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터뷰] 황인범의 특별한 시즌 ① 맨시티 상대로 골 넣는 기분이요?
[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황인범의 축구경력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모색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발전방안을 모색, 해결책을 모색한다고 할 때 쓰는 단어 말이다. 그는 선수로서 실력과 경력을 더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을 끝없이 찾아다녔다. 2019년 완벽한 행선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해외진출을 시작해 캐나다 밴쿠버, 러시아 카잔, 그리스 피레아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등 온갖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는 지난해 9월 올림피아코스와의 갈등 끝에 극적으로 찾은 현소속팀 츠르베나즈베즈다가 역대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말했다. 일단 결과가 증명한다. 황인범은 세르비아 리그와 컵대회 2관왕의 주역으로 활약했고, 리그 MVP로 선정됐으며,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에 데뷔해 1골 1도움을 맨체스터시티 상대로 기록했다.
더 나은 축구를 모색한 끝에 빅 리그 러브콜 소식이 쏟아지고 있는 황인범을 만났다. 황인범은 그리스와 세르비아라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신의 치열한 축구에 대해 더비를 예로 들며 이야기해줬다.
▲ 황인범의 무관탈출 넘버원
- '무관'에서 '유관'이 되셨습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외에는 우승 경력이 없는 채로 꽤 오랜 경력을 보냈는데 이번에 세르비아 2관왕을 달성했어요.
그렇죠. 사실 저는 아산에서 2018년 K리그2 우승을 함께 이뤘다고 생각하는데(당시 의경팀 아산무궁화에서 군복무 중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조기전역) 기록이나 메달로는 인정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첫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이어서 두 번째 우승(세르비아컵)까지 바로 하게 됐어요.
- 요즘 세계적으로는 해리 케인의 무관이 화제입니다. 무관인 선수는 본인이 무관이라는 걸 의식하나요?
솔직히 재작년부터는 안할 수가 없었어요.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에서 항상 우승하는 팀이에요. 과거 패턴을 보니까 4년 연속 우승하고 한 번 쉬는 정도더라고요. 그걸 알고 합류했는데.
- 그때 인범 선수 외에도 멤버가 유독 화려했어요. 하메스 로드리게스도 있었고요. 물론 알고 보니 막무가내 영입이라 오히려 역효과였지만요.
어떻게 보면 역효과였죠. 그런데 저는 우승을 또 못하면서 '이거 원인이 난가' 싶었어요. 이번 시즌도 즈베즈다가 전반기를 2위로 마쳤거든요. 그때도 가족에게 장난식으로 '내가 우승과 거리가 좀 먼가보다'라는 말도 하게 되더라고요. 후반기에 부담이 큰 상태로 임했던 게 사실이에요. 즈베즈다는 6시즌 연속 우승해 온 팀인데 이번에 못하면 진짜 내게 뭔가 쓰인 거 아니냐 생각이 들었죠. 책임감과 무게감이 있었어요. 다행히도 우승으로 끝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죠.
- 우승이 가장 실감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확정한 날인가요, 아니면 세리머니를 한 날인가요?
두 번 다요. 조금 일찍 우승을 확정했는데 그때 엄청난 행복감보다는 안도감이 들었어요. 다행이다. 드디어 해냈구나. 구단의 7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내가 깨뜨리지 않았구나. 그리고 우승컵 세리머니를 마지막 라운드에 했는데 저로선 첫 경험이었고, 경기장에서 1차 세리머니 이후 시내로 나가니까 시민들이 엄청난 응원을 보내주셨죠. 그때 많이 행복했어요.
▲ 한국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더비 경기에서 벌어지는데
-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한 시즌 살았는데, 동유럽 중에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여행지는 아니라 유독 생소합니다. 생활하긴 어떤가요?
저는 캐나다, 러시아, 그리스, 세르비아까지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생소한 나라에 있다보니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는데 다들 '살기 안 좋을 것 같다'는 예상을 하고 물어보세요. 사실 저도 베오그라드 갈 때 거칠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막상 살아보니 생각보다 괜찮아요. 러시아보다 영어 쓰는 분이 많고요. 러시아에서는 변방(타타르 공화국의 카잔)에 있었는데 베오그라드는 수도라 그런지 열려 있는 분들도 많아요. 겨울이 덜 춥고 여름이 덜 덥고. 그리고 시내를 돌아다니기에 편해요.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분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베오그라드 분들은 보통 아는 체 하기 전에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경우도 있고, 지나가다 마주치면 정말 자연스런 말투로 '잘 보고 있어 황'이라고 한 마디 인사하고 지나가시더라고요.
