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굳은 결기

이영천 2024. 6. 23.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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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 삼례 재봉기 후 한양을 향해 길을 나서다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전주성 함락에 화들짝 놀라 청과 일본 군대를 불러들인 어리석음. 전주화약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꼭두각시 김홍집 내각의 등장. 청일전쟁과 조일잠정합동조관 체결로 일본의 병참기지로 전락하는 한반도. 수구로 회귀하는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일본. 1894년 여름 불과 몇 달 사이 벌어진 일련의 변화에 백성은 극한의 상태로 내몰린다. 나날이 극악해지는 일본의 만행에 온 백성이 분개한다.

구원의 등대처럼 전라도 동학만을 바라보며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경상, 충청, 경기, 강원, 황해도 등 곳곳에서 봉기한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특히 한양 턱밑의 안성과 죽산 관아 점령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 토벌대는 경기도와 충청 북부를 짓이기며 파죽지세로 남하할 태세다.

조·일 연합군의 학살에 가까운 만행은 그 지역은 위축시켰지만, 그들의 참상에 분개한 북접 재봉기라는 역설로 이어졌다. 이제 모든 여건이 재봉기로 치닫는다. 봄철의 봉기가 내정을 개혁하자는 항쟁이었다면, 재봉기는 반봉건·반외세의 자주 국가 수립이란 대일본 선전포고다. 나라를 구해낼 유일한 무력 집단은 '동학혁명군'뿐이다. 백성의 군대다.
 
▲ 동학농민군 출진상 1894년 10월(음) 초. 대일본 선전포고 겸 2차봉기에 나서는 동학혁명군을 모습을 형상화한 삼례의 출진상.
ⓒ 이영천
 
하지만 실제에서 승패는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군이 높은 하늘에서 동학혁명군의 허실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다면, 혁명군은 흔들리는 호롱불에 의지해 캄캄한 새벽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정과 무기, 화력, 군사 훈련 및 전술과 전략, 통신, 보급 및 지휘체계 등 어느 하나 우월한 게 없다. 단지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굳은 결기에 군사 숫자만큼은 조·일 연합군을 능가했다.

실질적 재봉기

권한을 위임받은 전봉준은, 상황을 총체적으로 읽고 있었다. 무엇보다 추수가 갈무리되어야 한다. 또한 뒤늦게 참여를 결정한 북접에게 다소의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무기와 군량미, 군사를 모아 전쟁에 나서는 일이다.

농민군 하여금 굳센 믿음을 갖게 하려면, 김개남의 예언설을 활용할 필요도 있었다. 임실 상이암에 들어간 김개남은 49일설을 예언처럼 퍼뜨리고 있었다. 8월 25일부터 49일째는 10월 14일이다. 마침 추수가 끝나는 때다. 또 다른 하나는 안성과 죽산의 동학군을 토벌한 조·일 연합군이 남하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다는 점이다. 전봉준 자신도 질병에 시달리는 중이다. 이 모든 걸 고려하면 봉기는 10월 초중순이다.

그런 와중에 다른 지역에서 먼저 들썩인다. 전라도와 무관하게 곳곳에서 무장 봉기한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선 실질적 재봉기다. 황해도 해주성이 동학군에 함락되고, 경상도 진주성이 김인배 수중에 들어온다. 조·일 연합군은 해주를 되찾고자 초토사와 소모사를 임명하여 파견하는 한편, 경상도 방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경상도마저 전라도와 같은 기세로 일어난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추념의 장 초개와 같이 싸우다 죽어간 동학혁명군을 추모하는 조형물. 삼례 재봉기 관장에 마련되어 있다.
ⓒ 이영천
 
안동으로 초토사를 파견하는 한편, 상주·거창·창원에도 소모사를 파견하여 봉기를 사전 차단하려 시도한다. 김인배가 하동·진주에서부터 남해·고성·사천·곤양 등을 점령하자 경상 북부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다.

김천의 편보언이 이웃한 상주·선산까지 영향을 미치며, 일본군이 부산∼의주 사이 청일전쟁 사용 목적으로 깔아 놓은 통신선을 공격한다. 강원도는 원주·영월·정선·평창 등지에서 동학군이 강릉을 점령하고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백성의 군대 동학혁명군

드디어 때가 이르렀다. 전봉준이 출전을 선언한다. 모든 동학혁명군은 10월 9일 삼례로 모이라는 통문이 돈다. 김개남에게 한양 공략 계획을 알리고, 유구의 최한규에게 확보한 대포와 무기를 은밀하게 강경으로 보낼 것을 알린다. 각지 동학혁명군이 삼례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명실상부 백성의 군대로서다.
 
▲ 재봉기 조형물 삼례 동학농민혁명 광장에 마련된 재봉기 조형물.
ⓒ 이영천
   
이때는 갑오 구월간이라. 정부에서는 동학당 토벌 준비가 이미 다 성립되어 경병(京兵)과 일병(日兵)과 청병(淸兵)이 한데 섞여 삼남 지방을 거쳐 들어온다는 말이 들려왔다. 전라도 각 읍에 있는 집강소에서는 재기병을 아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재기병에 일어선 사람은 …(중략)… 그 수는 십만여 명에 이른지라, 당시 대두령으로 있는 손화중과 김덕명 등이 총지휘자가 되고 전봉준은 대장이 되어 전라도 대군을 영솔하여 전주에 웅거하니, 그때 군세는 …(중략)… 이때 전봉준은 십만 대 병력을 전주에서 검열한 후 길을 떠나 삼례역에 진 치고 있었다. (오지영. 동학사. 문선각. 1973. p235~237 의역 인용)
 
삼례에 모인 1만여 혁명군이 연비 연비 하룻밤을 보내고, 강경을 향해 진군한다. 내륙의 모든 물산이 모인다는,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다. 강경으로 진군하는 목적은 명확하다. 군사를 모으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 조달이다.
 
