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 반격을 준비하다

오문수 2024. 6. 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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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기] 칠천량 해전 당시 도망간 배설의 전선 12척이 반격의 실마리가 되다

이순신 장군 해전 현장 탐사 대원들이 15일간 항해를 마친 후 쓴 항해기입니다. 1차 항해는 5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동방항로, 2차 항해는 6월 3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방항로로 15일간입니다. <기자말>

[오문수 기자]

 보성 비봉마리나 모습
ⓒ 오문수
 
1597년 7월 18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도원수 진영에서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었다. 도원수에게 자신이 직접 해안 지역을 돌아본 후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요청해 허락받은 그는 9명의 군관과 함께 현지로 출발했다.

삼가와 단성, 진주를 거쳐 7월 21일 노량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경상우우후 이의득 등을 만나 패전 상황을 듣고 안위의 전선에 묵으면서 대책을 논의했다.

일본군이 무섭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1597년 8월 3일)은 희망을 줬다. 군관 10여명과 함께 진주 이홍훈의 집을 출발한 그는 같은 날 구례현에 도착했다.

출발 이튿날인 8월 4일, 곡성에서 머문 그는 옥과, 순천, 낙안 보성 등을 지나며 장병 120명을 모았고 군량미도 얻었다.

열렬하게 환영받은 율리안나호 대원들

6월 4일, 고흥 소록도와 거금도를 잇는 거금대교 아래 절이도 해전 현장에서 고유제를 지낸 율리안나호의 다음 목적지는 보성 득량만에 있는 비봉마리나다.

보성 득량만에 위치한 '비봉마리나'는 세일링 요트, 래프팅 보트, 카약까지 여름 해양 레저 스포츠의 모든 것을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대원들을 태운 율리안나호가 약속시간인 6월 4일 오후 4시경에 비봉마리나 인근에 도착했지만 입항할 수가 없어 30분간을 기다렸다. 율리안나호 흘수선인 1.8m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비봉마리나 사무실에서는 보성군의회 임용민 의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일행을 환영하고 꽃다발까지 걸어줬다.

보성군과 관계가 깊은 이순신

보성은 이순신과 관계가 깊은 고장이다. 백의종군하다 칠천량해전의 참패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1597년 8월 9일, 군관 9명과 군사 6명을 이끌고 보성에 닿았다.

회령포에서 배설을 만나 전선 12척을 인수한 이순신은 보성에서 10일간 머물며 임금께 수군 재건과 해전 출정의 결의를 담은 장계를 올렸다.

"금신전선 상유십이 (今臣戦船 尚有十二)"
  
 보성 '열선루' 앞에서 보성군 관계자들과 기념촬영했다. 열선루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 장군이 보성에서 10일간 머무는 동안 임금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린 곳이다.
ⓒ 오문수
  
 이순신 장군의 처 방씨 부인의 친정인 방진관 모습
ⓒ 오문수
 
이순신이 장계를 올린 열선루에는 분명히 '전선 열두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헌데 시중에는 12척이아니라 13척이라는 논란으로 분분하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12척의 배에 화포를 싣고 나갔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쓴 글에도 "12척의 배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항복이 쓴 <충민사기>에는 13척으로 나와 있고 <선조실록>에도 13척으로 쓰여 있다. 기록마다 다르니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에 폐가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보성 비봉마리나 사무실에서 율리안나호 대원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보성군 관계자들 모습.
ⓒ 오문수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 대원들을 열렬히 환영해준 보성군 관계자들이 보성에서 나는 일등미를 선물해줬다. '득량'은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얻었다는 의미로 불린 이름이다. 율리안나호도 '득량'을 했다.
ⓒ 오문수
 
'득량(得糧)'이라는 말 자체는 '곡식을 얻다'라는 뜻이다. 이순신은 "조양창에서 군량미 6백석을 확보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했다.

보성은 이순신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로 재임할 당시 부인 방씨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다. 보성읍내에는 이순신의 부인 방씨가 살았던 '방진관'이 있다. 6월 5일 오전 9시 반, 비봉마리나를 출발한 율리안나호는 순풍을 타고 강진 마량항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오후 1시 20분, 회진대교를 통과해 노력도 인근 김양식장을 통과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배가 뻘에 얹혀 꼼짝할 수 없었다. 하필 오늘이 '사리'라서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시기란다.

