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기에 두려웠던 안중근... 그의 마지막 기도

안지훈 2024. 6. 2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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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15주년 맞이한 <영웅> , 다시 한번 안중근을 노래하다

[안지훈 기자]

 뮤지컬 <영웅> 공연사진
ⓒ 에이콤
 
법정에서 "누가 죄인인가"라고 소리치는 안중근에 분한 배우 정성화의 이미지는 대중에게 이미 익숙하다.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영웅>이 어느덧 15주년을 맞이했고, 2022년 말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스크린에 오른 바 있다. 더불어 2023년 뮤지컬 <영웅>이 국내 창작 뮤지컬 가운데 두 번째로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것은 그간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아왔는지 짐작케 한다.

초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고 있는 정성화뿐 아니라 수많은 스타 배우들이 <영웅>을 거쳐갔다. 초연 당시에는 류정한이 정성화와 함께 <영웅>의 시장 안착을 이끌었고, 이후로도 신성록, 민영기, 안재욱 등이 작품에 참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주년을 맞은 이번 공연에는 정성화와 양준모, 민우혁이 안중근 의사에 분한다.

이어 김도형, 서영주, 이정열, 최민철 등 베테랑 배우들이 '이토 히로부미' 역에 캐스팅되었으며, 궁녀 출신의 항일운동가 '설희' 역에는 유리아, 정재은, 솔지가 이름을 올렸다. 외에도 올해로 데뷔 62주년을 맞은 배우 박정자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역에, 아이돌 그룹 I.O.I 출신의 최유정이 '링링' 역에 캐스팅되며 화제를 모았다.

뮤지컬 <영웅>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8월 11일까지 공연되며, 서울 공연 종료 후에는 지방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인간' 안중근

우리는 안중근을 식민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기억한다. 누군가를 영웅으로 인식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영웅으로만 기억될 경우 그의 고뇌와 두려움이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영웅이라는 이름은 선천적 비범함을 풍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뮤지컬 <영웅>은 그 이름과는 달리 안중근의 영웅적 면모보다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킨다. 공연 내내 안중근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안고 간다. 도처에 도사리는 죽음에 두려워하고, 거사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한 채 두려워하며, 설령 거사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꿈꾸던 독립과 동양평화가 실현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특히 동지의 죽음을 보고는 "조국이 무엇입니까?"라고 소리치며 울부짖는 장면은 안중근의 고뇌를 여실히 드러낸다. 안중근은 이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넘버 '십자가 앞에서')

"떨리는 제 두 손을
천주여, 부디 꼭 잡아주소서."
 
 뮤지컬 <영웅> 공연사진
ⓒ 에이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안중근은 신께 기도한다. 뮤지컬 <영웅>에는 이런 안중근 스스로의 처절한 싸움이 수차례 등장한다. 안중근의 두려움은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에 가는 그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직접 지은 수의를 받아든 안중근은 눈물을 흘리고, 형장이 가까워질수록 안중근의 흐느낌은 고조된다. 이때 부르는 넘버 '장부가'의 초반부는 안중근의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왜 이리 두려울까.
뛰는 내 심장소리 들리지 않을까.
두려운 나의 숨소리 저들이 듣지는 않을까."

하지만 안중근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의 두려움을 일본의 식민주의자들이 알아차릴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따라서 안중근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신께 기도한다.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우리 뜻 이루도록", 살려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과 동지들이 품었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다. 안중근의 두려움은 꿈을 향한 무한한 기대로 전환되고, 마지막 구절을 노래하는 안중근은 미소를 짓는다.

기억되지 않는 영웅의 이름들

이쯤에서 생각해본다. 왜 뮤지컬의 이름이 <안중근>이 아니라 <영웅>인지. 필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자면, 아마 안중근뿐 아니라 안중근과 함께 했던 동지들을 모두 이야기하기 위해 <영웅>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작품에는 안중근뿐 아니라 수많은 동지들이 등장한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안중근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왕웨이', 그런 왕웨이의 동생으로 끝까지 안중근을 지킨 소녀 '링링',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 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그리고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기에 뮤지컬의 첫 장면 '단지동맹'에서 함께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이름을 알 수 없는 동지들까지.
 
 뮤지컬 <영웅> 공연사진
ⓒ 에이콤
 
뮤지컬은 장면마다 동지들이 있었기에 안중근의 거사가 가능했음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동지들 역시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영웅임과 동시에 인간이었다. 그들도 거사의 성공 여부를 확신하진 못했다. 이는 넘버 '그날을 기약하며'의 가사에 드러난다.

"우리가 가는 길, 기약없는 내일과 두려운 미래
(···) 시간이 흐르면 역사 속에서 사라져 이름도 없겠지만."

하지만 자신은 성공하지 못해 쓰러지더라도, 독립과 동양평화의 꿈만큼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확신했다. 같은 넘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기약돼 있는 그날을 위해"라는 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들 스스로의 길은 캄캄하고 자신들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리라는 것은 묵묵히 받아들였으나, 자신들의 최종적인 꿈은 기약돼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으로 그들은 '영웅'이 된다.

기억되지 않는 영웅들,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영웅들을 생각해보는 지금 이 순간, 문득 <영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린 독립운동가 유동하와 링링이 제비꽃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유동하는 링링에게 제비꽃의 꽃말을 이야기해준다. 그 꽃말은 다음과 같다.

"나를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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