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테스 말고 축구 합시다'로 프로필 바꾸고 싶다
[김은미 기자]
'시골에서 여자들이 축구를 한다 ' 이렇게 멋진 워딩이라니... 책 제목을 보자마자 기대감에 마음이 설렜다.
유일하게 빼먹지 않고 즐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바로 JTBC <뭉쳐야 찬다>이다. 시즌1부터 시즌3까지 단 한 편도 놓치지 않았다. SBS <골 때리는 그녀들>도 처음부터 챙겨봤다면 아마 광팬이 되었을 텐데 타이밍을 놓쳐 흐름을 타지는 못했다.
우리는 '축구'라는 키워드 하나로 온 나라가 들썩일 수 있다는 것을 2002년에 직접 경험했다. 축구에 온 국민이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 재미있는 스포츠 '라는 점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책표지 시골, 여자, 축구 |
ⓒ 흐름출판 |
비슷한 생활 반경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반반 FC'라는 팀명으로 모여서 축구를 한다. 팀원은 모두 여자다. 그냥 이리저리 떼로 몰려다니는 축구가 아닌, 각자의 포지션이 있는 진짜 축구를 한다.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읽고 나서, 김혼비 작가의 광팬이 되었는데 그때의 그 짜릿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반반 FC의 주장 노해원 작가는, 일주일에 세 번 축구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축구 글쓰기 모임을 하는 축구에 진심인 사람이다. 주로 초등학교 축구부, 족구팀 아저씨들 등 동네 사람들과 축구를 하기 때문에, 그들과 운동장 외의 공공장소에서 마주쳤을 때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든다고 했다. 뜨겁게 경기할 때와 차갑게 식어 있는 일상 사이의 커다란 캡 차이 때문이라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반반 FC는 축구를 하기 위해 모였지만, 같이 훈련하고 같이 기뻐하고 분해하는 순간들이 쌓여 우정과 추억을 만들어 갔다. 부끄러운 플레이에 소심해지고, 가끔은 부끄러운 인성이 들켜 멋쩍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발걸음은 운동장으로 향할 정도로 축구의 매력에 빠진 것이다.
노해원 작가는 어린 시절에 왜 남자들은 축구를 하고 여자들은 당연히 피구를 했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왜 당연하지 않았는지, 그 당연함을 누리지 못하는 쪽의 대부분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에 자주 서러워했다.(32쪽)
나는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이었는데 축구를 하며 나의 한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한계를 함께 뛰어넘는다고 느껴 왔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당연함을 누리지 못하는 쪽의 대부분이 여성들의 몫이라는 사실이 자주 서럽지만 또 한편 그것을 넘어설 때마다 경계와 선을 지워가는 모습이 너무너무 멋지다. (32쪽)
스포츠를 하지 않거나 보지 않는 수많은 여성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도 예전의 나처럼 못 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은 언제쯤 평평해질 수 있을까. 그때까지 우리는 얼마큼의 시간과 얼마큼의 서운함을 삼켜야 하는 걸까.(138쪽)
<뭉쳐야 찬다>의 어쩌다 벤져스를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능감을 빼고 진짜 축구를 하기 시작한 시즌 2와 시즌 3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각자의 종목에서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운동선수들에게도 축구는 결코 쉽지 않았다.
자신의 종목과 축구에서 사용하는 근육이 달라 자주 부상을 당했고, 포지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자기 자리를 찾느라 우왕좌왕했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힘이 들어간 채 날아간 공은 허공을 배회했다. 그렇게 좌절하고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축구에 열정을 다 쏟았던 그들은 조금씩 성장해갔다.
결국 시즌 3 어쩌다벤져스팀은 전국재패라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어쩌다벤져스 역시 반반 FC가 걸어온 길을 똑같이 걸었다. 이기면 좋아했고 지면 분해서 땅을 치며 울었다. 이기면 좋아서 계속했고, 지면 분해서 다시 했다.
이 굴레 속에서도 계속 축구를 했고, 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고, 우정이 쌓였고, 추억이 쌓였으며 축구를 더 좋아하게 됐다.(55쪽) 축구가 좋은 이유를 질서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역시 어쩌다벤져스와 반반 FC의 공통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수보다 응원단이 더 많고, 이기는 일보다 지는 일에 더 익숙한 축구팀이지만, 당당하고 씩씩하게 운동장을 가르며 슛을 날리는, '축구는 처음인 시골 여자들'의 축구 이야기가 이렇게 유쾌 통쾌 상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직도 여전히 축구에 미쳐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반반 FC에 조건 없는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골 결정력이 부족하고 유효슛을 날리지 못하면 어떠한가. 초등학교 축구부에 13:0으로 지더라도 결코 패배를 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꾸준히 함께 뛰고, 외치고, 그 안에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일 아닌가.
지금까지 나는 엄마로서 혹은 다년간 이것저것을 덕질해온 사람으로서 누군가의 성장을 응원한다는 것이 나를 얼마나 살릴 수 있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좋아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자부심, 책임감, 지키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 결국에는 더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성장을 꾸준히 함께 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마음이 별 수 없이 깊어진다. 무조건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무조건적인 응원을 하게 된다. 그런 응원을 받은 날이면 결과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는 행위들이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서다. 무엇이든 이유가 필요한 세상에서 조건 없는 응원은 언제나 벅찬 감동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응원하는 마음이 나를 살리고 동시에 상대도 살리는 일이라고 믿는다.(201쪽)
축구로 다져진 육체적 근력을 글쓰기라는 마음 그릇에 담아 끈끈하고 단단하게 빚어낸 <시골, 여자, 축구>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우리 동네 여자축구팀'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팀 스포츠를 통해 내 삶을 조금 더 액티브하고 조밀하게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나의 SNS 프사에 이렇게 공지를 띄워볼까?
*우리 동네 멋진 언니들! 우리, 필라테스 말고 축구합시다. 팀명 - 언니들 FC, 모이는 시간 - 매주 토요일 아침 5시, 장소 - oo 운동장, 참가 자격 - 축구는 잘 모르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은 언니들(팀원들과의 우정, 연대의식, 믿음은 덤으로 얻어 가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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