율리안나호는 이른바 '좌주'를 당한 것이다. 좌초는 배가 암초 등에 얹힌 것을 말하고 좌주는 물이 얕은 곳의 바닥이나 모래가 많이 쌓인 곳에 배가 걸린 것을 말한다.
추가 달린 줄을 이용해 깊이를 재어보니 120㎝이다. 율리안나호 흘수가 180㎝이니 물이 들어올 때까지 꼼짝할 수 없다.
  
 율리안나호가 노력도 인근 양식장 뻘밭에 얹혀 좌주되어 3시간 40분 동안 꼼짝못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어선이 밧줄로 우리 배를 묶어 끌어내준 후 앞장서며 "우리 배가 간길로만 천천히 따라오세요"라며 앞장섰다. 고마운 분이다.
ⓒ 오문수
   
 강진 마량항을 떠나 완도로 향하던 율리안나호가 김양식장에 막혀 헤매고 있을 때 마량 해양경찰정이 달려와 길을 안내해줬다.
ⓒ 오문수
 
오후 5시가 될 무렵에 다시 바닷물이 들어올 때 지나가는 어선 한 척에 구원을 요청하자 밧줄로 묶어 뻘밭에서 끌어내 줬다. "아직 물이 덜 찼으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며 천천히 갈테니 우리 배가 지나간 뱃길로만 따라오란다. 참 고마운 분이다.
어두워진 시간에 강진 마량항에 도착해보니 정박할 곳이 없다. 할 수 없어 해양경찰의 양해를 얻어 바지선에 정박했다. 다음날 아침 강진 마량항을 출발해 월출산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는데 김양식장이 앞을 가로막았다.
  
 완도 신지도 인근에 있는 혈도 모습. 혈도는 구멍이 뜷린 섬이라는 뜻이다.
ⓒ 오문수
 
바다 깊이를 측량해보니 1.5미터쯤이라 도저히 통과할 수 없어 마량 해양경찰 담당자에게 연락했더니 "그쪽은 안 된다"며 "잠깐 기다리면 해경정이 길안내를 해주겠다"고 해서 해경정을 따라 무사히 완도쪽으로 빠져나갔다.
이번 항해 중 해양경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초행길이라 길을 몰라 양식장쪽으로 율리안나호가 방향을 틀면 VTS(해상교통관제)호 해상을 관제하던 관할해양경찰서에서 바로 무전이 날아오거나 전화가 와서 항로를 시정하도록 해줬다. 해양경찰의 친절한 안내와 보호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는 조원옥 선장의 얘기다.
  
 강진 마량항에서 율리안나호가 출항하기 전 스크류에 걸린 밧줄을 끊어 보여주고 있다. 조원옥선장은 매일 아침 출항전 스크류를 점검한다.
ⓒ 오문수
 
"해양경찰의 친절한 안내와 보호가 무척 고맙네요. 이번 여행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율리안나호가 김양식장 인근 뻘밭에 걸려 꼼짝할 수 없을 때 동아지도대표인 안동립씨가 "바다도 국토인데 지도에 양식장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건 문제입니다"라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이번 항해에서 여러 번 회항하고 좌주까지 당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로 강진만에서 완도항 방면으로 항해 계획을 짜고 마량항에서 숙박하고 강진만에 진입했는데 좌현 지역 전부가 해태 지주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중간 몇 군데를 열어두고 배가 다닐 수 있도록 했습니다.

헌데 해도를 보니 수심 1.5m로 우리 배로 통과할 수 없는 수심이었습니다. 해도에 어장 지역을 구분하여 출입금지 지역을 (X)자로 붉은색 사선을 그려주어야 합니다. 항해를 해보지 않은 해도 제작자가 이걸 고려하지 않고 강진만에서 완도항까지를 항해 가능지역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어장은 모두 허가구역으로 국가가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도상에 명확하게 표기하여 항해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동아시아는 세계적인 연안 양식 어업이 발달하여 항해자에게는 지뢰가 온 바다에 깔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해도 제작 기준에 어장 출입금지 구역이 없으면 기호를 새롭게 신설해 줄 것을 건의드립니다."
 
 율리안나호가 노력도 인근 김양식장 뻘밭에 얹혀 3시간 40분 동안 꼼짝할 수 없게 되자 동아지도 대표 안동립씨가 방위각과 지도보는 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오문수
 
 
 서쪽 연안 항로에는 양식장이 엄청나게 많아 초행길인 대원들이 힘들었다.
ⓒ 오문수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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