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에 천만감독 생존법 "'아수라' 내 멋대로 찍고 떠나려 했다"

나원정 2024. 6. 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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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춘천영화제 클로즈업
'서울의 봄' 천만감독 김성수
대표작 '비트' '아수라' 상영
"영화는 젊은 예술, 변화해야 생존"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오른쪽)이 지난 22일 강원도 춘천 영화관 메가박스 남춘천에서 자신의 연출작 '비트'와 '아수라' 상영 후 관객과 대화 행사에 참여했다. 이날 행사는 전날 개막한 제11회 춘천영화제 '클로즈업' 섹션 일환으로 진행됐다. 사진 춘천영화제

‘비트’가 개봉한 1997년에 태어났다는 MZ관객부터 중년 영화팬까지 질문이 골고루 쏟아졌다. 영화 ‘서울의 봄’으로 올초 1300만 흥행을 거둔 김성수(62) 감독이 22일 강원도 메가박스 남춘천에서 열린 제11회 춘천 영화제를 찾았다. 주목할 만한 영화인을 초대하는 ‘클로즈업 섹션’에서 출세작인 청춘영화 ‘비트’와 범죄 누아르 ‘아수라’(2016)로 관객을 만났다.


천만 노린 ‘감기’ 잘 안돼…‘아수라’ 터닝포인트


김성수 감독의 영화 '아수라' 장면. 김 감독의 페르소나 배우 정우성과 이 영화로 처음 함께한 배우 황정민(왼쪽)은 '서울의 봄'에도 주연으로 다시 호흡 맞췄다. 사진 CJ ENM
“낡은 영화 졸작을 보러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관객에게 인사한 김 감독은 “‘비트’는 데뷔작(런어웨이, 1995)이 잘 안돼서, ‘아수라’는 천만 요행을 바랐던 ‘감기’(2013)가 잘 안돼서 속상한 마음에 만든 영화”라면서 특히 ‘아수라’를 두고 “내 멋대로 하고 싶은 스타일로 찍고 영화계를 떠나겠다는 마음이었다. 내 감독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돌이켰다. “저는 만족감이 컸지만, 독단적으로 찍어 놓고 보니 영화가 편협하더라. 반성도 많이 했다”면서 “‘아수라’가 없었다면 ‘서울의 봄’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대 충무로 방화시대를 경험한 몇 안 되는 현역 감독이다. 영화 ‘오발탄’(1960)에 충격 받아 유현목 감독의 제자가 됐고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 ‘베를린 리포트’(1992) 등 각색‧연출부를 거쳐 35㎜필름으로 촬영한 단편 ‘비명도시’(1993)로 연출 데뷔했다. 청춘영화로 히트하며 '비주얼리스트'로 주목받았지만, 2000년대 침체기가 길었다.

환갑에 천만감독 “영화는 젊은 예술, 변화해야”


영화 '비트'(1997)는 27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영화 대표 청춘영화로 꼽힌다. IMF와 세기말이 뒤엉켜 있던 1990년대 말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주인공 민(정우성)이 양 팔을 벌리고 오토바이를 타는 ‘질주의 이미지’는 방황하는 청춘의 아이콘이 되었다. 최근 재개봉한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상영된다.올 3월 극장 재개봉에 이어 춘천영화제에서 김성수 감독 초청 토크와 함께 상영됐다. 사진 춘천영화제
그런 그가 환갑이 넘어 천만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장르 감독으로만 인식돼온 그를 비평적으로 돌아보는 움직임도 최근 커졌다. 내달 4일 개막하는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무사’(2001) 4K 리마스터링 버전 최초 공개와 함께 ‘비명도시’, ‘태양은 없다’(1999) 등 김성수 감독 상영전을 갖는다.
“영화는 젊은 사람들의 예술”이라 말하는 김성수 감독을 영화제 현장에서 따로 인터뷰했다. “인간으로도, 영화감독으로도 하락기인 저는 정체되면 절대 안 된다. 생존법은 딱 하나, 변화하는 것”이라 그는 강조했다.

Q : -‘감기’ 땐 스스로 천만 영화 감독감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감기’는 투자‧시나리오까지 다된 밥에 들어가서 천만을 가로채고 싶었다. 그런데 감독으로서 컨트롤을 잘 못 했다. 누가 한마디 하면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어 잡탕 같이 됐다. 그 반작용으로 ‘아수라’는 내 생각을 밀어붙였다.”

