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년 전 전기차 그렸다…'2000년대' 딱 맞춘 만화계의 예언자
‘제2 전성기’ 맞은 원로 만화가 이정문
벽돌 크기의 휴대전화기에 뜬 화면을 보면서 소년이 “빨리 와”라고 말한다. 전기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공해가 없지요”라며 만족해한다. ‘움직이는 도로’ 위에 두 아이가 서 있고, 로봇은 청소를 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있다.
요즘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약간은 1980~90년대를 연상시키는 듯한 묘한 장면들이다. 그런데 이게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에 그려진 만화라면? 원로 만화가 이정문 화백이 군 제대 직후인 1965년에 그려 어린이 잡지에 실은 ‘서기 2000년대 생활의 이모저모’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휴대전화, 무빙 워크, 전기자동차, 원격강의·원격의료 등의 아이디어가 한 장의 종이 위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정작 이 화백은 이 그림을 그린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한다. 2005년에 친구가 “네 작품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어. 빨리 저작권 등록부터 해”라며 프린트를 해 왔다고 한다. 이 작품이 디지털 공간에서 회자되면서 이 화백은 뒤늦게 ‘제2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기업체·공공기관·학교 등에서 특강 요청이 이어진다. 잡지 연재도 시작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먼 미래를 갔다 온 듯한 이 기막힌 상상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궁금증을 안고 원로 화백이 자택 겸 작업실로 쓰는 경기도 용인의 아파트를 찾았다.
평생 신문 꼼꼼히 읽고 스크랩 해와
‘서기 2000년대의 생활의 이모저모’ 작품 원본이 어디 있는지 묻자 이 화백은 “모르죠. 어디엔가 있는 건지 없어져 버린 건지”라며 웃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친구가 프린트 해 온 것을 보고 새로 그린 거다. 원본은 흑백인데 색깔도 넣고 보정 작업도 좀 했다. 그는 “이 녀석 덕분에 제가 뒤늦게 떴죠. 저작권료도 짭짤하게 들어오고,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도 있고요”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아모레퍼시픽 연구소에 가서 “바쁜 출근시간에 기초화장부터 눈 화장, 입술까지 1~2분 안에 동시에 할 수 있는 마스크팩 같은 제품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를 해 줬는데 현재 개발 중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LG전자는 휴대폰 생산을 중단하기 얼마 전에 그를 초청했다. LG가 휴대폰 사업을 접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연단에 선 그는 “LG 휴대폰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이미 시장을 선점한 삼성 제품 때문에 2등밖에 할 수 없다. 군대에서 ‘기준’을 잡는 병사를 중심으로 ‘좌우로정렬’ 하듯이, 아이디어를 선점해서 그 분야의 기준이 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뉴 프런티어가 돼야 한다는 뜻”이라고 얘기해줬다.
