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귀한 잔소리
아버지는 나를 갱생의 길로 이끌기 위해 긴긴 시간 동안 똑같은 잔소리를 우직하게 반복해 왔다. 한 가지 일에 꾸준히 정진한 사람은 대가라 불러야 마땅하니 나의 아버지를 잔소리의 대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하지만 때가 되면 자리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요즘의 아버지는 잔소리가 아닌 침묵을 즐긴다. 나를 독립된 성인으로 인정해 줬다기보다는 당신 말을 들을 가망이 보이지 않기에 포기한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겨 함께 잔소리 공격을 퍼붓던 어머니도 이제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따금 좋은 기초화장품을 바르라거나 보톡스를 맞으라는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그건 딸내미의 모습이 안쓰럽기에 하는 일종의 권유일 뿐 잔소리 축에는 끼지 못한다.
내 부모도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 세상 그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으랴. 가까운 사람과는 우스갯소리를, 그보다 먼 사람과는 입에 발린 소리를 주고받으며 지내는 나날이 전에 없이 편안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평화로운 일상에 금이 갔다. 창작자를 위한 계약서 작성 수업이 있다는 소식을 지인에게서 들은 게 화근이었다. 나름대로 글 좀 읽고 써온 나이건만 낯선 단어로 가득한 출판 계약서 앞에서는 속절없이 작아지곤 했었다. 저번에도 같이 일했었으니까. 표준계약서에 준했다고 하니까. 이번에도 별문제 없겠지, 뭐. 계약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내심 찝찝해하면서 사인을 해왔던 터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알아두면 좋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아무런 망설임 없이 수강 신청서를 작성했고 수업을 들으려는 이유를 적으라기에 이러한 사연도 함께 기재했다.
대망의 수업 날이 되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배움의 열기를 식힐 수 없었다. 강의실은 만석이었다. 단 한 자리, 강사가 서 있어야 할 단상만 빼고 말이다. 그는 예정된 시간보다 십 분 늦게, 그것도 껌을 씹으며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수강 신청서를 훑어보더니만, 아니 글쎄 나의 수강 동기를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낭독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이런 분을 보면 화가 납니다. 이해하지 못한 계약서에 사인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자기 일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이 없잖아요.”
얼굴이 화끈했던 것도 잠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거 봐요, 아저씨! 내가 모르니까 배우러 왔지 알면 미쳤다고 여기까지 왔겠어요? 그리고 일에 대한 책임이 없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늦었잖아. 십 분이나 늦었잖아.’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말이 작은따옴표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소심한 나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강사의 말은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머릿속이 시끄러운 탓에 수업 내용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애먼 핸드폰에다 화풀이하듯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누르고 쓸어 올리기를 거듭했다. 그런 나의 손을 멈추게 한 건 ‘보고합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상사에게 보냈다가 꾸중을 들었다는 어느 네티즌의 글이었다. 그는 “통보하는 듯한 제목이 적합하지 않다”며 지적을 당했는데 자기가 잘못한 것이냐 묻고 있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글쓴이의 편을 들었다. 그런데 그사이, 눈에 띄는 댓글이 하나 있었다. 사회에서는 뒤에서 흉을 보거나 인사 고과에 반영하고 말지,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미운털 박혀가며 행동을 바로잡아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 보도록 해라.
하기야 그 강사가 한 말 중 틀린 건 하나 없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됐을 때 믿을 건 계약서뿐인데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건 사실이었다. 따끔한 소리를 들어 맘이 아프긴 했지만, 그 덕에 경각심을 갖게 됐으니 이만하면 남는 장사였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잔소리를 샀다고 생각하니 수강료도 아깝지 않았다.
“우웅!” 때마침 진동이 왔다. 수강 후기를 작성해 달라는 주최 측의 문자 메시지였다. 나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려 ‘강사께서 지각을…’로 시작하는 문장을 써 내려갔다. 억하심정을 품었다는 오해는 금물! 귀한 잔소리를 주고받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상부상조 아닌가.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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