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도 아닌데 유치장에... 평등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박만순의 기억전쟁2]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 서정기 옥중 사진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갈무리 |
'맴맴맴' 운동장을 둘러싼 나무에 매달린 매미의 울음소리는 해가 중천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커졌다. 충북 충주군(현재 충주시) 대소원국민학교 교정은 면내 각 마을에서 모여든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갓을 쓴 노인부터 마을의 청·장년들, 코흘리개까지, 걸을 수 있는 이들은 모두 모여든 듯했다.
이류면(利柳面)이 만들어진 이후 가장 많은 주민들이 모였다고 이구동성이었다. 영평리 삼주리에서 아버지 따라 이날 행사에 참가한 소년 류인호(당시 9세)는 입이 딱 벌어졌다. 면소재지인 대소리에서 5일마다 열리는 장날에 여러 번 와 봤지만 이날만큼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누울 사람은 누워라' 연설자의 폭탄 발언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지 1년 만인 1946년 8월 15일, 충주군 이류면(현재 대소원면) 대소원국민학교에서 '조선 독립 1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운동장에 각 마을별로 열을 지어 섰다. 교단의 내빈석에는 행사 관계자와 유지들이 자리했다. 면장, 교장, 우체국장, 금융조합장, 지서장들은 한결같이 근엄한 자세로 교단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첫 번째 순서는 면장의 개회사였다. "지금부터 조선 독립 1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겠습니다." 좌중의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면장의 개회사는 금방 끝나지 않았다. 내빈소개에 이어, 오늘의 행사에 있기까지 도와준 단체와 인사를 소개하는 데 10분을 썼다.
그런 연후에도 면장의 연설은 10분이 더 걸렸다. 청중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행사는 이제 초반전인데 8월의 더위는 청중들의 머리와 가슴을 달궜다. "이상으로 제 인사를 갈음하겠습니다."
다음 순서는 대소원국민학교 교장의 환영사였다. 행사 사회자의 "교장선생님께 대해 경례!" 하는 소리에 참석자 모두 머리를 숙였다. 교장의 연설은 끝날 듯하면서도 '마지막으로'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한 후에 끝났다.
사회자가 다음 연설자를 소개하자 청중들은 한결같이 환호를 질렀다. 이류면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인 서정기(1898년생)가 마이크를 잡았기 때문이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독립투사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뒷줄에 있던 아이들과 키 작은 이들은 까치발을 했다.
독립투사 서정기의 입에서는 예상 못한 발언이 나왔다.
"앉을 사람은 앉고 누울 사람은 누우시오. 최대한 편한 상태에서 제 말을 들으시오."
소위 지역 유지들은 일 년 중에 가장 덥다는 때에 청중들을 꼿꼿이 세워 놓고 20분이고, 30분이고 연설을 했는데, 서정기는 전혀 달랐다. '모든 권력을 부정하고 권위주의를 타파하자'는 그의 아나키스트 사상이 묻어난 순간이었다. 그때 소년이었던 류인호는 78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서정기를 잊지 못한다.
싸리재에 묻힌 '평등'의 꿈
화가 잔뜩 난 서정기가 충주경찰서 서장실 문을 노크했다.
"선생님 어쩐 일이십니까?"
"서장님, 도대체 자수한 보도연맹원들을 왜 구타합니까?"
서정기의 항의에 서장은 일순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유지하며 "알아보고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서정기가 충주경찰서를 찾은 것은 지난해 말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이란 단체 때문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은 과거에 남로당이나 좌익단체에 활동했던 자들을 전향시켜 대한민국 국민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반공단체였다.
하지만 국민보도연맹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일선 경찰서와 지서는 지역별 할당제를 실시하고, 좌익을 발본색원한다며 자수와 밀고를 강요했다. 그런 과정에서 충주 일부 지역에선 보도연맹원을 경찰서와 지서에 연행해 구타했다. "옛 동지들을 불어라"라며 있지도 않은 좌익 전력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서정기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마을과 지역의 농민들이 지서와 경찰서에 가서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몇 개월 후 서정기는 충주경찰서장의 호출을 받았다. 6.25가 터졌다는 소식에 찜찜하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야 있겠나'라는 마음으로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 도착한 서정기는 경찰서장을 면담하기는커녕 유치장으로 직행했다. 그전엔 경찰서에 들르면 정문의 입초를 서는 순경부터 주임, 계장까지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했는데, 다들 이날 따라 서정기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왜 이러는 건가!"라는 항변은 통하지도 않았다. 상급자의 지시를 받은 순경은 그를 거칠게 유치장으로 밀어 넣었다.
다음날인 1950년 7월 5일 서정기와 충주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싸리재로 향했다. 숲길에 들어서자 그늘이 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지만 보도연맹원들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숲 한가운데 세워진 이들 앞에 선 경찰들의 총구가 빛났다. 뒷결박당한 이들의 동공이 흔들리고 무릎이 휘청일 때, 한쪽에 세워진 서정기는 의연한 모습이었다. 총성과 동시에 한 무리의 보도연맹원들이 쓰러졌을 때도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헌병 장교의 권총이 서정기의 머리로 향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서정기의 무릎이 꺾였다. 그날 싸리재의 매미 울음소리는 4년 전 이류국민학교에서의 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서정기가 평생 꿈꿨던 '권력자 없이 민중이 평등한 세상'은 그날 싸리재에 묻혔다.
