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한 지 1년 5개월... 이 병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이현우 2024. 6. 22. 18: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잘하고 싶어서 생기는 장비병, 실력이 나아지면 없어지려나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현우 기자]

취미 생활을 하다 보면 장비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복싱도 마찬가지다. 몸만 있다면 할 수 있다는 복싱은 옛말이다. 복싱을 시작한 지 1년 5개월 차다. 어느덧 복싱화 세 개, 글러브 두 개, 붕대 네 개, 헤드기어 두 개. 여기에 양말, 레깅스, 민소매 등 기타 필요한 의류와 잡화까지. 헝그리 정신이 웬 말인가. 럭셔리 복싱의 시대가 왔다. 얼추 계산해 보니 150만 원 정도가 된다. 취미 생활치고 검소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어마어마한 소비다. 

그동안 많은 운동을 취미로 해왔다. 그중 장기간 했던 취미는 농구, 유도, 복싱, 등산. 이중 복싱은 단기간 내에 내 주머니를 가장 많이 열게 했다. 복싱장에서 냈던 주먹 스피드만큼 돈을 쓰는 속도도 빨라졌다. 복싱은 삶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집의 일부도 되었다. 신발장 한 줄은 복싱화 칸이 되었고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는 늘 땀에 흥건히 젖은 복싱 의류가 놓여 있다. 옷장 한 칸은 붕대, 수건, 양말, 운동복이다.

복싱 카페만 가더라도 스파링 세트를 맞춰서 멋지게 운동하고 싶어 하는 복싱인들이 많다. 스파링 세트를 맞춘다는 건, 헤드기어와 글러브의 색깔이나 디자인을 맞추는 걸 뜻한다. 여기에 낭심보호대와 신발까지 색감을 맞추면 금상첨화가 된다. 특히 낭심보호대를 차고 스파링하는 이들을 보면 고대 전사의 결투를 보는 듯하다. 다행히도 난 낭심 공격까지 서슴없이 하는 상대를 만나지 않아 낭심보호대는 사지 않았다.

장비병은 이토록 무섭다

복싱을 하면서 장비병에 걸린 이유는 명쾌하다. 첫 번째,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실력을 아무런 노력 없이 상승시키는 방법이 바로 좋은 장비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지, 아무런 노력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떤 장비가 기능성이 좋은지 알아보고 고민하고 돈까지 쓰니, 어쩌면 굉장한 노력일 수도.
 
 복싱을 시작하고 벌써 두 개의 헤드기어를 구매했다.
ⓒ 이현우
 
보호력이 좋은 헤드기어를 사면 좀 더 용감하게 전진할 수 있다. 접지력이 좋은 복싱화는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체중을 실어 주먹을 뻗을 수 있도록 돕는다. 글러브와 붕대는 주먹을 좀 더 안전하게 보호해 줘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를 수 있게 한다. 낭심보호대는 스파링 할 땐 차보지 않았지만 색감 있는 낭심보호대는 뭔가 전사가 된 마법 같은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흔한 말로 전투력이 상승한달까.

이처럼 장비는 실제로 특정 영역에서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데 효과가 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캐릭터나 축구팀의 육각형 능력치를 보게 된다. 복싱 장비를 하나씩 착용할 때마다 손목 보호력, 공격력, 맷집, 스피드, 순발력, 간지력과 같은 능력치가 조금씩 상승한다.

장비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부족한 실력을 장비에서 찾는다. 장비가 좀 더 갖춰지면 최고의 기량을 뽐낼 수 있을 거라는 비겁한 변명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장비병은 이토록 무섭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패션'이다. 다른 취미의 영역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포츠 취미생활에는 패션 문화가 깊이 침투해 있다. 이는 타인에게 멋져 보이고 싶은 욕구가 취미 문화에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멋진 스포츠 의류를 입고 용품을 착용하는 것이 자기만족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관심받고자 하는 욕구와 닿아있다.

운동할 때 그 자체를 즐기는 게 최우선이다. 하지만 필자도 타인에게 멋져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패션 문화를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SNS에 올라오는 운동 피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취미 생활에 패션을 빼면 시체다.

등산을 취미로 즐기기 시작한 지 어엿 10년이 훌쩍 넘었다. 당시에는 주말에 산을 가더라도 20,30대 등산객 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산악연맹에서 모집하는 오지탐사대 선발전 같은 데에 가면 산을 좋아하는 청소년, 청년들이 많긴 했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풍경은 아니었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등산 유튜브와 콘텐츠가 유행을 끌었다. 이와 함께 등산 패션이 유행했다. 이는 단순히 산을 오르고 내리는 행위뿐만 아니라 등산 패션이 등산 문화에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을 뜻한다. 현대 스포츠 취미 문화에서 패션을 빼놓을 수 없다.

