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랄레스호 과제, '아포짓 스파이커'를 찾아라
[양형석 기자]
지난 20일부터 태국 방콕에서는 2024 발리볼네이션스리그 8강 토너먼트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예선 12경기에서 2승10패를 기록하며 16개의 참가국 중 15위를 기록한 한국은 지난 16일 네덜란드와의 3주차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VNL 일정을 모두 마감했다. 오는 23일 VNL 일정이 끝나면 올림픽 티켓을 따낸 12개의 나라들은 오는 7월 26일에 개막하는 파리 올림픽을 준비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은 올림픽 본선행 티켓을 따지 못했다.
사실 이번 VNL 대회에 출전하기 전 모랄레스호의 목표는 VNL 대회 연패 탈출이었다. 2020 도쿄올림픽이 끝난 후 세자르 에르난데스 곤살레스 감독(낭트 넵튠스 감독)이 부임한 한국 여자배구는 2022년과 2023년 VNL 대회에서 2년 연속 전패를 당했다. 하지만 지난 3월 페르난도 모랄레스 감독 부임 후 팀을 재정비한 한국 여자배구는 올해 VNL 대회에서 태국과 프랑스를 차례로 꺾으면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득점 18위(129점)에 오른 정지윤(현대건설 힐스테이트)과 득점 20위(124점)를 기록한 강소휘(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로 이어지는 아웃사이드히터 콤비가 공격을 주도했다. 반면에 공격의 한축을 담당해야 할 아포짓 스파이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아쉬웠다. 모랄레스호가 좌우 공격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한국 여자배구의 미래를 이끌 젊은 아포짓 스파이커의 발굴과 육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 대표팀의 주장 박정아는 대회 중반까지 아포짓 스파이커로 활약했다. |
ⓒ 국제배구연맹 |
물론 도로공사의 문정원처럼 리시브를 전담하는 아포짓 스파이커도 있지만 대부분의 팀들은 리베로와 아웃사이드히터들이 서브리시브를 책임지고 아포짓 스파이커가 공격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 V리그에서도 대다수의 구단들이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아포짓 스파이커를 선발해 공격을 전담시켰다. 실제로 지난 2023-2024 시즌에도 정관장 레드스파크스의 지오바나 밀라나를 제외한 6명의 외국인 선수가 서브리시브를 면제 받고 공격을 책임졌다.
한국 여자배구에는 V리그 원년부터 2023-2024 시즌까지 통산 6355득점을 기록한 '살아있는 레전드' 황연주(현대건설)라는 걸출한 왼손잡이 아포짓 스파이커가 있다. 하지만 V리그를 평정했던 황연주도 작은 신장(177cm)과 고질적인 무릎부상 때문에 국제대회에서는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따라서 2012년 런던 올림픽부터 2020 도쿄올림픽까지는 김희진(IBK기업은행 알토스)이 대표팀 부동의 아포짓 스파이커로 활약했다.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김연경(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이라는 절대적인 에이스가 공수를 오가며 팀을 이끌었기 때문에 김희진은 주로 김연경을 보좌하는 대표팀의 2옵션으로 활약했다. 물론 김희진 역시 선수생활을 하면서 무릎과 어깨 등 부상부위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김희진은 소속팀에서 미들블로커, 대표팀에서 아포짓 스파이커를 오가며 투혼을 발휘했고 두 번의 올림픽 4강과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 김희진은 부상으로 더 이상 대표팀에 포함되지 못했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세자르 감독은 V리그에서도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신예 김다은(흥국생명)을 대표팀에 선발해 작년 VNL 대회에서 아포짓 스파이커로 활용했다. 상대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김다은의 주전 출전에 많은 배구팬들이 우려의 시선을 보냈지만 김다은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상대 나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VNL 대회에서 대표팀의 아포짓 스파이커로 활약한 김다은은 8경기에 출전해 83득점을 기록하는 '깜짝 활약'을 선보였다. 비록 당시 대표팀은 12전 전패로 2년 연속 VNL 전패의 아픈 기록을 남겼지만 아포짓 스파이커 김다은의 발견은 전패의 아픔 속에서 얻어낸 최고의 수확이었다. 하지만 김다은은 2023-2024 시즌 어깨부상으로 고전하면서 V리그 7경기에 출전해 단 2득점을 올리는데 그쳤다.
▲ 문지윤은 이번 VNL 대회에 출전한 대표팀의 유일한 전문 아포짓 스파이커였다. |
ⓒ 국제배구연맹 |
2023-2024 시즌이 끝나고 모랄레스 감독이 부임한 후에도 한국 여자배구의 아포짓 스파이커 고민은 계속 됐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김다은이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하차했고 2023-2024 시즌 소속팀 GS칼텍스 KIXX에서 미들블로커로 활약했던 문지윤을 데리고 1주차가 열리는 브라질로 출국했다. 그리고 모랄레스 감독은 1주차에서 소속팀에서 아웃사이드히터로 활약하는 주장 박정아(페퍼저축은행 AI페퍼스)를 아포짓 스파이커로 기용했다.
박정아는 한국이 VNL 30연패의 수렁에서 탈출했던 태국전에서 16득점을 기록하는 등 아포짓 스파이커 포지션에 무난히 적응하는 듯 했다. 하지만 V리그에서 10년 넘게 활약하면서 오른쪽에서 뛰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박정아는 아포짓 스파이커를 소화하는데 점점 어려움을 느꼈다. 결국 모랄레스 감독은 2주차 후반부터 대표팀의 유일한 '전문 아포짓 스파이커'로 선발된 문지윤에게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3주차 첫 경기였던 일본전에서 7득점을 올리며 가능성을 보였던 문지윤은 프랑스전에서 9득점을 기록하며 한국의 3-2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이탈리아전 10득점, 네덜란드전 6득점을 기록한 문지윤은 이번 대회에서 51득점을 올리며 모랄레스호의 조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문지윤 역시 작년의 김다은처럼 국제무대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예라는 점이 상대로 하여금 경계를 늦추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다.
문제는 대표팀에서 이처럼 쏠쏠한 활약을 해준 문지윤이 정작 소속팀 GS칼텍스에서는 외국인 선수에 밀려 아포짓 스파이커로서 출전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문지윤은 2020년1월 트레이드를 통해 GS칼텍스로 이적했지만 지난 5시즌 동안 메레타 러츠와 레티치아 모마 바소코(현대건설), 지젤 실바 같은 쟁쟁한 외국인 선수에 밀려 컵대회를 제외하면 자신의 포지션인 아포짓 스파이커로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현재 V리그에는 문지윤처럼 좋은 공격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외국인 선수에 밀려 아포짓 스파이커로 나서지도 못하거나 불안한 수비 때문에 주전 아웃사이드히터로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다. 정관장의 이선우와 현대건설의 나현수, 기업은행의 육서영, 페퍼저축은행의 박은서 등이 대표적이다. 주전 아포짓 스파이커 육성이 절실한 대표팀에서 모랄레스 감독이 더욱 유심히 지켜보고 발굴해야 할 선수들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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