서정기가 싸리재에서 주검으로 변한 것은 그가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충주경찰서에 예비검속된 것이다.
▲ 충주문예사운동 사건 관련 신문기사. 중외일보 1930년 3월 6일자. |
ⓒ 중외일보 |
"충주문예운동사건 최고 6년을 구형"
<중외일보>는 3단 기사로 충주문예운동사 사건을 다뤘다. 10개월 전인 1929년 5월 9일 관련자를 검거한 이래 수사와 재판 끝에 검찰이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관련자 다섯 명에게 6년을 구형했다는 기사였다.(<중외일보>1930년 3월 6일자 기사)
이 사건은 피고들이 <문예운동>이라는 잡지를 만드는 회사를 표면에 세우고 이면에서는 무정부주의 결사를 조직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정기, 서상경(1900년생) 등이 6년형을 구형받았다.
이들은 두 달 후인 1930년 5월,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1934년 9월 만기 출소했다. 만기출소라고는 하지만 미결기간이 일부 적용되지 않아 체포된 후로부터 만 5년 4개월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만 5년의 감옥살이를 한 이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합해 흔치 않은 사례다.
그렇다면 치안유지법 위반 사상 역대 최고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충주 문예운동사 사건'이란 무엇인가?
'흑기연맹' 사건으로 구속됐던 서상경이 석방 후 충주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서정기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진영을 다시 정비하고자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들은 1929년 2월 18일경 충주군 충주면 금성여관에 모여 문예운동사를 발기하고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사무처리를 위해 경리부, 편집부, 출판부를 뒀으며 사무소는 음성의 음성인쇄소로 정했다.
문예운동사는 표면적으로는 문예잡지 <문예운동>의 간행을 내세웠지만, 문예운동사 내에 별도의 동인회를 조직하여 문예운동사를 지도하고 잡지 <문예운동>을 통해 아나키즘을 선전하고자 했다. 문예운동사는 2월 23일 구신년간친회(舊新年懇親會)라는 윷놀이 대회를 개최해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활동을 암암리에 했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도 전에 경찰의 탄압으로 와해되고 말았다.(<조선일보> 1923년 11월 4일자 기사)
사실 활동에 비해 엄청난 중형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비단 서정기, 서상경은 이때가 최초의 감옥살이가 아니었다. 1925년에 있었던 '흑기연맹' 사건 이후 두 번째였다.
1923년 결성된 흑노회(黑勞會)가 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된 후 일본에서 귀국한 서상경, 홍진유, 방한상, 신영우 등의 활동으로 조직이 재건됐다. 불령사 사건 이후 귀국한 서상경은 1924년 12월부터 충주지역과 서울에서 수차례 회합을 하고 지역유지와 지식인들에게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이들은 충주 서상경의 집에서 여러 차례 회합을 하면서 서울에서 단체를 조직해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연구할 것을 결의했다. 1925년 4월 21일 '흑기연맹'을 결성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5월 3일 창립총회를 앞두고 4월 25일 관련자들이 검거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상경과 서정기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전홍식, <일제침략과 강점시기 충주지역사>, 2010)
역사에 묻힌 아나키즘
충주군 이류면 면서기 류흥수는 집안의 토지가 저당잡혀 현금을 마련해 서울로 향했다. 동생 류자명(1894년생)이 중국의 우한공안국 경비사령부에 검거돼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검거됐기 때문이다. 그해 8월 28일 보석으로 석방될 때까지 임시정부는 다방면으로 그의 석방을 위해 애를 썼다. 형 류흥수는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안의 토지를 담보로 넘긴 것이다.
그런데 시골에 내려와서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만취해서 길 위에 쓰러졌는데, 누군가 인감도장을 훔쳐 가 토지를 팔아버렸다고 둘러댔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류자명 집안은 경제적으로 나락의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 증언자 류인호(류자명기념사업회 회장) |
ⓒ 박만순 |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류자명의 손자 류인호(1937년생, 류자명기념사업회 회장)는 "서정기 선생이 논 14마지기(2800평, 9240㎥), 밭 10여 마지기를 주셨다"라고 했다. 물론 완전히 무상으로 준 것은 아니고 몇 년간 분할상환 형식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1949년 6월 21일 제정·공포된 '농지개혁법'에 의거해 조봉암이 1950년에 실시한 농지개혁을 앞두고 한 일인 듯하다.
이 일로 인해 류자명의 가정 경제는 기사회생했다. 서정기가 싸리재에서 주검으로 변하기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서정기는 한국전쟁 때 저세상 사람이 됐고, 류자명은 끝내 국내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1985년 중국 창사에서 생을 다했다.
2023년 진실화해위원회와 충청북도가 싸리재 발굴에 나섰지만 단 한 구의 유해도 찾아내지 못했다. 거기서 못 찾은 것은 유해만이 아니었다. 서정기가 꿈꾼 '만인이 평등한 사회'의 끝자락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전홍식, <일제침략과 강점시기 충주지역사>, 2010
박걸순, <류자명>, 2017
<중외일보> 1930.3.6.
<동아일보> 1929.5.31.
<매일신보> 1925.5.6.
'흑기연맹' 판결문
'충주문예사운동'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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