- 인연을 맺은 사람이 있나요?
저희가 세 들어 살았던 집주인의 초등학생 아들. 저희 집 위층에 집주인이 살고 계셨는데, 아들이 즈베즈다의 엄청난 팬인 거예요. 처음 계약할 때도 즈베즈다 선수라고 하니까 제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버지에게 반드시 이 집을 빌려주라고 했다더라고요. 그리고 시즌 막판에는 편지를 줬어요. 컴퓨터로 써서 인쇄한 편지를 문틈 아래로 쓱 넣어줬어요. 응원하면서 동시에 존중해 주는 멋있는 모습이 부모님에게 잘 배웠구나 싶었어요.
- 세르비아 하면 세계적으로 폭력적인 분위기의 더비 경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즈베즈다와 파르티잔베오그라드의 일명 '영원한 더비'인데요.
그리스 때부터 느끼는 건데 축구선수로서 유럽의 더비에서 뛰는 건 엄청난 경험이고 그 자체로 축복이에요. 각 팀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상대 팀을 죽이고 싶을 정도인 사람들이 모여서 응원을 하면, 저희는 그 한가운데서 경기 퍼포먼스를 펼치는 거잖아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더비를 치를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고 특히 원정경기는 정말 힘들죠. 파르티잔 원정 가면 라이터 같은 게 날아와요. 코너킥 차려고 구석으로 가면 이것저것 날아오는데, 그 중에는 터지는 것도 있어요.
- 관중들이 터지는 걸 던진다고요? 화약 같은 걸?
원리는 모르겠지만 발밑에 떨어지면 불꽃이 약간 튀면서 빵 터져요. 큰 폭발은 아니지만 발쪽에는 타격이 있죠. 어떤 선수는 화상도 입었어요. 그 정도의 압박감 속에서 경기하죠. 사실 그래서 원정 승리를 놓쳤죠. 대신 홈에서는 엄청 든든하고요. 상대 서포터는 저희 홈 구장에 오면 항상 의자를 부수고 가더라고요. 이런 행동이 한국에서는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사실 그리스와 세르비아 리그가 더 성장하려면 리그 차원에서 자제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팬들이 팀을 사랑하는 방식이고 그들의 문화니까 존중하는 마음도 있죠.
- 그런 환경에서 뛰면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데요. 경기 전날부터 마음가짐을 평소와는 다르게 준비해야겠네요.
이건 진짜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요. 한순간 경기에 집중 못하면 다칠 수 있고, 실수로 실점하면 같은 팀 팬들조차 엄청난 비난을 하는 경우도 봤거든요. 기본적으로 주심이 반칙을 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해야 돼요. 끝까지 공에 대한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죠.
- 그리스 시절도 엄청 거칠었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올림피아코스의 더비 라이벌이 어느 팀이었나요?
세 팀이 있어요. 파나티아이코스, AEK아테네, PAOK인데.
- 올림피아코스를 더하면 4대 명문이잖아요. 근데 서로 전부 더비라고요?
네. 전부 더비예요. 그래서 한 시즌에 더비를 12경기 해야 돼요. 스플릿 시스템도 있어서 각 팀당 4번씩 붙거든요. 그래서 리그가 엄청 빡센 거예요.
- 그럼 올림피아코스 구장의 관중석은 한 시즌에 6번 부서지는 거예요?
아뇨. 더비 경기는 원정팬이 아예 못 가요. 예전에 사건들이 많아서 그렇게 됐다고 하던데. 홈에서는 상대팀 팬이 없다는 이점이 있지만 반대로 원정 경기장에서는 그 엄청난 인파 중에서 우리 편은 딱 11명뿐인 상태로 뛰는 거죠. 특히 AEK는 경기장도 새로 지었는데 한 3만 명 정도가 들어와서 소리 지르면 경기장이 빵빵빵빵 울려요. 거기서는 킥오프하고 한 15분 동안 정신을 아예 못 차릴 정도예요. 머리가 계속 울릴 뿐. 그리고 공을 빼앗아서 역습으로 전환하려고 하면 상대 선수들이 압도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미친 듯이 들이대고요. 그래서 초반 15분 정도는 1 대 9 정도로 밀리는 경기를 해야 돼죠.
- 올림피아코스에서 AEK 원정 갔던 것, 즈베즈다에서 파르티잔 원정 가는 것. 뭐가 더 어렵습니까?
