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노오력'하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반문하는 책
[민종원 기자]
무엇이 우리 사회를 평화롭게 하고, 무엇이 조건 없이 모두에게 제공될 수 있는 공공의 유익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 한 나라를 이루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의견과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고 조율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정 당을 배경으로 출마하였더라도 한 국가를 이루는 전 구성원을 위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이가 대통령이라면,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은 정말 그렇게 활동하고 있을까?
백이면 백 다 다른 것이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어떤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좀 배운 사람이 그래도 낫지 않겠어?'라는 생각을 한다. 백이면 백 다 다른 의견들을 조율하려면 '똑똑한 사람, 가방끈이 긴 사람'이 좀 더 나은 판단과 결정을 하지 않겠느냐는 그런 생각 말이다.
"요즘 우리는 성공을 청교도들이 구원을 바라보던 방식과 비슷하게 본다.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이 책, 105쪽)
당신 능력은 당신만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마이클 샌델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앞표지 |
ⓒ 와이즈베리 |
능력주의, 그것에 대하여 마이클 샌델은 능력 그 자체가 특정 개인이 온전히 이루어낸 그 개인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60년 전,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가 빚어낼 오만과 분노를 예견했다. 사실 그 용어 자체를 만들어낸 사람이 마이클 영이다. 1958년 출간한 <능력주의의 등장 The Rise of the Meritocracy>이라는 책에서, 그는 어느 날인가 계급 장벽이 극복되고 누구나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진정 공평한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어찌 보면 이는 환영할 상황이다. 노동계급의 아이들이 마침내 특권층의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정한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니 말이다. 그러나 영은 그게 과연 순전히 기뻐할 만한 상황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적인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실패자는 '누구 탓을 할까? 다 내가 못난 탓인데'라고 여기게 된다."
(이 책, 59-60쪽)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니 20세기 중반까지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명확한 계급 사회를 겪어왔다. 단순하게 양반과 양반 아닌 사람들로 나뉜 사회가 우리나라에도 100년 전만 해도 실제로 존재했다. 다른 나라도 제도로 보나 실제로 보나 명확한 계급이 존재하던 사회를 경험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계급을 인정하지 않고 또 무너뜨리고 누구나 사람 그 자체로 인정받는 사회를 꿈꾸고 실천해왔다. 그 와중에 피어오른 개념이 '누구나 자신이 힘쓴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땀 흘린 만큼 얻을 수 있다와 같은 생각은 어느 나라이든 (제도상으로는) 계급이 없어진 새로운 사회에서 일종의 암묵적 합의를 지닌 사회적 상승의 기준과 평가 방법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 ...
아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 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이 책, 164-165쪽)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meritocracy)를 암암리에 또 다른 계급 상승 사다리로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내심 독자에게 툭툭 내놓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있는 자리(계급)에서 더 높은 곳(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붙잡기 위해 교육의 기회를 붙잡으라는 말이 자신의 일과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을 '패배자(loser)'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는다.
모든 이에게 공정한 사회적 상승의 기회를 준다는 공정성을 주장하지만 가만 보면 누군가를 '사회적 하위 계층'으로 판단하는 은밀한 계층 분리가 있지 않느냐고 마이클 샌델은 묻는다.
공정한 사회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공정한 기준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정한 사회는 개개인의 명확한 개별성을 인정하고 개개인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이다. 공정한 사회는 각기 다른 개개인과 개별 집단들의 사정과 요구가 그들 모두가 이루는 한 나라의 정책에 최대한 골고루 반영되는 사회이다.
공정한 사회는 그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에게 동일한 목표를 제시하고 동일한 기준을 제시하면서 '우리 사회는 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다. 동일한 목표와 동일한 기준에 따른 '공정하다는 판단'은 누군가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능력 없는 사람으로 나눈다. 이것은 알게 모르게 계급을 나누고 계층 간 사다리를 부러뜨려 분리하는 합법적 불법 행위가 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은 말한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느냐고. 트럼프가 수많은 남성 백인 중산층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하위 계층'의 광적 지지를 받으며 '공정한 사회로의 복귀'와 '위대한 나라의 회복'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느냐고.
그것은 '능력주의의 오만과 헛점'이라고 말한다. 능력을 오로지 개인의 것으로 여기며, 동시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를 은근히 '패배자'로 여기게 만든 것이다.
능력 발휘를 위한 교육의 필요를 강조하며 학력(대한민국에서는 '학벌'에 해당한다) 상승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결국 학력이 부족하고 학위가 없는 평범한 이들을 '패배 예정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주의 사회에 대한 반대급부적 분노 표출과 집단적 반발이 트럼프 지지로 그의 대통령 당선으로 나타난 것이었고.
능력주의, 그것은 정당한 개념인가? 공정한 사회, 그것은 정말 정당한 목표인가? 마이클 샌델에 따르면 우리는 그 의미와 내막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어느 순간부터 피차 '능력자'와 '패배자'로 나누고 사회적 분노를 끝없이 적립하는 대립 사회를 만들어온 것이 아닌지. 미국 못지 않게 대한민국도 지금 그 질문에 골몰하고 있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서울: 와이즈베리, 2020.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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