치료하지 않아도 되는 장비병

장비병이 왜 '병'이겠는가. 장비를 한번 산다고 이런 이름이 붙여지진 않았을 테다. 복싱화가 있어도 또 다른 복싱화를 사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또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게 장비병이다. 장비병을 치유할 수 없을까.

장비병에 걸리는 가장 큰 이유가 실력 때문이니, 일단 이론적(?)으로는 실력을 상승시킨다면 장비병을 치유할 수 있다. 장인은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 회피력 만렙인 메이웨더가 필자 같은 취미 복싱인과 스파링 한다고 헤드기어가 필요하겠는가. 실력이 좋으면 장비 탓을 하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장비병이 치유되지 않을까? 

문제는 내가 장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내 부족한 전투력을 상승시킬 장비를 찾는 데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게다가 이론은 이론일 뿐, 현실에서는 실력이 좋은 선수들도 고급 장비를 색깔별, 브랜드별로 구비한다.
 
 지금까지 구매한 복싱화들
ⓒ 이현우
 
필자는 복싱 1년 차가 좀 넘었을 때, 가지고 싶었던 복싱화를 큰 마음먹고 구매했다. 이후로 장비병이 치유된 느낌이다. 여전히 실력은 부족한데도 말이다. 어쩌면 장비병을 치유하는 방법이 가장 갖고 싶은 장비를 하루라도 빨리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다. 그러나 복싱을 하면 할수록 처음부터 비싸고 좋은 장비를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어쩌면 복싱을 잘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지닌 이에게는 반드시 찾아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복싱을 비롯한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자신의 신체에 적합한 장비가 있다. 발볼이 넓은 사람에게 맞는 복싱화 모델은 발볼이 좁은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 접지력에 특화된 복싱화가 있는 반면 발목 안정성과 가동성에 특화된 복싱화가 있다. 또한 자신의 체형뿐만 아니라 복싱 스타일에 따라 적합한 복싱화 모델이 다르다. 복싱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는 신고서 훈련해보지 않는 이상 자신에게 잘 맞는 복싱화를 알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본인의 복싱 스타일도 정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복싱을 사랑하는 이라면, 복싱을 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필히 장비병에 걸리게 된다. 머리 스타일이나 패션이 그렇듯, 자신에게 맞는 복싱화가 있다. 그걸 찾아내려면 여러 시행착오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물론 처음부터 고급 복싱화를 사서 신었는데 너무나 잘 맞을 수 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은 행운아다. 아내는 내게 처음부터 비싸고 좋은 걸 사라고 권유했다. 어느새 프로스펙스, 나이키 마초마이(중고로 받은 제품), 아식스 매트콘트롤, 찬스 복싱화, 나이키 하이퍼ko2가 신발장을 채웠다. 아내 말을 들을 걸 그랬나.

하지만 이 신발, 저 신발 신어보며 시행착오를 겪고 내 짝을 찾은 것과 같은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마치 인생의 반쪽을 찾은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장비병은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를 즐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단호히 말한다. 장비병은 병이 아니다. 치료할 필요가 없다.

장비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복싱을 비롯해 어떤 스포츠를 하든 실력이 정체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성실하게 꾸준히 체육관에 나와 훈련하는데 실력은 전혀 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일종의 슬럼프다. 이때 장비병이 요긴하다. 새로운 복싱장비를 사면 착용하고서 쉐도우도 해보고 싶고 스파링도 해보고 싶다. 장비를 사는 게 긍정적인(?) 동기 부여가 된다. 마치 장비병을 극복해야 할 질병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동기 부여로 활용하는 것이다.
 
 모든 장비를 갖추고 참가한 네번째 생활복싱대회
ⓒ 이현우
 
복싱계에서는 '돌고 돌아 위닝(위닝은 일본의 복싱용품 수제 브랜드)'이라는 말이 있다. 위닝을 사면 장비병이 치유된다는 진리를 담은 말이다. 주문했다는 걸 잊었다고 생각할 때쯤 도착한다는 위닝은 주문하면 평균 1년 정도 기다려야 한다. 1년이나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참 다행이다.

그런데 왜 나는 가끔 위닝 판매 사이트를 서성거리는 걸까. 그리고 또 왜 나는 간혹 일본에 방문하는 이에게 '위닝에 들러서 글러브와 헤드기어 좀 사주세요'라고 들리지 않게 되뇌는 걸까. 그렇다. 반쪽 같은 복싱화는 찾았는데 반쪽 같은 헤드기어와 글러브는 아직 손에 쥐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닝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손에 쥔다면 그때서야 장비 욕심은 사그라들까. 그 답이 궁금하다. 위닝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손에 쥐어봐야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장인이 되기에는 그른 것 같다. 복싱하는 내내 연장 탓이나 하면 새로운 연장이나 찾고 있으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계정(@rulerstic)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