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이 김건희법이 되어버리는 '매직'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김시연 기자]
▲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지난 2015년 3월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 다산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최초 발의했던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의 수수 금지법)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날 김 전 위원장은 국회에서 통과된 '김영란법'에 대해 "이 법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오래된 관행과 습관, 문화를 바꾸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단순히 형사법적인 처벌문제에 집착하기보다 근본적으로 부패문화를 바꾸는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
ⓒ 유성호 |
"금품 공여자들에게 법을 회피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답변입니다. 김건희 사건이 직무관련성이 없으면 공직자 배우자에게 금품을 줘도 된다는 모범적인 사례가 돼 버린 거죠."
지난 20일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 '청탁금지법 질의응답'에 대한 장동엽 참여연대 선임간사의 쓴소리입니다.
참여연대는 지난해 12월 최재영 목사에게 300만 원 상당의 명품 백 등을 받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등 위반 혐의로 권익위에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권익위는 지난 10일 '대통령 배우자를 처벌할 제재 규정이 없다'며 '무혐의' 종결했습니다.
이후 누리꾼들이 권익위 홈페이지 게시판에 '대통령 부인에게 300만 원 상당의 전통 엿을 선물해도 되느냐' 등 조롱성 질의를 올리자, 권익위는 "청탁금지법은 공직자 등의 직무와 관련이 없는 경우에는 공직자 등 배우자의 금품 등 수수를 제한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습니다.(관련기사 : 300만원짜리 엿도 직무 관련없으면 괜찮다는 권익위 https://omn.kr/294uy)
김건희 사건을 기점으로 공직자 배우자 금품 수수에 대한 권익위 답변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권익위는 '부정청탁, 금품 등 수수 근절'이란 청탁금지법 제정 취지에 걸맞게 공직자뿐 아니라 배우자도 금품 수수 금지 대상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공직자 배우자도 처벌 받느냐는 질의에 "수수 금지 금품 등을 수수한 배우자는 청탁금지법의 제재 대상은 아니지만, 다른 법률(예: 특정범죄가중법, 변호사법)에 따라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답변(2016년 9월)이 대표적입니다. '배우자는 제재 대상이 아니다'라는 대목은 이번 권익위 발표와 같지만, '다른 법률로 제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데 더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실제 지난 10일 권익위 전원회의에서 이 안건을 논의한 권익위원들 사이에서도 김건희 사건을 종결하자는 의견과 수사기관에 이첩하거나 송부하자는 의견은 9대 6으로 팽팽했고, 윤석열 대통령 신고 사건은 8대 7 단 한 표 차이였습니다.
▲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명품 수수' 신고사건에 대한 국민권익위의 종결 결정에 반발한 참여연대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민권익위원회 정부합동민원센터에 이의신청서를 접수했다. |
ⓒ 권우성 |
지난 2016년 9월 28일 청탁금지법이 처음 시행될 때만 해도 '김영란법'으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지난 2012년 당시 대법관 출신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이 처음 발의한 법안이기도 했고, 청탁금지법 주무 기관인 권익위 공무원들의 자부심도 담겨 있습니다.
이전에도 부당한 금품 수수는 뇌물죄 등으로 처벌했지만, 청탁금지법은 대가성이나 직무관련성이 없더라도 공직자가 고액의 금품을 받을 수 없게 했습니다. 대상자도 공무원뿐 아니라 공공기관, 학교법인, 언론사 등 종사자로 확대했고, 이들의 배우자를 통한 금품 수수도 금지했습니다.
'공직자 직무와 관련 없는 배우자의 금품 수수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권익위 답변은 사실 '구체적 사실관계 확인이 없는 일반론적인 답변'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권익위는 지난 10일 6개월 동안 금품 공여자인 최재영 목사는 물론 피신고자인 윤석열 대통령 부부에 대한 '구체적 사실 관계 확인 없이' 대통령실 주장만으로 김건희 여사가 받은 금품이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결국 누리꾼은 이를 '(대통령이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하면) 대통령 배우자의 금품 수수를 제한할 수 없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 국민권익위원회 정승윤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이 10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가 명품 가방을 수수했다는 내용의 비위 신고 사건을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
ⓒ 연합뉴스 |
일부 권익위원들은 더 나아가 대통령 가족을 마치 법 위에 군림하는 성역처럼 만들었습니다. 윤석열 대선 캠프와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도 활동했던 정승윤 권익위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지난 12일 기자간담회에서 "김 여사가 받은 명품 가방 선물은 대통령과 직무관련성이 없기 때문에 신고 대상이 아니고, 직무관련성이 있더라도 외국인이 건넨 선물은 국가 소유의 대통령기록물로 분류되기 때문에 신고 의무가 없다"는 취지로 말해 물의를 일으켰습니다.(관련 기사 : "김건희 명품 백, 외국인 선물이라 신고 의무 없다" 주장은 '거짓' https://omn.kr/291jr)
공직자윤리법 제15조에서 규정한 외국인 선물은 '외교 및 국제 관례상 거절하기 어려운 직무 관련 외국인 선물'을 말합니다. 김 여사가 받은 명품백이나 화장품을 외국인 선물로 인정한다고 해도 10만 원이 넘기 때문에 소속기관장에 지체 없이 신고해야 합니다. 더구나 대통령기록물로 보존하려면 '영구보존할 문화·예술적 가치'도 있어야 합니다.
정 부위원장 주장대로 김 여사가 받은 명품 백의 대가성 여부나 보존 가치에 상관없이 대통령기록물로 분류돼 신고 의무가 없다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공직자는 윤석열 대통령 부부뿐입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13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권익위가 대통령 가족은 법에 해당하지 않는, 절대 성역인 것처럼 잘못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꼬집은 이유입니다.
권익위가 그동안 김영란법으로 쌓아올린 권위를 파괴하는 가장 큰 적은 그 누구도 아닌 권익위 내부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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