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버지니아 울프' 시댁살이 30년 차 효정씨의 독립

김상목 2024. 6. 2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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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다섯 번째 방>

[김상목 기자]

 영화 <다섯 번째 방> 포스터 이미지
ⓒ 씨네소파
 
국내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은 크리스티앙 자크의 역사 팩션 소설 <람세스>를 즐겨 읽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중에도 가장 유명한 람세스 2세의 일대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듬뿍 끼얹은 5권 대하소설은 람세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집트 신들의 가호로 극복하는 과정의 반복이라 점점 지루해지긴 했지만, 작가의 이집트 문명에 대한 풍부한 지식 덕분에 깨알 같은 고대 이집트 사회 풍경화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작품이다.

특이한 건 당시 다른 주요 문명권에선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게 당연시되던 시절이건만, <람세스>의 주요 배경인 이집트 신왕조에선 여성들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년 군주이던 시절에 람세스가 자릴 비울 때마다 현명한 그의 모친 투야가 섭정을 맡는 게 당연시되었고, 왕비였던 네페르타리 역시 조언자이자 공동군주처럼 수많은 국정을 나눠 담당하고 있었다. 부유한 과부 상인은 독신생활을 즐기며 자유롭게 상대를 골라 동거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당시 이집트가 무척 이상적인 국가로 보이는데, 그 요체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재산을 남편과 별개로 축적하거나 상속받을 자격을 보장했던 데에서 비롯된다. 즉 여성이 경제적 능력을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유지하는 게 법 제도와 사회규범에서 높은 수준으로 인정되었다. 그 파급효과는 이혼을 요구할 권리나 소송할 권리로 연결되었다. 그 이후 수천 년 동안 다른 문명과 국가 대다수는 고대 이집트가 이룩한 성취에 미치지 못했다.

1929년 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오늘날 읽어보진 않아도 제목쯤은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에세이를 세상에 선보인다. 바로 <자기만의 방>이다. 요체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자기만의 독립되고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대학 강연에서 여성이 문학 창작에 종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역설했던 발제를 보완한 내용이다. 전 세대 여성 작가들이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해 고생했던 사례가 잔뜩 들어 있었다. 경제적 빈곤은 사회적 고립으로, 결국 한정된 사회활동과 경험으로 창작의 질곡이 되었다는 실증이다. 그런 버지니아 울프의 역작은 당시 서양에서 들끓던 여성 인권 운동의 기운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사회 전체의 경제적 부 측면에서 2024년 한국은 <자기만의 방>이 쓰인 1920년대 영국에 비해서도 월등한 수준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가 호소하던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전찬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다섯 번째 방>이 포착한 지점은 바로 울프의 책이 그어놓은 선과 정확히 겹치는 실증사례일 테다.

30년 동안 5개의 방 전전하는 효정씨의 험난한 여정
 
 영화 <다섯 번째 방>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영화의 핵심배경은 대구 어딘가에 있는 2층 단독주택이다. 지은 지 50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구축 가옥엔 요즘 보기 드물어진 1층과 2층이 통하는 내부 계단도 있다. 이 집의 건축적 특성과 실내 구조의 특성은 영화의 전개와 중요하게 합을 이루며 연동된다.

원래 이 집은 효정씨의 남편인 전석씨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다. 남매 중 딸들은 모두 결혼 후 분가했으며 부모님과 외동아들인 전석씨만 남았다. 여기에 효정씨가 결혼하며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집의 내부는 대충 이렇다. 1층에는 방이 3개 있고, 2층은 원룸 형태와 유사하게 별채 형태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가장 작은 방이 원래 효정씨 부부의 방이었고 이곳에서 세 자녀와 함께 기거했다고 한다.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남편과 살게 된 효정씨의 '첫 번째' 방이다.

누나들이 출가한 후 어린 자녀들이 옆방으로 옮겨가면서 작은 방은 부부만의 공간으로 조금 숨통이 틜 수 있었다. 남편은 부모님에게서 작은 소파 제작공장을 물려받았다. 집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연스럽게 외아들이 상속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같은 방이라도 조건이 제법 바뀌었다. '두 번째 방'이 된 셈이다. 아이들은 하루가 멀세라 무럭무럭 성장했고, 효정씨는 쉴 틈이 없었을 테다. 게다가 일은 갈수록 불어만 갔다. 남편이 운영하던 소파 공장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중년이 된 남편은 새로운 생업을 찾는 데 거듭 실패하고 말았다. 효정씨는 이제 세 남매를 건사하는 책무에다 기울어진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실질적 가장까지 소화해야 했다.

