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 집착 말라…‘독’이 되어 돌아온다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2024. 6. 2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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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콤모두스·연산군의 실패한 자기 관리
콤모두스는 태어날 때부터 ‘황제’가 될 환경에서 자랐다. 때문에 일반인과 다른 경험을 축적했고, 이런 그의 ‘베이지안 업데이트’는 훗날 그가 몰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콤모두스’의 모습.
로마 제국 전성기로 많은 사람들이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꼽는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해 선정을 베풀었으니 로마 최고의 전성시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네르바(재위 96~98년),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년)의 다섯 명 황제 중 앞의 네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오현제의 계승은 황제가 자신의 아들이 없어 부하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는 방식이었다. 우수한 인재를 뽑아 부하로 삼은 후 평생을 같이 일해보고 나서 가장 뛰어난 자를 다음 황제로 삼았으니 태평성대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오현제 시대가 어떻게 종말을 맞이했는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알 수 있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늙은 황제가 오현제 중에서 마지막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에게는 콤모두스라는 외아들이 있었다.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훌륭한 아버지의 자질을 전혀 물려받지 못한 콤모두스는 나랏일을 제쳐놓고 검투 시합에만 열중한다. 결국 검투 시합을 구경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콤모두스는 자신이 직업 검투사가 돼서 시합에 참여하는데 이는 영화적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황제인 콤모두스는 결국 측근에 의해 살해당하고 로마는 혼란에 빠진다.

콤모두스와 비슷한 한국의 역사적 인물을 찾아보면 연산군이 떠오른다. 콤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단순한 황제가 아니었다. ‘명상록’이라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책을 저술한 철학자였던 것처럼 연산군 아버지도 조선 경국대전을 완성시킨 명군 성종이었다. 또한 콤모두스는 형제들이 모두 갓난아이 시절에 사망해 사실상 유일한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왕위 계승이 확정됐는데, 연산군 또한 성종의 맏아들로서 태어날 때부터 왕위 계승이 확정돼 있었다.

왕의 맏아들이 제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은 연산군이 최초였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정통성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확실한 왕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왕위 계승이 확정돼 있던 조선의 또 한 명의 왕자가 영조 아들 사도세자였다. 사도세자는 둘째 왕자였지만 형이 사도세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했기에 사도세자가 태어난 시점에서 영조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콤모두스, 연산군, 사도세자는 모두 일반인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경제학에서 한 인간이 선택을 함에 있어 중요하게 보는 것이 바로 세상을 보는 주관적 확률 또는 믿음(belief)이다. 어떤 거래를 할 때 상대방이 정직한 사람일 수도 있고 사기꾼일 수도 있다. 너무 순진하게 상대방을 믿는다면 온갖 사기를 당할 염려가 있지만, 반대로 모든 사람을 의심한다면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해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의 3%가 사기꾼이라면 세상 사람 중 3%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판단하는 사람이 가장 성공할 확률이 높다.

인간은 태어나서 온갖 경험을 하면서 세상의 객관적인 확률을 배워가게 된다. 애초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정직하고 사기꾼은 1%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사기꾼을 만나 전 재산을 잃는 경험을 했다고 하면 대번 세상 사람 중에서 50% 이상이 사기꾼이라고 믿음을 바꾸기도 한다. 이런 작업을 ‘베이지안 업데이트(Bayesian Update)’라고 경제학에서는 부른다.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을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의 객관적인 확률에 접근시킨다는 말이다.

콤모두스, 연산군 그리고 사도세자는 이런 베이지안 업데이트 측면에서 아주 불리한 환경에 처한 이들이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주변 사람이 모두 쩔쩔매고 모든 요구를 들어줬을 테니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 일반인의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을 터. 그랬기에 자신이 검투사가 되면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정사를 돌보지 않고 매일 파티를 열어도 국왕 지위가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하지만 조선의 국왕들 중 연산군과 함께 반정에 의해서 끌려 내려온 또 한 사람인 광해군의 경우에는 정반대 힘이 작용했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났다. 그것도 첫째가 아니고 형인 임해군이 존재하는 둘째였다. 왕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왕자였던 셈.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 생사가 위험에 처하자 선조는 할 수 없이 후궁 자식 중 제일 현명했던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웠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선조가 늦은 나이에 정식 왕비에게서 왕자를 낳은 것이다. 바로 영창대군이다. 이미 광해군을 후계자로 정했기 때문에 광해군이 다음 국왕이 돼야 하지만 후궁 소생인 광해군에 비하면 아직 어리지만 영창대군이 훨씬 정통성이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 즉위하면 명나라 책봉을 받아야 했는데 명나라는 정식 왕비 소생인 영창대군과 친형인 임해군이 있음에도 광해군이 국왕이 돼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면서 여러 번 책봉을 거부했다. 천신만고 끝에 국왕 책봉을 받았지만 평생 임진왜란과 왕위 책봉 정당성에 시달렸던 광해군의 주관적 세계관은 연산군과는 정반대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을 확률이 높다. 연산군이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광해군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광해군은 왕이 되자 자신의 친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모두 죽인다. 그리고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영창대군을 낳은 아버지 선조의 정식 왕비 인목왕후를 서인으로 폐하여 가둔다. 부모에 대한 효(孝)를 가장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던 당시 조선에서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 인목왕후를 벌한다는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이를 핑계로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은 왕위에서 끌어내려진다. 죽이지 않고 경쟁자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사람을 믿지 못한 광해군은 세상 비난을 받더라도 확실한 경쟁자의 제거를 원했다.

성장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때문에 광해군은 주변 사람을 잘 믿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세상에서 10%의 사람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객관적인 상황에서 광해군은 베이지안 업데이트를 통해 세상의 90%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면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주변 사람을 믿지 못하니 거꾸로 주변 사람들도 광해군을 믿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서도 대공황을 겪은 세대는 은행이 파산하는 상황을 너무 많이 봤기에 은행도 믿지 못해 현금을 집에 보관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도 청소년기에 IMF 경제위기를 경험한 세대는 모든 민간 기업은 파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공무원 시험에만 응시하기도 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신의 제한적인 경험을 통한 베이지안 업데이트로 인해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연산군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순식간에 자기를 버리고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고, 광해군은 세상에 믿을 만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작은 경험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현실 세계를 더 경험하든지 독서를 통해 현실 세계에 대한 정보를 더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이 세상의 객관적인 확률에 더 근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4호 (2024.06.19~2024.06.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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