그건 AEK 원정. 경기장 분위기는 둘 다 엄청난데 AEK 쪽의 경기력이 수준 높았거든요. AEK 감독이 미국에서도 맞붙어본 분(마티아스 알메이다, 선수 시절 아르헨티나 대표)인데 팀을 수준 높게 잘 만들어 놓으셔서.
- 그럼 대표팀에서 치렀던 평양 원정과 비교한다면?
에이, 평양이죠. 그때는 분명 만원 관중이 들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경기 시작하기 전까지 아무도 안 들어와서 결국 무관중이었잖아요. 그게 더 특별한 경험이죠. 요즘에도 선수들끼리 그때 이야기해요. 진짜 쉽지 않은 날이었다고.
▲ 맨시티 상대로 골을 넣었을 때
- 즈베즈다에서 보낸 1년을 이야기하려면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에 마침내 데뷔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아쉬운 건 있어요. 저희 전반기 마지막 경기였던 파르티잔 원정에서 패배하면서 바라크 바카르 감독님이 경질되시고, 새로 부임하신 블라단 밀로예비치 감독님이 겨울휴식기 동안 팀을 잘 만들어주시면서 후반기에 2관왕 한 거거든요. 그런데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는 다 전반기에 진행됩니다. 시즌 초반부터 지금 감독님과 함께였다면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좀 더 경쟁력을 보였을 것 같고, 특히 영보이스 상대로 1무 1패였는데 최소 한 경기는 이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챔피언스리그 당시에는 팀이 불안정한 상태라 불만 있는 선수들도 있고, 하나로 뭉치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개인적으로는 거의 풀타임 가깝게 매 경기 뛰면서 제 경쟁력을 확인하는 동시에 부족한 점도 느낄 수 있었죠. 왜 선수들이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에서 뛰고 싶어 하는지 알았어요.
- 거의 데뷔 직후에 맨체스터시티를 상대했죠? 앞서 이야기한 여러 더비 경기가 분위기 때문에 특별했다면 맨시티는 완성도가 세계최고인 팀을 상대한 경험 아닙니까?
데뷔 두 번째 경기였을 거예요. 수비만 했죠. 전반전에는 진짜 두 번 정도밖에 못 올라갔는데 그 중 하나를 득점으로 만들면서 선제골을 넣었거든요. 그런데 후반전에 저희 골키퍼, 옴리 글레이저라는 친구가 이제까지 제가 같이 해 본 골키퍼중에 제일 뛰어나다고 해도 될 정도인데, 많은 선방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프리킥으로 좀 허무한 실점을 내주고 말았죠. 그래서 1-3이 된 뒤에는 사실 준비한 걸 펼칠 수가 없었어요.
- 맨시티를 상대해보면 상대 전술에는 아예 구멍이 없나요?
생각보다 그렇진 않아요. 경기 끝나고 제가 생각했던 건, 공격 쪽에서 조금만 더 침착하게 공을 소유할 수 있었다면 저희도 더 많은 역습 찬스를 만들 수 있었을 거예요. 맨시티 원정과 RB라이프치히 원정에서 제일 아쉬웠던 게 그건데요. 11명이 엄청 열심히 수비해서 공을 가져왔으면 이제 역습할 때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되거든요. 근데 그렇게 못 해요. 동료들의 상태를 이해할 수는 있죠. 왜냐면 맨시티를 상대하려면 매 순간 호흡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채로 계속 경기하거든요. 수비만 하다가 마침내 나에게 공이 왔는데도 급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 쪽으로 빵 차버린다든지. 약팀이 강팀 상대로 그런 모습이 나오곤 하는데 저희가 딱 그랬어요. 근데 이 점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감독교체 이후의 저희 팀이었으면 달랐을 수도 있어요.
- 그리고 홈 경기에서는 맨시티 상대로 득점을 했어요.
누군가는 맨시티가 주전을 다 뺀 2군이었다고 하지만 선수들에게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아니에요. 맨시티 2군이라고 해도 엄청난 선수들이라고 생각하고 나갔죠. 실제 경기해 보니 로드리, 필 포든을 상대하면서 느꼈던 벽까지는 아니었어요. 저뿐 아니라 저희 팀 모두 경기를 해 나가면서 자신감을 조금씩 찾았고 그러면서 골까지 났죠. 당시 제 에이전트에게 했던 이야기가 나중에 자식이 태어나면 '세계 최강팀을 상대로 골 넣었다'고 자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풋볼리스트,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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