효정씨는 뒤늦게 국가자격증을 얻고 상담사 일을 시작한다. 그는 양성평등과 다문화가정 관련 교육과 상담을 나가 돈을 벌어온다. 전씨 집안 경제를 김씨 며느리 효정씨가 떠받치게 된 것이다. 몸은 더 고되어졌다. 바깥에 나가 일할 때는 생면부지 사람들의 고충을 듣고 상담해주는데 귀가하면 밀린 집안일과 가사노동도 다 해결해야 한다. 힘에 겹지만 작은 보람도 생긴다. 마치 공로를 포상하듯 혼자 된 시어머니가 원래 시아버지와 살던 가장 큰 안방을 내어주고 2층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제 효정씨는 작은 방을 탈출해 1층에서 제일 넓은 방을 독차지한다. '세 번째 방'으로 인생 역전한 셈이다. 그 덕분에 자신의 방에서 상담 업무도 소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안방은 닫히지 않는다. 남편을 포함해 식구 누구도 노크하지 않는다. 그냥 불쑥 들어올 뿐이다. 그에게 세 번째 방은 자기의 방이되 자기만의 방은 아니다.

수평이동→수직이동→탈주로 이어지는 서사극
 
 영화 <다섯 번째 방>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지금까지 효정씨의 실내 이사 과정은 당사자의 해설과 주인이 바뀐 방 스케치로 묘사되어 왔다. 이제부터는 과정 자체가 영화 속에 담기기 시작한다. 1층의 공간 점유에서 정점에 도달했지만, 효정씨가 기대했던 성취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수평 이동으론 한계가 너무 확연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수직 상승을 시도해볼 차례다.

교섭과 협상을 통해 효정씨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2층에는 하늘 같은 시어머니가 군림하고 있다. 2층 베란다를 열고 나가면 시어머니가 이 집으로 이사한 후 내내 관리해온 텃밭이 있다. 이 텃밭은 효정씨의 남편이 하던 사업이 기울어진 뒤로 단순한 취미생활을 넘어 먹을거리를 상당 부분 책임져온 경제적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 2층으로 갈 것을 결심한 효정씨의 결단은 성공한다. 이제 2층을 꾸미며 본격적으로 자신이 꿈꾸던 독립된 공간으로 완성하려 애쓴다. 손재주가 있는 남편의 조력으로 2층은 상담교육을 위한 효정씨의 학습공간이자 상담실로 변모한다. '네 번째 방'의 탄생이다. 이쯤 되면 2층 주택의 질서가 개편되면서 마치 가족 시트콤 드라마처럼 흘러갈 모양새다. 가히 '효정씨의 성공시대' 서사다.

하지만 전반부에 가끔 철렁하긴 해도 화기애애해 보이던 분위기는 효정씨가 2층으로 올라가면서 급속히 추락한다. 이제 온전히 '자기만의 방'에서 그토록 원했던 자리를 찾으려 한 주인공에게 거듭 시련이 겹쳐온 것이다. 그것도 몸과 마음을 동시에 저격하듯 말이다. 두 개의 공세는 서로 다른 조건과 입지를 가진 두 '전씨' 가문 일족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어렵게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더니 곧바로 쿠데타가 벌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남편은 경제적 무능력에서 기인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다. 부모님에게도, 아내에게도 보란 듯이 내세울 게 없는 그는 효정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면서도 경상도 남자 특유의 위악적 면모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의 내면에는 불만과 분노가 늘 잠재해 있었고, 술에 취하면 우유부단하던 평소와 다르게 폭발하곤 한다. 그는 자꾸만 2층으로 침입하려 시도한다. 몇 번이고 다짐을 받지만 늘 헛수고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집요하게 문을 두드리며 맥락없는 반복을 거듭하는 남편의 행태는 상대방에겐 공포영화일 뿐이다.

시어머니는 경제적 책임을 짊어지고 남편 대신 가장 노릇을 하는 효정씨를 존중하는 듯 보였지만, 시부모를 오랫동안 봉양해온 며느리와 상의 없이 그들이 살아가는 집의 상속 문제를 임의로 정해놓고 있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효정씨로선 자신이 희생하고 헌신해온 지난 세월이 부정 당한 기분뿐이다. 격렬하게 시어머니에게 항의하지만, 상대방은 딴전만 피우며 회피하는 데 급급하다. 남편 보고 할 말 좀 해라고 해도 아내에게만 술김에 큰소리칠 뿐이지 본인의 어머니에겐 못난 아들 콤플렉스인지 주눅이 들어 별말 못한다. 속 타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 사건이 속출하는 가운데 효정씨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상주 노릇을 해야 할 남편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등 용납하기 힘든 사고를 친다. 이제 효정씨에겐 '다섯 번째 방'을 향한 결단이 필요하다.

