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부재가 아니다…눈 감고 즐기는 이색 공연 ‘어둠 속에, 풍경’

홍지유 2024. 6. 2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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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두 대의 슈퍼 카. 오른쪽 차는 반짝이는 핫핑크색, 왼쪽 차는 불꽃 같은 빨간색이다. 핑크색 슈퍼 카가 바다 위에 반원을 그리고 끼이익 정지한다. 그에 질세라 새빨간 차도 앞으로 뒤로 옆으로 묘기 하듯 빠르게 촤아악 미끄러진다. 바퀴 옆으로 바닷물이 튀어 오른다. 더 빠르게, 더 우아하게, 더 멋지게, 더 높게!”

시각장애인 예술가 신나라가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모두예술극장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어두운 공연장. 방석을 베개 삼아 드러누운 관객들이 배우 황혜란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슈퍼 카 두 대가 바다 위에서 레이싱을 벌이는 꿈이다. 황혜란의 내레이션 위로 여러 소리가 겹친다. 자동차가 급정지하며 내는 ‘끼이익’ 소리, ‘철썩’하고 ‘쏴아아’하며 쏟아지는 파도 소리, ‘또르르’ 튀어 오르는 물방울 소리, ‘우우웅’하며 전진하는 엔진 소리… 눈을 감고 있지만 소리만으로도 청량하고 시원하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도 즐길 수 있는 공연은 없을까.

국내 유일 장애 예술인 공연장인 ‘모두예술극장’의 기획 공연 ‘어둠 속에, 풍경’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됐다. 시각에 의존해 온 공연 관람 방식에서 벗어나 청각과 촉감을 활용해 온몸으로 공연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실험적인 공연이다.

시각장애인 축구선수 하지영이 관객에게 점자를 읽어주고 있다. 사진 모두예술극장


‘어둠 속에, 풍경’은 공연과 전시가 합쳐진 형태다. ‘휴먼 푸가’, ‘스트레인지 뷰티’, ‘우주 양자 마음’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실험적인 예술을 선보여 온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연출가 배요섭이 극을 만들었다. 무용가 밝넝쿨, 배우 황혜란, 디자이너 기비안 등 비시각장애인 5인과 특수학교 교사 구예은, 촉각 도서 작가 박규민 등 시각장애인 5인이 출연한다.

'꿈 주석' 전시. 원기둥에 쓰인 시각 언어는 촉각 언어로 풀이돼 있다. 사진모두예술극장


공연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거대한 원기둥이 보인다. 원기둥 위에는 수많은 문장과 점자가 쓰여 있다. 퍼포머 10인의 꿈을 글과 점자로 풀어놓은 ‘꿈 주석’ 전시로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꿈을 꿀까?’ 하는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희미한 빛도 보지 못하는 전맹 시각장애인의 꿈은 주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기둥에 쓰인 시각 언어는 촉각 또는 청각 언어로 풀이돼 있다. ‘완만하다’는 ‘조금씩 서서히’라는 뜻이고, ‘화려하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최신음악이 들려오는 거리의 느낌’이다.

'소리그림'은 그림을 만지며 소리를 듣는 전시다. 헤드폰을 쓰면 출연진이 그림 그리던 당시의 작업장 소음이 들린다. 사진 모두예술극장

‘소리그림’은 만지고 듣는 전시다. 몇 점의 추상화 옆에 헤드폰이 놓여있다. 그림을 손으로 더듬으면 작업 현장에서 녹음된 소리가 헤드폰으로 흘러나온다. 작업 현장의 분위기를 짐작게 하는 발랄한 소음과 작업 도구들의 질감을 담은 소리를 들으며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온 그림을 손끝으로 느낀다. 그림을 볼 수 없어도 예술을 느낄 수는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10명의 출연진들이 '그리기'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 모두예술극장

‘그리기’ 공연에서는 10인의 퍼포머가 함께 그림을 그린다. 이 모습을 해설하는 해설자의 내레이션도 들린다. 목탄, 크레파스, 먹, 페인트는 모두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관객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그림을 ‘듣는다’. 눈을 감으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저마다 다른 각자의 감각으로 마음을 열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길 바란다”는 것이 연출가 배요섭의 관람 팁.

‘어둠 속에, 풍경’은 서울 서대문구 모두예술극장에서 6월 23일까지 볼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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