Q : -‘서울의 봄’은 관객들의 심박수 챌린지, 현대사 다시보기 운동까지 벌어졌다.
“신군부 세력이 작당해서 호의호식하는 이야기가 분노를 일으킬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짜증 나는 것에 돈 낼 사람은 없지 않나. 그런데도 관객들이 호응해줬다. ‘보면 짜증 나지만, 너도 꼭 보라’고 권하는 영화가 됐다. ‘서울의 봄’ 같은 일이 우리 사회에도 있지 않나. 염증과 비판의식을 가진 분들이 공명해준 게 아닐까. 천만은 전부 관객의 힘이다.”


"범죄 현장 르포 사진처럼"…역동성 통했다


영화 '아수라'에서 경찰 도경(정우성, 사진)은 아내의 이복 오빠인 부패 시장 박성배(황정민)와 그를 쫓는 검사 김차인(곽도원) 사이에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다 점차 인내심을 잃고 폭주한다. 사진 CJ ENM
서울 토박이인 그는 단편 데뷔작 ‘비명도시’부터 도시에 전염병처럼 번져나가는 폭력성을 그렸다.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도시 뒷골목들을 사진에 담아 영화 콘티에 반영했다. 스크린에 생생한 현재성을 담아온 방식이 ‘아수라’, ‘서울의 봄’에서 한층 진화했다. 두 영화를 함께한 이모개 촬영감독은 “김 감독은 영화에 ‘에너지’를 찍는다”고 표현했다.

Q : -‘아수라’부터 연출 방식을 바꿨다고.
“현대영화는 진짜같은 날 것 느낌으로 가고 있다. ‘아수라’는 범죄 현장 르포 사진처럼 찍고 싶었다. 맹수가 서로 으르렁대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것처럼 모든 장면에서 움직이며 말하도록 했다. 역동적인 움직임 만으로 관계와 감정, 적대감이 표현됐다. ‘서울의 봄’ 때도 같은 방식을 썼다.”

Q : -30년 넘게 현역으로 살아남은 비법은.
“생존하려면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변화란 혼자서 안 된다. ‘아수라’ 때 나 자신이 투영된 작품을 찾는다는 마음에서 연출방식을 크게 바꿨고, 그런 변화가 ‘서울의 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모개 촬영감독 등 실험적·도전적 동료들이 함께했다.”


스승 유현목 계승한 현대판 '오발탄'


영화 '서울의 봄' 당시 김성수 감독이 직접 그린 주인공 전두광(황정민) 등장 장면 콘티 그림이다. 22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김 감독은 “시나리오 쓸 때도 막히면 그림을 그린다. 공간에서 인물을 움직여보면 생각이 풀린다. 그런 ‘그림 메모’를 영화 한 편에 몇 백 장씩 그린다”고 돌아봤다. 사진 김성수
김성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로 힘의 논리 속에 발버둥 치다 허망하게 패배하는 남자들이 꼽힌다. ‘비트’에서 “나에겐 꿈이 없었다”고 독백했던 정우성은 ‘아수라’에선 비리 경찰 도경이 됐고, 강직한 군인 이태신을 연기한 ‘서울의 봄’에선 전두광(황정민) 패거리의 폭주를 막지 못한다.
김 감독은 “나이를 먹을수록 남성 집단의 사리사욕과 패거리 문화를 더 비판적으로 보게 된다”면서 “희극이나 해피엔딩은 관심 없다. 책임감 있는 결정을 내리면 종결점이 더 근사해질 수 있는데 그렇게 정신 차리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영화 '서울의 봄' 촬영 당시 현장 비하인드 모습이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는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 가족의 비극을 그린 '오발탄'이 그에게 남긴 유산이다. 김 감독은 “‘오발탄’이란 제목 자체가 목적 없이 허망하게 쏘아진 총탄을 뜻한다. 어두운 밤 거리에서 목적지를 잃어버린 주인공의 ‘가자, 가자’ 하는 허망한 절규가 제 영화의 굉장히 큰 부분이 됐다”며 “욕망의 아귀 다툼이 끝나고 났을 때 깨닫는 허망함, 속절없음을 담은 영화가 좋다”고 말했다.
22일 춘천영화제에서 대표작 상영전을 가진 김성수 감독(왼쪽)은 스스로 386세대라 자칭하며, “처음 영화를 하던 시절엔 좋은 영화로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꿈궜다”고 말했다. 사진 춘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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