. 스승이 말한 싸움을 피하고 스스로를 단련하라는 말 대신, 적에게 달려들어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영화의 엔딩곡, 죽음보다 삶이 낫다고 누가 말했는가 묻는 가사는 그대로 작품의 주제를 드러낸다. 외세가 농락하는 중국, 더는 자긍심을 찾아볼 수 없는 나라에서 생을 부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말이다.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 버젓이 붙여놓은 공원 간판과 그곳을 버젓이 드나들던 개 끈 서양 여인의 모습 같은 장면은 1970년대 여전히 세계 속에서 저 멀리 뒤처진 후진국으로 남아 있던 당대 중국인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게 분명하다.
 
▲ 정무문 스틸컷
ⓒ 조이앤컨텐츠그룹
 
물을 밖에 없다, 한국이 세울 기치가 무엇인가를

쑨원이 아꼈던 곽원갑을 텐진시와 중국 무술계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것도 그가 서양 무술로부터 중국 전통무술의 기치를 세우려 노력했단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곽원갑의 죽음과 관련하여 확인되지 않은 일본인에 의한 독살설이 나도는 것부터, <정무문>이 아편전쟁 이후 널리 퍼진 '동아병부'라는 모욕적 표현을 영화 속에 차용해 놓은 것까지가 영화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당대 중국인에게 있어 곽원갑은 그저 한 명의 무인이 아니고, 첸의 복수 또한 어느 한 제자의 일탈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곽원갑은 마지막 남은 자긍심이고, 첸은 움츠러든 중국이 굴기하여 질주하겠다는 선포와도 같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물을 밖에 없다. 동양의 역사 깊은 나라로서 청과 비슷한 굴곡을 겪어온 한국에게 있어 곽원갑은 누구인가. 거듭하여 영화며 소설의 주제로 등장하는 정무문은 또 어디인가. 첸으로 표상되는 결의 어린 태도는 또 무엇인가. 한국은 기꺼이 끌어안을 근대의 영웅을 가지고 있는가. 홍범도와 같은 독립운동가조차 색깔론 깃든 정쟁 가운데 폄훼되는 시대, 작금의 한국인을 하나로 뭉치게 할 영웅이며 가치가 있는지를 나는 좀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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