▲ 재봉기 조형물 어두운 시대, 자주국가 수립이라는 새로운 문을 연 재봉기 조형물.
ⓒ 이영천
 
강경으로 진군하자 농민군이 속속 합류한다. 민보군을 모아 혁명군에 대항하던 유생 이유상의 가담이 특이하다. 그는 김홍집 내각을 주도하던 개화파의 기회주의적 행태와 토벌군 이두황이 경기, 충청에서 벌인 잔인한 학살을 보고서, 마음을 돌린 인물이다.
 
이때 유도수령 이유상이 동학 토벌 명분으로 수천 군사를 일으켜 공주 건평시(乾坪市)에 진을 치고 장차 남으로 진격하려 논산 방면으로 향하였다 …(중략)… "나는 유도의 수령이란 명색으로 동학당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켜 이곳에 왔노라. 장군의 이름이 높고 의거가 장하다 함을 듣고 우선 만나보고 합류 여부를 결정하고자 하였더니 이제 장군을 마주함에 자연 감동되는 바 있어…(후략)". (앞의 책. p246~247 의역 인용)
 
▲ 강경 포구(1930년대) 금강의 하항으로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였을 만큼 번창한 강경 포구 옛 모습.
ⓒ 논산시청
   
강경에서 북접은 물론 각 지역의 준비 상황을 상세히 살핀다. 출전 명령에도 생각만큼 군사가 모이지 않는다. 북접이 합류한다 해도 전투 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이다.

논산을 향해

또한 남쪽 방어를 맡은 이방언과 손화중의 통문을 통해 후방 방어상태를 점고한다. 장흥의 전라 병영성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전언이다. 이에 김방서가 3천 군사를 거느리고 광주 손화중과 합류한 뒤, 사정을 보아 장흥의 이방언을 지원하도록 했다. 경기도와 충청도 등 공주 북쪽에서 활발한 동학군 형세를 고려하면, 고육지책일망정 남쪽 방비에 군사를 보내야만 했다.
 
전라도 남쪽 끝자락인 강진 병영과 장흥 부에서 관리배들이 다시 발호하여 동학당을 침범 약탈한다는 급보가 논산 대본영에 전달된다. 강진 병영으로 말하면 육군을 양성하는 호남의 중요한 진영이오, 장흥 부 또한 물산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곳이라. 장흥 부사와 강진 병사가 모의하여 동학 주력이 북진하고 없는 틈을 타, 나머지 동학도를 잡아다가 가두고 심하게 약탈한다는 급보를 듣고 걱정하던 차 금구 대접주 김방서가 나서 자진 출전하겠다 하는지라, 대본영에서는 이를 허락하여 군사 삼천 명을 거느리고 강진으로 향하여 내려갔다. (앞의 책. p251 의역 인용)
 
강경에서 또 한 사람이 동학혁명군에 가담한다. 여산 부사를 지낸 김원식이다. 그러나 두령들은 물론 여산 출신 군사들은 이를 의아하게 여기며 그의 가담을 공공연히 의심한다.
 
▲ 강경 포구 지금은 하항으로써 기능을 잃고 한적한 강변으로 변신한 강경 포구의 현재.
ⓒ 논산시청
   
이때 여산 부사 겸 후영영장(後營營將) 김원식은 임무를 지고 있던 자라 …(중략)… 김원식은 호방한 남자라 전봉준이 자신의 행동에 조금도 난색이 없음을 보고 즉시 칼을 땅에 던지고 머리를 숙이며 전봉준의 손을 잡고 사례하여. (앞의 책. p247~248 의역 인용)
 
강경에서 이틀을 머문 동학혁명군은 논산으로 향한다. 김개남에게 보내는 통문에 한양으로 진군 행로와 작전의 개괄을 알린다. 그러나 김개남의 생각은 다른 듯 보였다. 10월 12일 전봉준이 논산에 당도하고, 14일 전주에 입성한 김개남은 금산으로 진격계획만을 알려왔을 뿐이다.
 
14일. 김개남이 남원에서 전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봉준은 전주를 떠나면서 계속하여 개남에게 격문을 보내어 …(중략)… 이에 (김개남이) 부대를 이끌고 전주로 향하였는데 총을 등에 진자가 8천 명이었으며 짐 보따리를 실은 행렬이 백 리까지 이어졌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268)
 
피비린내 나는 일전을 앞둔 폭풍전야다. 이 전쟁의 승패에 나라 명운이 달렸다. 혁명군 어깨 위로 역사의 무거운 사명이 내려앉았다. 반드시 이겨야겠지만 설령 패한다 해도 가야만 하는 앞길을 제시하는 싸움이다. 후대가 이어야 할 길이다. 이 세대는 버거운 시대의 짐을 떠안았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떳떳한 길을 걸어간 부끄럽지 않은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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