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은 '조선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

오문수 2024. 6. 22. 15: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기] 발포만호에서 해전 승리의 기초를 닦다

이순신 장군 해전 현장 탐사 대원들이 15일간 항해를 마친 후 쓴 항해기입니다. 1차 항해는 5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동방항로, 2차 항해는 6월 3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방항로로 15일간입니다. <기자말>

[오문수 기자]

 발포진성 모습.
ⓒ 오문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연과 필연의 결과다."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말이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그는 우연히 배양기에 발생한 푸른곰팡이 주위가 무균상태라는 사실을 발견해 페니실린을 발명해 인류를 구했다.

세계를 움직인 역사에도 우연이 필연이 된 사건이 여러 개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우연한 사건이 필연으로 귀결된 결과다.

이순신의 수군 첫 부임지 발포진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동방항해(여수 – 부산)를 마치고 모항인 여수 이순신 마리나에 귀항한 날은 5월 28일. 여수를 떠난 지 일주일만이다.

귀항해 잠시 정비를 마치고 생필품을 보충한 후 출발한 서방 항로의 첫 기항지는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발포항이다.
  
 발포 선소 모습으로 문화유적지인데 안내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 오문수
    
 선소를 배경으로 발포주민과 기념촬영했다. 왼쪽에서 두번째는 고흥군문화해설사 황수연씨이고 네번째는 율리안나호 조원옥 선장의 사돈인 윤창만씨로 발포가 고향이다.
ⓒ 오문수
   
초행길이라 서툴기도 하지만 어민들이 연안에 설치한 양식장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고 뱃길 찾기가 어려워 애를 먹었다. GPS로 확인했을 땐 발포항 인근에 왔는데 항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여수항구 앞바다에 오동도가 있듯이 발포항 앞에도 오동도가 있었다. 옛사람들은 수군진을 만들 때 섬이 항구를 가려주는 곳에 설치했다. 파도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외적이 항구를 쉽게 찾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고흥에 수군진이 많았던 이유는 외적 침입의 길목이기 때문

항구 이름이 '발포'라고 불린 이유가 있었다. 마을을 안고 있는 산세가 승려가 경배를 드리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을 앞 포구를 일컬어 '중의 밥그릇'이라는 의미로 발포(鉢浦)라고 불렀다.

고흥에는 전라좌수영 산하 부대에 속하는 4개의 수군진(녹도, 여도, 발포, 사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흥양이라고 불렀던 고흥에 수군진이 많았던 것은 병선이 정박할 수 있는 포구로 적합했다는 것과 외적, 특히 왜구가 침입할 수 있는 주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흥양수군이 정예화되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1497년에 벌어진 녹도왜변 때문이다. 당시 왜구들이 녹도진을 공격해 녹도만호 김세진을 비롯해 군관 2인, 진무 5인, 군사 20명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 경각심이 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선조 20) 왜구가 손죽도를 침범해 이대원 장군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 수군 장수로서의 기틀을 닦은 곳

이순신은 1580년(선조 13년)에 발포만호로 부임했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은 '수군 장수가 되어 조선을 구하라!'는 하늘이 내려준 뜻이다. 그동안 육군만 경험했던 그가 수군 전투지휘관이 되어 바다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발포진성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오른쪽 교회 건물이 눈에 거슬린다. 교회 이전문제로 주민들간에 논란이 많다고 한다.
ⓒ 오문수
   
 마을 주민의 담장 아래 발포진성의 기단석이 보인다.
ⓒ 오문수
   
발포진은 세종 21년(1439년) 4월에 수군 만호진으로 승격되어 관방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후 성종 21년(1490년) 9월에 둘레 1360척, 높이 13척의 발포만호진성이 축조되었다.

발포진은 조선초기에는 대맹선 1척, 중맹선 3척, 소맹선 3척, 무군소맹선 4척을 보유하다가 전선으로 교체가 이뤄지면서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폐진 시까지 유지했다.

이순신과 오동나무 고사를 기념해 만든 '청렴광장'

이순신의 인물됨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그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나와 있다.
"좌수사 '성박'이 발포로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므로 공은 허락하지 않고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요. 또 여러 해 길러온 것이라 어찌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수 있을 것인가'라며 돌려보내자 수사가 크게 성내었지만 감히 베어가지는 못하였다."
  
 발포진성 뒤편에 있는 충무사에서 고유문을 읽고 이순신 장군 영정 앞에서 절하는 율리안나호 조원옥 선장 모습
ⓒ 오문수
  
 율리안나호 대원들을 안내하고 환영해준 발포 봉충회 박태환 회장이 발포진성 내 '청렴광장'에서 기념촬영했다. 박태환 회장이 밟고 서있는 돌들은 '청렴박석' 으로 이순신 장군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통해 만들어졌다. 바닥돌에는 '청렴과 정직'을 다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오문수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이순신은 보복성 징계를 받게되고 발포만호에서 파직을 당했다. 그러나 이와같은 투철한 책임감과 청렴함은 이순신이 장차 수군 최고지휘관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조선을 구해내는 초석이 됐다.

발포진성에는 '청렴광장'이 있다. 청렴광장은 이순신이 수군과 처음 인연을 맺었던 발포만호 부임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순신과 오동나무 고사를 바탕으로 '청렴'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명명했다. 바닥돌에는 '청렴과 정직'을 다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공간은 충무공의 발포만호 부임 연도(1580년)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전국의 시민들과 각급기관, 단체에 분양했던 1580개의 '청렴 박석(가로세로 23cm,높이10cm)'과 그 외 기부 등을 포함해 총 6237개의 바닥돌로 이루어졌다.

이순신은 발포만호로 근무하면서 바닷길, 인맥, 지역 실상을 파악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전라좌수사로 승진한 이순신은 관할인 5관(여수, 순천, 광양, 고흥, 보성), 5포(방답, 녹도, 여도, 사도, 발포)의 수령들과 쌓은 인맥을 잘 활용했다.

파직 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됐다. 일본수군과 전투할 때 이순신장군 옆에는 흥양에서 인맥을 쌓았던 기라성같은 장수들이 포진했다.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 백전노장 정걸, 흥양현감 배홍립, 사도 첨사 김완, 사도첨사 진무성, 발포진 임시만호 였던 나대용 등의 장수 들이 이순신을 보좌했다.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부터 8월 24일까지 크고 작은 접전 끝에 왜선 330여 척을 격파했다. <이충무공전서> 2권에 기록된 임진초 4대 해전 사상자 수는 모두 216명으로 흥양현 출신이 131명에 달해 전체의 반이 넘었다.
  
 요트항해가 주는 멋진 사진이다.
ⓒ 오문수
   
 발포항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활개바위 모습
ⓒ 이효웅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나라를 구한 기틀은 발포만호에서 비롯됐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이라는 우연은 구국의 영웅 탄생이라는 필연으로 귀결됐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