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는 DJ와 함께 역사 만들어간 기획자"

조종안 2024. 6. 2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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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생애사진 전', 군산 리오카페에서 7월 4일까지 전시

[조종안 기자]

 군산에서 열린 세 번째 ‘DJ 생애사진전’ 기념사진(2023년 6월 9일)
ⓒ DJ군산기념사업회
 
필자는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마을(다음카페)'을 운영해 오고 있다. 카페 개설 후 '김대중(DJ) 정신' 계승·구현을 위해 관련 단체에서 제공받은 사진과 직접 촬영한 사진을 모아 'DJ 생애사진전'을 세 차례(2015, 2018, 2023) 개최하였다. 2023년 2월에는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김대중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DJ 군산기념사업회)'를 구성했다.

올해는 김대중(1924~2009)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다큐영화(<길위에 김대중>) 상영을 비롯해 도서출간, 사진전, 토론회, 음악회 등이 전국 각지에서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필자는 지난 1월 DJ 발자취가 오롯이 느껴지는 네 번째 '생애사진전'을 전북 도청에서 열었으며, 이번(6월 5일~7월 4일)에는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전'을 준비하였다.

전북에서 처음 열리는 '이희호 생애 사진전'
 
 이희호 여사 다섯 살 때 모습(왼쪽)과 이용기 선생 젊었을 때 모습
ⓒ 조종안
 
위는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전 전시장(군산 우체통거리 '리오카페')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 액자는 이희호(1922~2019) 여사 다섯 살 때 모습이다. 인천에 거주할 때(1927년경) 어머니가 손수 지어준 옷을 입고 동생(영호)과 함께 찍었다고 한다. 오른쪽 액자는 이용기(이희호 부친) 선생의 젊었을 때 모습과 그가 1918년에 받은 세브란스병원 인턴 수료증이다.
이희호 생애사진전은 전북에서 처음 열리는 전시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런지 준비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나타냈다. 고향, 출신학교, 결혼 전 활동, DJ와 결혼하게 된 배경 등 질문도 다양했다. 그중 최종 학력 질문이 많았다. 이에 대해 서울대와 이화여대 두 곳을 졸업했고, 미국유학 다녀온 1세대 여성인권운동가였다고 하면 모두 놀라워했다.
 
 김대중 이희호 신혼 시절
ⓒ DJ군산기념사업회
 
이희호는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0년 이화고녀 졸업하고 이듬해 이화여전(이화여대) 문과에 입학한다.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한다. 1956년 미국 램버스 대학에서 사회학 수학하고 1958년 스카릿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취득한다. 귀국 후 이화여대 강사, 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1962년 김대중과 혼례를 올린다.

이희호는 탄압받는 야당 정치인 DJ와 결혼 후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신혼의 달콤함을 누리지도 못한 채 민주화 투사의 동반자가 됐던 것.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때는 직접 찬조 연설에 나서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 만약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민주화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보여준다.

이희호, '여사'보다 '선생님'으로 부르고 싶어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전 리플릿1
ⓒ 조종안
 
위는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전(부제: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팸플릿이다. 특별기획전을 주도한 김규영 DJ 군산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은 이희호 여사 발자취에 맞도록 <격동의 땅: 따스한 유년과 불타는 향학열> <교수의 길이 아닌 YWCA 활동가의 길> <어둠의 시절: 멈추지 않는 투쟁> <푸른 기와집 그리고..> 등 네 개 테마로 편집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은 "사진전 부제는 이희호 여사 자서전(<동행>)에서 가져왔다"며 "김대중과 '동행'하는 삶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고난과 영광이 정신없이 오가는 회전무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이 희생하는 자리에 놓였다는 뜻은 아니다"고 강조한다. 이 여사는 역사(무대)를 DJ와 함께 만들어간 능동적인 기획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이희호는 누구의 아내이기에 앞서 여성인권 운동가로, 사회 활동가로, 충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셨던 분이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함으로써 시너지 효과가 큰 것은 맞다. 그럼에도 나는 '이희호 여사'가 아니라 '이희호 선생님'으로 부르고 싶다. 최근 이해동 목사와 이종옥 여사님을 두 차례 뵌 적이 있는데 그분들도 계속 '우리 이희호 선생님께서'라고 하셨다."

김 위원은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이희호 여사(선생)의 활동을 부각하고 싶었다"며 "어떤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그는 농담도 잘 하는 재치있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당시) 평양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춤추는 사진을 자꾸 보게 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이희호 생애사진전 특징은 DJ 어록이 담긴 서예작품 두 점(김부식 작)과 마지막 연설 모습이 담긴 초상화 한 점(이동근 작)이 전시됐다는 것. 군산 방문 사진을 비롯해 이 여사의 유년 시절, 대학 시절, 경교장(김구 선생 거주지) 방문사진, 미국 유학시절, 여성운동가 시절 모습, 결혼사진 등 이희호 여사의 삶이 묻어나는 흑백사진 20여 점을 전시해서 관심을 끈다.

1세대 여성인권운동가 '이희호의 삶'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전 리플릿2
ⓒ 조종안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전 리플릿3
ⓒ 조종안
 
기록에 따르면 이희호는 모태신앙 기독교인이며 DJ는 1956년 장면 박사를 대부로 세례 받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희호는 사회운동으로 DJ는 정치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일제 식민치하와 광복,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세대이며 민주주의 가치를 신봉한다는 것. 또한 군사독재정권이 사라지고 민주 정부가 들어서는 꿈을 품은 점이 같았다.

DJ는 1971년 대선 실패 후 출국한 상태에서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하지 않고 해외에서 활동 중 동경에서 납치되어 동교동에 연금된다. 이후 1976년 3.1민주구국 선언과 전두환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구속, 구금이 이어지는 동안 이희호는 DJ의 내조자로 감시와 탄압을 함께 받는다. 연금과 옥살이, 사형수의 아내로 숱한 고난을 감내했던 것. 1980년 사형선고 확정 뒤에는 구명운동에 나섰으며 이때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DJ를 미국으로 추방한다. 이때도 이희호는 DJ와 함께 출국, 타의에 의한 망명자가 된다. 1985년 총선 앞두고 귀국한 DJ는 다시 동교동에 연금된다. 2년 후 연금에서 풀려난 DJ는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연거푸 실패하고 1993년 영국으로 출국한다. 이때도 이희호는 DJ와 동행한다. 이후 DJ는 1997년 12월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전 리플릿4
ⓒ 조종안
 
1998년 2월 영부인이 된 이희호는 장애인, 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 소외계층을 보살피고,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 늘어나는 걸식 아동과 실직가정을 돕기 위해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을 만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2009년 8월 DJ 서거 후에도 재야와 동교동계의 정신적 지주로 중심을 잡아 왔고, 2019년 6월 서거 직전까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자리를 지키며 대북 사업을 뒷받침해 왔다.

결혼 전엔 저명한 사회운동가였고, 결혼 후 탄압받는 야당 정치인의 동반자이자 동지로 고초를 겪었으며 칠순을 넘긴 나이에 영부인이 되어 활동해 온 이희호 이사장. 그는 미국 교회 여성연합회 '용감한 여성상', 미국 캘리포니아주 '이 해의 탁월한 여성상', 무궁화대훈장, 펄벅 인터내셔널 '올해의 여성상' 등 인권과 여성문제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다수의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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