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락집의 화가, 10년 단골들 덕에 행복합니다

임경화 2024. 6. 23.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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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 17년차, 가지각색 따뜻한 손님들 사연... 오늘도 그들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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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화 기자]

직장인들의 고민 중 한 가지는 '오늘 점심 뭐 먹을까?'이지 않을까 싶다. 매일 다른 메뉴를 찾아 점심시간마다 옮겨 다니는 것도 쉽지 않다. 

더구나 요즘은 물가가 비싸져 외식 비용마저 만만치 않아 메뉴 고르기조차 쉽지가 않다. 매일 출근하고 일하는 것도 힘든데, 맛있는 걸 먹는 점심시간만이라도 즐겁고 또 좀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동네에서 작은 도시락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필자.
ⓒ 임경화
 
나는 자영업 17년 차, 도시락배달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매일 도시락을 싸서 고객들에게 배달한다. 그런데 주문할 때 고객들은 사장인 내게 도시락 메뉴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냥 "도시락 5개 보내주세요"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메뉴는 내가 정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시장 상황에 따라 밑반찬도 내 마음대로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객들은 불만이 없다. 보통 자영업이나 식당에선 '손님이 왕'이라고들 하는데, 이곳은 손님이 왕이 아니라 사장이 왕인 셈이다. 왜냐고? 골치 아픈 '메뉴 고민'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실은 남편과 내가 둘이 운영하는 동네가게이다 보니, 여러 가지 메뉴를 동시에 소화할 수가 없어서 하루에 한 가지 도시락만 만든다(관련 기사: 고물가 시대, 만 원 이하 도시락 가게의 전략 https://omn.kr/28rrq ).

통상 월요일엔 제육볶음도시락, 화요일엔 생선가스도시락. 한 달에 스무 가지 정도 메뉴다. 점심마다 색다른 메뉴를 개발하고 고민해서 고객에게 매일 색다른 도시락을 맛 보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짧은 점심시간 안에 백개가 넘는 도시락을 배달해야 한다. 그걸 위해서는 배달시간도 사장인 내가 정한다.

가장 최적의 노선으로 동선을 짜고, 효율적이고 순차적으로 배달을 순식간에 한다. 그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계산도 나중에 도시락을 수거할 때 한꺼번에 한다. 모두, 손님이 오랜 단골들이라 서로를 믿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네 안의 병원과 약국, 카센터 은행 작은 공장 등이 우리 단골들이다. 대부분 수년간 단골이고 10년 이상 서로 얼굴을 봐온 단골도 꽤 된다. 그러다 보니 단골들의 상황과 식성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고객들도 역시 우리를 잘 알고 이해해 준다. 어쩌다 조금 늦어도 괜찮은 이유다. 

오늘은 두부김치도시락이다. 잘 익은 김치를 듬성듬성 썰어 볶아놓고 돼지고기 목살을 따로 익혀서 야채와 참기름을 두르고 휘리릭 섞어준다. 재래시장 안 손두부집에서 받아온 고소한 두부를 먹기 좋게 썰어둔다.

밑반찬으로는 계란야채범벅과 돌김무침 그리고 칼슘 듬뿍 갈색 쥐치뼈볶음과 볼어묵볶음. 그리고 요즘 제철인 영양부추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새콤달콤 양념장 만들어 살살 버무려주면 색감도 식감도 좋은 겉절이 반찬이 된다. 

노란 계란물에 파송송, 초록 샐러드에 빨간 파프리카
 
 행복한만찬의 두부김치도시락이다
ⓒ 임경화
 
이제부터는 그림을 그릴 차례이다. 밥에는 기장 쌀을 섞어서 보슬보슬한 흰밥사이로 노란빛 구슬들을 심었다. 뽀얀 두부는 세 개를 가지런히 먼저 담고 붉은빛 김치볶음은 돼지고기가 보이도록 두부옆에 놓았다. 

밑반찬으로는 노란 계란물에 초록색 파를 송송 뿌려 범벅으로 담고, 그와 대비되도록 검은색 돌김무침을 옆에 담았다. 갈색빛 쥐치뼈볶음과 볼어묵 볶음도 밋밋하지 않도록 물엿을 살짝 뿌려 반짝이게 포인트를 주었다. 그리고 초록색 영양부추 샐러드는 오른쪽 위칸에 배치하고 빨강노랑 파프리카로 화려함을 더했다. 

국은 근대를 넣은 된장국이다. 미리 받아놓은 쌀뜨물에 다시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먼저 내고 싱싱하고 푸릇한 근대를 넣어 한소끔 끓여주면 구수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가게가 맛있는 냄새로 가득하다. 

오늘도 우리 단골고객들이 이 도시락으로 눈과 입이 행복하기를,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10분 쪽잠이라도 누리기를 바라본다. 

최근에는 특별한 부탁도 받았다. 단골 중 한 분인 안경점 사장님께서 이웃에 장애우 부부가 산다며 따로 반찬을 보내주고 싶다고 하셨다. 아무리 아프거나 아무리 어려워도 밥은 챙겨 먹어야 하는데 그게 상황상 어려웠기에, 우연히 그분들 딱한 사정을 알고서는 내게 부탁을 하신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따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가늠이 되니 나로서도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넉넉하게 반찬을 담고 밥까지 크게 담아 한 동네인 그분 댁에 배달해 드리고 있다(물론 그 사장님께서 매달 비용을 보내주신다). 우리 집 '행복한 만찬'이 '행복한 반찬'이 되는 날이다.  
 
 아파트 상가에 자리잡은 우리 가게 모습
ⓒ 임경화
 
이런 일도 있었다. 도시락을 자주 시켜 먹는 한의원 실장님은 도시락을 맛있게 먹은 뒤, 시아버지께서도 된장국을 좋아하신다며 된장국을 따로 사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곳 간판은 도시락집이지만, 단골이 원한다면 반찬도 판매한다. 에코비닐백에 건더기 듬뿍 넣어 도시락 수거하러 가는 남편에게 부탁한다. 직장 생활하며 가족까지 챙기고 싶어하는 고객의 살뜰함, 가족을 생각하는 착한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에게 웃으며 말한다.

"사장님! 이거 사거리 한의원에 갖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 

남편도 웃으며 내게 대답한다. '회장'은 남편이 내게 붙여준 직함으로, 우리 두 사람이 '행복한 만찬'의 사장이고 회장이라는 뜻이다. 기사를 자주 쓴다며, 남편은 기분이 좋은 날에는 내게 "작가님"이라고도 불러준다. 

이렇게 오늘도 피곤하지만 건강한 하루를 꽉 채웠다. 도시락을 회수해 오고 설거지를 하고 장부 정리를 한다. 내일 만들 도시락을 위해 장 볼 리스트도 작성하고 나면 하루 일과는 끝. 그러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 

그러면 어떠랴. 나는 오늘도 도시락에 마음껏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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