설국열차가 보여준 대안논쟁을 재현하는 주제의식
 
 영화 <다섯 번째 방>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다섯 번째 방>은 30년 세월 동안 K-엄마 겸 며느리로 살아온 (감독의 엄마인) 주인공이 마침내 최종적 선택에 도달하는 과정을 가족이 아니면 쉽게 담기 힘든 내밀한 풍경과 함께 그려낸다. 5년의 제작 기간이 걸린 장편은 감독의 전작들이 한심해 보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그려진 아빠를 다룬 데 비해 늘 배경으로 스치던 엄마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엄마의 해방일지'를 버지니아 울프의 고전이 품은 보편적 주제의식과 연결해 그려내고 있다. 영화를 보면 그저 인용하는 게 아니라 아주 정석적으로 '자기만의 방' 서사와 연동한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

효정씨는 오랜 세월 인내하며 전씨 집안 내에서 노력이 보상받아 지위 상승에 이르기를 꿈꿨을 것이다. 그의 시어머니가 남편과 사별하면서 '유사 가부장'으로 군림하게 된 것을 봤으니 고생하면 말년엔 이 집을 물려받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심신이 고된 일상 속에서 효정씨가 그리는 미래의 현실적 유토피아였다는 건 자명하다. 하지만 이 K-며느리의 노고는 끝내 보답받지 못한다. 이제 희미해진 줄 알았건만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내밀한 가족 내 서열과 미시적 권력 관계는 마치 웅크린 채 자리를 튼 뱀처럼 너무나 강력한 것이었다. 잔인한 진실을 결국 효정씨는 목격하고 만다.

쓰라리지만 효정씨가 자신을 둘러싼 장막을 벗어나 동굴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교육과 일자리를 통해서다.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가 강연에서 역설하던 핵심 구성요소를 은연중에 그대로 수행한 셈이다. 그가 고등교육을 받았고 마침 닥친 집안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랫동안 경력단절로 지내던 조건을 떨치고 바깥세상으로 나온 덕분이다. 그리고 자신이 외부 교육에서 수업하던 내용을 '지행합일', '언행일치'로 본인에게도 적용한 결과다. 다 교육의 힘이자 동기부여다.

여기에 노동의 대가로 획득한 임금, 즉 경제력은 그가 목소리를 내고 이제는 숨죽이지 않을 용기를 부여한다. 마치 드라마 시나리오처럼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는 단계별 미션 수행 격이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중년까지 경제적 어려움으로 전업 창작에 애를 먹다 친척의 유산 상속 이후 바뀐 환경을 절감하며 '자기만의 방'을 집필할 수 있었던 역사를 상기하면 영화 속 효정씨의 운명을 건 결단은 그가 경제활동에 참여하던 순간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테다.

효정 씨의 '네 번째 방'과 '다섯 번째 방' 사이의 경계선은 마치 봉준호 감독 영화 <설국열차>에서 두 주인공의 방법론적 대립과 상통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꼬리 칸과 삼등칸, 이등칸, 일등칸으로 철저히 계급이 분리된 설국열차의 맨 끄트머리에서 천대받는 꼬리 칸 사람들을 이끌고 오랫동안 준비한 봉기의 지도자 '커티스'는 열차의 맨 앞까지 혁명을 펼쳐 열차 안 세계의 구도를 뒤바꾸려 한다. 즉 계급역전을 폭력으로 쟁취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계급투쟁에서 살짝 벗어난 채 열차라는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자리에 있던 기술자 '남궁민수'는 열차 속 세계관이 전제한 설정에 의문을 표하며 열차 바깥으로의 '탈주'를 제안한다. 효정씨가 2층으로 상승하는 과정까지는 '커티스'의 최하층민이 열차를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과 통하지만, 결정적이자 마지막 선택을 결심하는 순간부터는 '남궁민수'의 발상과 일치된 경로를 밟는다. 그리고 명백하게 남궁민수의 판단을 긍정하는 결과론이다.

아쉬움 남지만, 감독이 의도한 기대효과에는 '100% 부응'
 
 영화 <다섯 번째 방>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그렇게 영화 속에서 효정씨는 마침내 두렵고 낯설긴 하지만 생애 처음 맛보는 바깥세상과 대면하게 된다.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두근두근 설렘을 황혼 초입에서 체험할 수 있는 K-어머니가 얼마나 될까? 설정으로 만들 수 없는 당사자의 결단을 담을 수 있는 건 다큐멘터리가 가진 특권일 것이다. 영화는 그런 예측불가 상황을 일정부분 편집의 묘를 통해 보완하려 시도한 흔적도 엿보인다. 이는 감독의 주제의식이나 세계관과 연동되는 대목일 것이다. '네 번째 방'인 2층에 입성한다는 건, 시어머니가 효정씨와 오랜 기간 분점해 온 집안 경제권의 온전한 쟁취로 해석 가능한 지점이다.

