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이 왜 의대 안 가고 공대 가냐"…이공계 인재가 마주한 현실
“1990년 고3 때 담임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모의고사 성적이 들쑥날쑥하니 네가 원하는 공대나 화학과보다 합격선이 더 낮은 의예과에 지원하라’고 하셨습니다. 전 재수를 해 수능을 다시 치렀고, 이듬해 우리나라 여학생 중 전체 수석을 해 공대에 진학했습니다. 이후 공대 위상이 점점 낮아졌고, 사람들이 ‘그 좋은 성적으로 왜 의대를 안 갔느냐’고 묻더군요.”
손지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기획조정본부장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공계 지원 특별법 개정 토론회’에서 경험을 공유하며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의사가 되려는 이유를 살펴보면, 돈을 벌면서 일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고급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좋은 요소”라며 “반면 이공계 출신들은 직업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고, 인류와 사회에 기여하는 연구를 하면서도 자긍심을 느끼기 쉽지 않은 구조”라고 꼬집었다.
박충권 국민의힘 의원 주최로 열린 이 날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한국의 과학기술 분야를 선도할 이공계 인재 양성 방안을 논의했다. 박 의원은 22대 국회 개원 첫날이던 지난달 30일 ‘이공계 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국민의힘 1호 법안으로 발의했다. 이공계 지원 특별법은 정부가 우수 이공계 인력의 양성·활용을 지원하기 위해 2004년 제정됐으나, 급변하는 인재 육성 환경 변화와 이공계 인재 부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학령인구 부족한데 의대 쏠림 심화
참석자들은 최근 의대 증원에 따른 인재 쏠림 현상을 우려하면서도 이공계 인력 부족의 근본 원인은 따로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 외환위기(IMF) 사태와 금융위기를 겪으며 연구 인력의 직업 안정성이 낮아졌다는 것이 요인이다.
손 본부장은 “연구기관에서는 임금피크제 적용이 시작됐고, 사기업은 연구 인력 중심으로 명예퇴직을 실시했다”라며 “연구자를 전문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자들조차 연구자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에 자부심이 하락하니 기회만 되면 이탈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공계 인재 감소는 한국의 기술 경쟁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인공지능(AI) 분야는 2027년까지 6만6000명, 반도체는 2031년까지 12만7000여명, 바이오는 2028년까지 1만2000명의 인재가 필요하다. 손 본부장은 “전략기술 분야의 인력 부족이 심화하고 있으며 이는 향후 국가 경쟁력 퇴보로 직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공계 기피 현상을 줄이기 위해 ▶이공계 인재에게 다양한 성장 경로 제시 ▶보다 많은 양질의 일자리 제공 ▶연구직 직업 매력도 제고 ▶과학기술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기술이 급변하는 만큼 기초과학 연구의 중요성이 강조돼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토론에 참석한 유재준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학장은 “현재의 인터넷이나 소프트웨어 기술은 30~40년 전 미국에서 기초 과학 연구를 통해 개발됐다”며 “미래 유망 기술을 단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초 과학 연구를 포함해 장기적 관점의 폭넓은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승병 한양대 겸임교수는 “전략적으로 어떤 분야에만 집중하기보다 중요한 분야에서 적더라도 골고루 인재를 양성하면 AI의 지원을 받아 국가 지식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스타이펜드’ 지원 필요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성원씨는 “이공계에 진학하더라도 안정적으로 미래를 그릴 수 있다면 최상위권 학생들이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체계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가 제안한 지원책은 스타이펜드 제도 명문화다.
이번에 발의된 이공계 특별법 개정안에는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에 참여하는 이공계 대학원생에게 매달 80만~110만원을 지원하는 연구생활장학금, 이른바 ‘한국형 스타이펜드’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다.
홍순정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미래인재정책국장은 “기존 이공계 특별법은 20년 전 제정돼 현재 위기 상황에 맞는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며 “장학금 지원으로 이공계 진학을 촉진하고, 연구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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