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방자호'...첫 국산열차에 이런 이름 붙은 까닭은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KTX-청룡’.
지난 4월 1일 KTX 개통 20주년 기념식에서 차세대 고속열차(EMU-320)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청룡의 해에 탄생한 국내 최고 속도의 고속열차로, 보다 높고 화려하게 비상하는 열차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게 코레일의 설명인데요. 참고로 KTX는 한국고속철도(Korea Train eXpress)란 뜻입니다.
125년 전 경인선 철도 개통 이후 우리 철도 역사 속에는 다양한 열차 이름이 등장합니다. 우선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 구간을 달린 첫 증기기관차는 명칭이 ‘모갈(Mogul) 1호’인데요. 일본식 호칭은 '모가'입니다. 미국에서 수입한 증기기관차로 '엄청난 크기의 사물'이나 '거인'이란 뜻인데요. 당시 사람들에겐 생소하고, 두렵기까지 한 거대한 증기기관차의 이름으로 걸맞은 듯합니다.
기관차가 아닌 우리나라 열차에 이름이 붙은 건 '융희(隆熙)호’가 최초인데요. 1908년 부산~신의주 구간을 오가기 시작한 직통 급행여객열차에 사용됐습니다. 융희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쓰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연호입니다. 당시는 부산에서 신의주로 올라가는 열차를 '융'이라 칭하고, 신의주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열차를 '희'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융희호 이후 일제강점기 열차 이름은 모두 일본어였습니다. 히카리(빛), 노조미(희망), 아카쓰키(새벽) 등이 대표적인데요. 철도사 전문가이자
「기차가 온다」
(지성사)의 저자인 배은선 전 철도박물관장에 따르면 당시에는 특별한 열차에만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우리말로 된 열차 이름이 다시 등장한 건 광복 직후인 1946년이었는데요. 바로 ‘조선해방자호’입니다. 해방 직후 우리 철도의 현실은 실로 열악했다고 하는데요. 일본인 기술자들이 모두 돌아간 탓에 인력과 장비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처음엔 열차 운행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산제작소에서 우여곡절 끝에 자체 기술로 만들어낸 증기기관차가 '해방자 1호'였고, 이 기관차에 객차와 식당차 등을 연결해 경성과 부산을 오간 특별 급행여객열차의 이름이 '조선해방자호' 였습니다. 새로운 조국을 열어간다는 해방감과 주체적으로 철도를 운영해 나갈 수 있다는 자부심이 더해진 명칭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조선해방자호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한 열차 이름은 '서부해방자호' (1948년)였다고 하는데요. 서울과 목포를 잇는 급행열차에 붙은 명칭입니다. 조선해방자호는 경부선, 서부해방자호는 호남선 열차인 셈입니다. 이듬해 서부해방자호는 지금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무궁화호'로 이름이 바뀌는데요.
무궁화호는 1960년엔 경부선 특급열차에 사용되다가 1980년 전국 모든 급행열차에 적용되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코레일에 따르면 무궁화호란 이름은 전국 방방곡곡에 피는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처럼 호남선, 경부선 등 전국을 누비는 열차를 뜻한다고 합니다.
열차 이름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는데요. 월남전 파병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는 맹호, 청룡, 십자성호 같은 파병부대 이름을 따서 지은 열차가 많았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던 1970년대에 '새마을호'란 열차가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풍년, 증산, 통일, 협동, 약진 등의 명칭도 보입니다.
이렇게 다소 중구난방이던 열차 이름은 1980년에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하는데요. 모든 여객열차를 등급별로만 구분해서 새마을호, 우등, 특급, 보급, 보통의 5단계로 나누게 됩니다. 이어 1984년부턴 우등은 무궁화호, 특급은 통일호, 보통은 비둘기호로 바꾸는데요. 이 중 비둘기호는 2000년 11월에 사라지게 됩니다.
2004년 KTX 개통과 함께 새로운 열차 이름들이 등장하는데요. 2세대 KTX이자 국산기술로 개발한 'KTX-산천'이 대표적입니다. 우리 금수강산과 푸르른 자연을 뜻하는 한편 외형 디자인의 모티브가 된 토종물고기인 '산천어'처럼 날렵하고 힘차게 뻗어 나가는 한국형 고속열차란 의미도 지닙니다.
최대 시속 260㎞대의 준고속열차인 KTX-이음은 ▶사람과 사람을 잇고 ▶세계를 잇고 ▶지역을 잇는다는 의미입니다. ITX-청춘은 말 그대로 꿈과 열정이 있는 젊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청량리와 춘천을 잇는다는 뜻도 있다고 하는데요. 참고로 ITX는 도시와 도시를 빠르게 잇는 급행열차(Intercity Train eXpress)를 말합니다.
ITX-새마을은 기존 새마을호의 이미지를 승계한 것이고, ITX-마음은 승객의 설레는 마음을 품고 달리는 열차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합니다. '누리로'는 누리(세상)를 달린다는 뜻이고, 호텔식 고급 관광열차인 '해랑'은 해와 함께라는 의미라네요. 이처럼 우리 철도 역사 속에 등장했고, 또 지금 불리는 다양한 열차 이름의 의미를 알고 기차여행을 하게 된다면 좀 더 뜻깊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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