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창녀 사이…보들레르의 사랑법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6. 2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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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잔 뒤발
마네, 소파에 기댄 보들레르의 연인 잔 뒤발, 캔버스에 오일, 90×113㎝, 1862년.
마네가 그린 여자 중 기이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다. 통상적인 시각으로는 전혀 아름답다고 볼 수 없는, 부풀린 풍선 같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초상. 아니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얼굴이라고 할 것조차 없는 얼굴을 가진 여자, 빨리 시선을 피하게 되는 분위기의 여자 그림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샤를 보들레르(1821~1867년)의 연인 잔 뒤발(1820년경~1862년)이다. 보들레르는 자기 연인을 이렇게 그린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실 보들레르는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 미술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악의 꽃’을 출간하기 전 ‘1845년의 살롱’이라는 미술비평으로 먼저 데뷔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들라크루아, 쿠르베, 마네 같은 화가와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특별히 11살 연하 마네가 보들레르를 추종했는데, 그래서인지 보들레르는 마네가 매년 살롱전에서 낙방하자 앞으로 마네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격정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마네 역시 보들레르의 시를 애송했고, 그가 주창하는 ‘순간성’ ‘일회성’에 근간한 현대성(modernity)의 삶을 작품 속에 담으면서, 모던보이의 길을 걸었다.

그런 마네가 보들레르의 연인 잔을 왜 이렇게 거칠고 추하게 그렸을까?

먼저 잔과 보들레르의 관계부터 추적해보자. 프랑스 식민지 아이티 출신 잔은 매춘부 어머니에게서 흑백 혼혈로 태어나, 파리에서 단역배우와 무희로 활동했다. 보들레르는 유명한 사진가 나다르의 정부기도 했던 잔을 21세에 만나, 그녀가 죽을 때까지 14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보들레르의 친구들은 변덕스러운 성격과 문란한 행실, 배신과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는 그녀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사실 그녀는 뻔뻔한 거짓말쟁이에, 엉큼하고, 방탕하며, 무식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그럼에도 친구이자 시인 테오도르 드 방빌은 “고상하고도 동물적인 데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까만 피부, 까만 눈동자, 까만 머릿결이 ‘찢긴 유년’의 체험을 지닌 보들레르를 동물적으로 사로잡았다”고 표현했다.

마네의 그림 속 잔의 모습은 낯설고 경망스럽다. 뭉개진 코, 얇은 입술,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 눈은 탁한 안색과 더불어 인색해 보이는 표정에 한몫을 더한다. 게다가 얼굴만큼 큰 손, 뻣뻣해 보이는 다리와 작은 발, 그리고 이런 디테일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드러난 부풀린 치마와 뒷배경의 모슬린 커튼이다. 어쩌면 마네에게조차 잔이 치마폭처럼 부풀려진 존재 혹은 베일처럼 알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 것은 아닐까.

보들레르는 이 그림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추측건대 꽤 맘에 들어 했던 것 같다. 이 그림을 그려준 이후 두 사람 우정이 더욱 돈독해졌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들레르는 자신의 저작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화가로 콩스탕탱 기스라는 삽화가를 소개하면서, 그의 그림을 마치 최고의 그림인 것처럼 찬사를 보냈다. 사실 기스의 그림은 전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조잡한, 빨리 그려진 삽화 같은 그림이다. 현대적인 그림이란 대상을 순간성과 일회성으로 단번에 파악해내어 신속하게 그려내는 것이라고 설파했던 보들레르의 발상과 딱 떨어지는 그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들레르는 성의 없이 대충 그려진 것처럼 보이는 마네의 이 그림도 충분히 인상적이며, 현대성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엄청 좋아했을 것이다.

어찌하여 보들레르는 평생 어리석고 탐욕적이며 타락한 창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영감의 근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방빌의 말처럼 보들레르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찢긴 유년’을 봤던 것일까?

보들레르는 파계한 성직자 출신 60세 홀아비와 무일푼 26세 고아 처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마추어 화가로도 활동할 만큼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는 늦둥이 아들이 고작 6살일 때 사망했다. 모친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권위의식이 몸에 밴 육군 중장과 재혼한다. 보들레르는 법적인 청년이 된 21살 때, 십만프랑이 넘는 상당량의 재산과 4군데 땅을 상속받았지만 2년 만에 절반가량을 탕진해버린다. 엄마와 의붓아비가 소송을 제기해 한정치산자로 선고받고 유산의 극히 일부분만 쓸 수 있게 되고 이후 평생 가난에 허덕이게 된다.

나다르가 찍은 잔 뒤발, 나다르의 정부였을 때 찍은 것으로 추정.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보들레르와 잔의 관계

보들레르가 잔을 만난 것도 유산을 흥청망청 쓸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잔에게 끊임없이 구애하지만, 사랑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다. 교묘하게 구애를 거절하면서도 끊임없이 재산을 챙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의 사랑은 전폭적이었는데, 30대에 중풍이 올 만큼 방탕한 생활을 했던 그녀에게 구애의 시를 바치기도 한다. 마침내 40대에 들어 잔이 입원하자 평생 병원비를 대고 간병인을 댄다. 어느 날 보들레르의 눈앞에서 사라진 뒤발이 중풍으로 고생하다 알코올 중독자가 돼 요양원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 시인으로서 그의 생명도 끝이 난다. 사랑하고 증오할 대상을 잃어버린 시인은 산책길에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실어증까지 와 병원에서 1년여 고생하다 46세로 사망한다.

이처럼 잔과 보들레르의 관계는 가학적이면서도 피학적인 관계였다. 잔은 먹이를 앞에 둔 육식동물처럼 보들레르를 갉아먹었고, 그는 그녀에 대해 “죄악이면서 그 죄악을 벌하는 지옥이기도 한 여자”라고 했으니 말이다. 프로이트는 창녀를 사랑했던 보들레르의 사정에 대해 ‘매춘부를 좋아하는 심리’라는 작은 논문을 통해 얼마간 유용한 해석을 던져준다.

프로이트는 보들레르가 유년 시절 목도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러니까 아버지보다 무려 34세나 어린 모친, 그것도 너무 가난해서 늙어 빠진 홀아비와 결혼한 엄마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돈을 타내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사치를 위해 늙은 남편에게 갖은 아양과 교태를 떨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린 보들레르는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내내 보고 자랐을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의 이중적인 태도, 즉 아버지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달라지는 태도, 어린 아들에게 무심코 내뱉은 부친에 대한 험담과 푸념 등 아버지를 대하는 어머니의 모순적인 태도 등을 목도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머니의 때 이른 재혼, 즉 젊고 배경 있는 남자와의 결합 역시 보들레르에게 여성이란 믿을 수 없으며 사악한 존재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깔리게 하는 기제가 됐을 테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당신을 열렬히 사랑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쓴 편지처럼 그에게 어머니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연인이었다. 이처럼 보들레르와 모친의 관계는 생애 내내 매우 친밀하고도 복잡한 애증의 관계였다. 그러니 잔에게서 유년 시절 형성된 모성상이 투영됐을 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온갖 거짓과 술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사악한 여자들 말이다.

이런 사유 속 보들레르에게 잔은 지옥의 쾌락을 들이마시게 한 ‘악의 꽃’이었다. 보들레르가 “너는 내게 진흙탕을 줬고, 나는 그것으로 황금을 빚었다”고 말할 만큼!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4호 (2024.06.19~2024.06.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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