그런데 그 '천하통일'의 순간에 효정씨는 의외의 행동을 보인다. 경제적으론 유용하지 않은 허브를 심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당연히 텃밭의 원래 용도라면 취향에 맞는 유실수나 작물을 재배할 텐데, 허브를 작은 책상 화분에서 확연히 너른 공간으로 옮긴 것은 본인의 처지와 심경을 투영하는 동시에 '빵과 장미'의 고전적인 등식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적 책임을 짊어지면서 '빵'을 해결하는 것으로 자립의 기반을 삼긴 했지만, 그에 머물러 시어머니처럼 유사 가부장에 그치지 않고 본인의 해방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결연한 표상으로 해석되길 기대한 것이리라.

<다섯 번째 방>은 출발점부터 비롯된 강점과 약점을 골고루 갖춘 채 끝까지 나아간 덕분에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노출한다. 아빠에 대한 부정적 묘사에서 충분히 강렬한 찰나를 잔뜩 확보했을 테지만 주저하고 망설이는 카메라의 떨림을 확인할 수 있다. 가족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더한 경험을 겪은 이들이라면 치를 떨면서 감독의 태도가 이중적이라 비판할 여지도 발생한다. 엄마보다는 자신에게 확연히 친절한 아빠를 경험해서다. 그건 인지상정이긴 하다. 그런 면모 덕분에 <설국열차>가 선보이는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의 끝까지 가는 결단에는 영화적으로 도달하지 못한다. 아니, 스스로 포기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이 역시 참작되는 지점이자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대목이다.

영화는 전반부에선 감독의 아빠를 주역으로 담은 전작 단편들과 일맥상통하는 치고 빠지기를 선보인다. 아빠의 한심함을 전반적으로 묘사하지만, 자식이 된 도리로 차마 치부를 다 끄집어낼 수 없기에 타협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연출이 아니라 실제 발생한 일련의 사건과 사고들 때문에 영화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사이코 드라마처럼 변모한다. 해당 대목의 묘사는 과도한 선정성과 공포 조장을 막기 위해 애니메이션 효과를 활용해 감정 소모를 관리 가능한 선으로 억제하는 데 성공하지만, 뒤를 이어 등장하는 마치 아빠에게 변호권을 수여하듯 보이는 장면 때문에 온도 차이가 너무 크다. 가족으로서는 당연한 전환이지만 작가의 태도로선 너무 급격한 태세전환이라 고산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기분이다.

영화는 철저히 감독의 엄마 효정씨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딸이자 감독은 카메라 너머에서 관찰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 행위자와 관찰자를 동시에 소화하는 도전에 나선다. 그리고 가편집 버전을 노트북으로 보면서 '내가 또 악역인 거지?' 알면서도 묻는 '빌런' 아빠가 있다. 이 셋 외의 다른 가족은 객체에 가깝다. 효정씨의 시어머니이자 감독의 할머니, 감독의 분가한 여동생과 (가장 의문에 휩싸인 캐릭터이자 전씨 가문의 후계자) 남동생은 다소 캐릭터화된 역할만 부여받는다. 아무래도 출연하기 부담스럽거나 굳이 서사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영화의 일정하게 기울어진 (물론 전혀 그 자체가 틀리지 않은) 구도 때문에 가족들이 영화를 본 소감과 이후의 삶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외부적인 이야길 조금 하자면, <다섯 번째 방>의 개봉 이전 상영회 때 감독의 가족과 친지들이 단체관람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라 할 효정씨나 감독의 여동생은 당연히 참석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본인들이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남편이나 시어머니 역시 함께 참석하는 풍경이 보였다(다만 남동생은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했고, 출연 자체도 거부감이 심했다고 한다). 가족이란 저런 것인가, 혹은 아내와 딸에게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K-남편/아빠의 심리는 어떤 걸까 기이한 체험이던 셈이다. 다만 굳이 그걸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섯 번째 방>으로 '자기만의 방'을 마침내 쟁취한 21세기 대구의 '버지니아 울프'는 잔뜩 알고 싶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경상도 남자'들에 대해선 너무나 잘 알기에 그렇다. 필자 역시 그 일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정보>
다섯 번째 방 Her 5th Room
2024│한국│다큐멘터리
2024.06.05. 개봉│81분│12세 관람가
감독 전찬영
출연 김효정, 전성, 전찬영, 문옥이, 전나영, 전진호
제작 탄탄필름
배급 씨네소파
 
2023 20회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시청자·관객상
2023 5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장편경쟁부문 심사위원상
2023 1회 미네소타필름페스티벌 장편 다큐멘터리 최고작품상
2023 10회 부산여성영화제 개막작
2022 24회 부산독립영화제 대상/관객심사단상
 
2022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2 13회 광주여성영화제
2023 9회 경산여성영화제
2023 14회 익산여성영화제
2023 19회 인천여성영화제
2023 24회 제주여성영화제
2023 23회 전북독립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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