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없는 사회, 옛 현인에게 답을 구하다
[김성호 기자]
'어른은 없고 꼰대만 있다'는 말이 맴도는 세상이다. 미숙한 뒷 세대에게 삶의 지표가 되어줄 수 있는 멋진 어른을 우리 사회는 얼마나 가졌는지 돌아본다.
사회를 이끈다는 여러 분야, 이를테면 정치와 경제, 문화와 언론 영역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을 한국은 얼마 갖지 못했다. 반면 한 분야의 얼굴이라 불렸던 이가 처참하게 추락해 조롱과 불신의 대상이 되는 모습은 수없이 봐왔던 것이다.
제가 가진 걸 널리 베풀며 사회의 가치를 바로세우는 이를 우리는 어른이라 말해왔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각자도생의 시대라 부르는 것도, 창고 가득 재산을 채운 이가 주가조작이며 편법승계, 기타 온갖 불법과 편법으로 부를 쌓아올리는 모습은 이 시대 가치가 어디까지 무너졌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책 표지 |
ⓒ 홍신문화사 |
서양 철학의 원류, 소크라테스의 최후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말 그대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플라톤의 저술을 이르는 소위 <대화편> 가운데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변론>을 따로 떼어 한국에선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제목으로 여러 출판사가 출간해왔다. 통상 이 외에도 <대화편> 내 여러 작품, 이를테면 '파이돈' '향연' '프로타고라스' 등을 함께 싣고 있기에 출판사가 달라도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소크라테스는 서구 철학의 기원을 이루는 인물이다. 그 이전에도 철학적 사고를 하는 학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저 스스로의 앎과 알지 못함을 객관적으로 구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무지의 인식으로부터 참된 앎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철학하기의 출발이라 해도 좋겠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때그때 논리를 개발하는 소피스트들과 아테네를 중우정치로 선동하는 정치가들 사이에서 참과 거짓을 가려내기 위한 문답법을 광장을 오가는 시민을 상대로 시전하고 가르쳤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군요.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중에 어느 편이 더욱 좋은 일을 만날는지 그건 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플라톤은 이를 통상의 대화편 형식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문 형식으로 작성했는데, 책을 읽자면 마치 소크라테스가 직접 재판부에 저의 무고함을 변론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당대 아테네 사회의 여러 문제점은 이 책의 백미라 해도 좋겠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남긴 기록이 없다 보니 플라톤의 글이 곧 실제 역사로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이 책 가운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당당하게 변호한다. 책은 '최초의 변론', '유죄선고 후의 변론', '사형선고 후의 변론'까지 모두 3부로 나뉘어 있다. 각 부마다 변화하는 상황에도 확고부동하게 유지되는 태도와 당당함이 읽는 이에게 특별한 감흥을 안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당시의 아테네는 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문명국가로서의 전성기였다. 시민들은 당대의 기술적, 과학적 발전에 들떠 자신들이 문명인이며 주변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죽음 앞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이는 상황을 달리 보았다. 도시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이 아테네를 외적으로 풍요롭게 했을지 몰라도 윤리적 발전이나 진리로의 다가섬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당대 정치는 말 잘하는 선동가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며 중우정치로 흘러가는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이미 존경받는 소피스트들은 아테네 청년들에게 말을 잘 하는 법을 강의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투표권을 가진 시민을 움직이기 위해선 진실이 아닌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는 세태가 뿌리를 뻗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이 주도한 사변적 흐름이야말로 당시 아테네를 멍들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찾은 해법은 대화였다. 젊은 아테네의 청년들과 거리에서 만나 '나는 무지하지만 내가 무지하다는 것은 안다'란 전제로 대화하며 자만을 부수고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이끌었다. 더 강한 시민이 더 강한 민주정을 만든다는 확고한 신념이 이 같은 활동의 근간을 이루었다. 소크라테스 아래 플라톤을 위시한 수많은 젊은이가 모여든 배경이 이와 같았다.
책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게 최고의 선은 날마다 덕과 진리에 대해 말하고 따르는 것이었다. 덕과 진리는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인 반면, 당대 권력자와 그들의 권력을 지탱하는 온갖 논리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밖에 없었고, 그는 마침내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명으로 재판정에 선다.
▲ 논어 책 표지 |
ⓒ 홍신문화사 |
모든 인간의 군자화, 그로부터 구현되는 이상
서양에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있다면 동양엔 <논어>가 있겠다. 소크라테스 등과 함께 인류의 4대 성인으로 꼽히며, 종교적 상징인물이 된 예수나 부처와 달리 철학적이고 학문적으로 더 곱씹어 볼만한 인물이 공구, 즉 공자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묶은 어록이 한 권 책으로 오늘에 이어지니 그것이 바로 <논어>다.
완고하고 시대착오적인 도덕주의자일 것이란 흔한 편견과 달리 <논어>가 그린 공자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배포가 큰 대학자의 풍모를 가지고 있다. 조금 깐깐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내임과 동시에 무척 성실하고 신중한 학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커다란 나무 아래서 십여 명의 제자들과 온 세상을 말하는 사람. 그가 이 책을 읽은 뒤 떠올리게 되는 공자의 모습이다.
<논어>가 그린 공자의 진정한 멋은 소인배가 많은 현실 속에서도 소인배와 어우러지거나 소인배를 피해 살아가는 대신 소인배를 군자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그야말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반복될 좌절에도 무릎 꿇지 않고서 끝까지 군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은근과 끈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실제 역사 속 공자의 삶이 그와 같아 보장된 성공보다 현실적 좌절에 수없이 노출되었단 점이 시대에 영합하길 선택하는 평범한 이들과 그를 구분하도록 만든다.
소인배는 소인배일 뿐이라는 진실을 인정하면서도 소인배가 군자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두지 않는단 점은 각별히 인상적이다. 이를 위해 교육과 학문의 가치를 부르짖었고, 그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군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그의 학문의 줄기를 이룬다. 즉 <논어>는 유가의 제자들로 하여금 인간을 일깨워 군자로 나아가도록 돕는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훗날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대학>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스스로를 닦아 가정과 나라, 세상을 평안케 하라고 적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논어>는 개혁적인 책이기도 하다. 소인배가 군자로 나아갈 수 있는 교육기회의 평등과 도덕적인 정치가 보장되는 유연하고 이상적인 천하를 공자가 구상하고 있음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군자화를 이뤄낸 군주가 역시 군자화를 이뤄낸 관리들을 통해 온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나아가 교육시켜서 모든 백성의 군자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포부, 동서양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정치구상이 아닐까 한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보다도 한 걸음 열린 구상이 아닌가.
더불어 백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결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들 개개인이 자기 수양을 통해 소인배에서 군자로 거듭난 후에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무척 신선하게 느껴진다. 시민의 권리에 비해 의무를 주목하는 일이 드문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사회현안에 대한 충실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를 이 책이 일깨우고 있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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