만화 속 ‘휴대폰 아이디어’는 이 화백의 어린 시절 경험들이 겹쳐진 것이다. 6·25가 터진 뒤 피난을 못 간 초등학생 이정문은 군인들이 무전기로 통화하는 걸 신기하게 쳐다봤다. 전쟁이 끝난 뒤 60년대 중반 TV가 귀하던 시절, 김일 레슬링 중계를 TV가 있는 집 문밖에서 눈동냥으로 보면서 그는 ‘저 화면을 우표딱지만 하게 줄여서 무전기에 딱 붙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상을 했다. 그야말로 만화 같은 얘기니까 만화로 그린 건데 수십 년 뒤에 현실이 됐다,
무빙 워크 개념도 전쟁통에 만들어졌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당시 중앙청 앞에 탱크가 지나가는데 무한궤도(캐터필러)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저걸 쫙 펴면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앞으로 나가겠다’고 상상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은 기역자 모양으로 꺾인 국방색 손전등을 기억할 것이다. 이 화백은 건전지로 작동하는 이 손전등을 보고 전기자동차 개념을 떠올렸다. 충전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그는 커다란 건전지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나오면 매연도 줄이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원격의료·원격학습 아이디어에 대해 이 화백은 “아픈 사람이 병원에 가지 않고도 의사가 집에 있는 환자에게 ‘너 어디 아프니’ 묻고 환자가 증상을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고, 같은 방식으로 학교 가기 싫은 아이가 집에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공상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컨대 과학적 배경지식이나 엄청난 통찰력보다는 ‘이런 세상이 오면, 이런 장치가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사항을 그려낸 게 맞아떨어졌다는 거다. 그는 “아무리 허황된 생각이라도 그걸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끈기가 필요하고, 학교나 사회에서도 그걸 비웃지 않고 북돋아주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 세계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뭔가 재료가 있지 않았냐고 묻자 이 화백은 “신문을 꼼꼼히 읽고, 스크랩 하고, 기사의 요점을 노트하는 걸 평생 거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낡고 커다란 신문 스크랩 뭉치들을 들고 나왔다. 거기에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1976년 10·26 사태) ‘미국이 테러 당했다’(2001년 9·11 테러) 등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의 기사와 사진, 시커먼 제목이 담긴 1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펜을 들 힘 있는 동안은 만화 그릴 것”
일본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광복 직후 국내로 들어왔다.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부친이 일본으로 간 사이 6·25가 터졌다.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이정문은 구두닦이·신문팔이 등을 하며 시련의 세월을 보냈다. 인왕산 아래 살면서 밤하늘에 가득한 은하수를 보며 온갖 상상을 했고, 그걸 만화로 그려냈다. 경희대 상학과 1학년 때 잡지 ‘아리랑’ 만화 공모전에 뽑혀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 화백의 대표작은 ‘심술통’이다. 심술궂은 얼굴로 사람들을 골탕 먹이는 주인공인데, 공연히 그러는 게 아니다. 못된 짓을 하거나 질서를 어기는 사람을 나름대로 응징하는 것이다. 심술통의 탄생 배경을 이 화백이 들려줬다. “구두닦이 초년병 때 서툰 솜씨로 열심히 구두를 닦았는데, 손님이 구두통을 발로 차면서 ‘시로도(초보) 아니냐’며 갑질을 했다. 이런 사람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하는 캐릭터를 만든 게 심술통이다.”
‘철인 캉타우’도 이 화백의 역작이다. 일본의 ‘마징가 Z’나 ‘철완 아톰’에게 우리 청소년들이 혼을 뺏기는 걸 보면서 조선시대 철퇴를 들고 있는 ‘국산 로봇’을 만들었다. 이 화백은 “종이에 만화를 그리는 시절은 저물었지만, 그 맥은 웹툰으로 이어지고 있다. 웹툰 공모전 심사를 해 보면 우리 젊은이들의 그림 솜씨와 스토리텔링이 정말 뛰어나다. 종이 만화 시장을 일본이 석권했다면 웹툰은 우리나라가 세계 정상에 설 것”이라고 자신했다.
고바우영감 김성환, 꺼벙이 길창덕, 삼국지의 고우영…. 유년의 기억창고에 남아 있는 정겨운 이름들이다. 캐릭터를 남기고 이 작가들은 떠났다. 한국원로만화가협회(회장 권영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화백은 “하나둘씩 친구들이 떠나고 지금은 모여 봐야 서너 명이다. 그래도 정신이 온전하고 펜을 들 힘이 남아 있는 동안은 세상에 웃음과 풍자를 던질 수 있는 만화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식탁에서 두 장짜리 ‘존엄한 죽음을 위한 나의 선언서’를 발견했다.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죽음이 임박했다면 일체의 연명 조치를 거부한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2014년 6월 27일에 작성했고, 해가 바뀔 때마다 날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두 번째 장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이 화백을 향해 심술통 가족과 캉타우 등이 작별인사를 하는 만화가 그려져 있다. “즐겁게 보낸 만화인생”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그를 향해 캐릭터들은 이렇게 인사한다.
“부끄럼 없는 만화” “오직 한 우물만 판 만화가!”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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