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생로먹방’에 열광하는가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2024. 6. 2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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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어느 날 당신이 ‘생로병사의 비밀’(KBS1)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면 중년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건강과 질병, 특히 성인병을 많이 다루는 이 교양 프로그램은 ‘부모님 애청 프로그램’으로 20년 넘게 장수를 누려왔다.

그런데 최근 ‘생로병사의 비밀’이 유튜브 채널을 타고 젊은 세대의 인기를 얻고 있다. 놀랍게도 프로그램의 취지와 전혀 맞지 않는 “진정한 먹방”으로서 말이다. 과식, 비만, 자극적 음식의 위험을 알리는 에피소드들에 출연한 “먹는 데 진심인” 일반인들이 지글거리는 삼겹살이나 치킨, 새빨간 비빔면을 너무나 맛있게 먹은 탓이다. 심지어 어떤 유저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다른 먹방 유튜브는 안봅니다. 음식을 의무로, 일로 먹는 것 같아서요. ‘생로병사’에 나오신 분들의 음식 드시는 장면은 정말 보는 사람마저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 탐식 대리만족과 죄의식의 해소
비극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유사
‘가속노화’에 대한 염려도 작용
물질·건강 관심 큰 세태의 반영

먹방 끝판이 된 교양 프로그램

KBS1 건강 프로그램 ‘생로병사의 비밀’이 자체 유튜브 채널에서 ‘생로먹방’으로 유머러스하게 재편집된 모습. 유튜브 캡처

이러다 보니 10여 년 전에 방송된 ‘삼겹살 리포트’편이 ‘먹방의 끝판’으로 입소문을 모아 1300만 뷰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생로먹방’이라는 인터넷 밈(meme)까지 생겼다. 그러자 이에 호응해 ‘생로병사의 비밀’ 유튜브 채널 편집자는 자극적 음식·과식 관련 과거 에피소드들을 유머러스한 댓글 반응과 함께 편집한 ‘생로먹방의 비밀’ 시리즈를 올해부터 올리고 있다. 한 일반인 출연자의 명언(?) “고기에 파김치를 착 얹어서 먹으면 꿀 조합이에요”가 강렬한 비트를 타고 DJ 믹싱으로 나오기까지 한다. 그 뒤로는 원래 방송에 나온 대로 이들의 심각한 건강 상태에 대한 체크와 의료진의 준엄한 경고, 의료진의 처방에 따른 식습관 개선과 운동 등이 펼쳐지지만 말이다.

‘생로먹방’ 시리즈에 대해서 “공영방송이 클릭 유도하려고 너무 자극적으로 간다”라는 비판도 일부 있지만 “먹방의 재미와 건강 정보를 동시에 준다”며 환호하는 반응이 훨씬 많다. 탐식에 대한 은밀한 공감과 대리만족, 그리고 건강을 해치는 탐식에 대한 죄의식(?), 이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을 동시에 해결해 주기에 이 시리즈가 폭발적 인기를 얻는 것이리라.

셰익스피어 비극의 효용

사실 비슷한 이유로 사람들은 셰익스피어 비극을 즐겨왔다. 관객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유혹에 빠지고 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며 그 죄의 달콤함에 은밀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결국 주인공들이 파멸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나약한 면을 처형하는 듯한 정화의 쾌감을 느낀다. ‘생로병사의 비밀’ 과식·탐식 에피소드들은 이러한 비극의 구조를 매우 닮았다. 물론 주인공들이 파멸하는 대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그리스 비극에서 막판 해결사로 등장하는 기계장치의 신) 같은 의료진의 무시무시한 경고와 질책을 받고 의료진의 처방을 충실히 따라 건강상태를 개선하면서 비극 대신 해피엔딩을 맞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가속노화'가 새롭게 화두에 오름에 따라 꾸준히 저속노화 식단을 주장해온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가 '의학계의 아이돌'로 떠올랐다. 우상조 기자

한편 최근 들어 ‘생로병사의 비밀’이 젊은 세대의 인기를 끄는 것은 이러한 ‘먹방으로서의 재발견’뿐만 아니라 ‘가속노화’가 새롭게 화두가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속노화는 자극적인 가공식품과 탄수화물 과다 섭취, 운동·수면 부족 등으로 생물학적 나이가 빠르게 들며 성인병을 일찍 겪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가속노화’라는 명칭의 충격 효과 덕분에 젊은 층에게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 소셜미디어에는 건강한 ‘저속노화 식단’ 인증 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꾸준히 저속노화 식단을 주장해온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가 ‘의학계의 아이돌’로 떠올랐다. 이런 기세를 타고 ‘생로병사의 비밀’ 프로그램도 ‘생로먹방’과 가속노화 화두를 결합해 더욱 조회수를 끌어모으고 있는 중이다.

현세주의적인 한국인

이처럼 ‘생로먹방’을 보며 탐식에 대한 대리만족과 탐식에 대한 채찍질을 통해 동시에 쾌감을 느끼는 웃픈 현상에서 한국 사회의 몇 가지 화두를 읽을 수 있다.

첫째, 극심한 저출생과 고령화에 따른 미래를 이제 모두 본격적으로 예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늙어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거동이 불편한 불행한 상태로 90~100세까지 살아야할지 모르며,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젊은 세대도 턱없이 부족하리라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해결책은 고령까지 돌봄 서비스 없이 살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뿐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이 라면을 고르고 있다. 자극적인 가공식품을 배제한 건강한 식단과 운동은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추구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뉴스1

둘째는 이것이 경제적 양극화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가공식품을 배제한 건강한 식단과 운동은 경제적·시간적으로 여유롭고 삶의 스트레스를 덜 받는 사람들이 더 잘 추구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적인 저출산·고령화 대책은 출산 장려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까지 폭넓게 건드릴 필요가 있다.

셋째는 “TV에 먹는 것과 건강 얘기, 정치 얘기 빼고는 남는 게 없다”는 누군가의 불평처럼 먹방과 건강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발달한 한국 사회를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건강 교양 프로그램의 원조는 서구이며, 먹방은 2010년 경 한국에서 서브컬처로 탄생한 것이지만 이제 ‘mukbang’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 퍼졌다. 즉 건강과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잉글하트-벨첼 세계 가치관 조사 2023년 버전. 가로축은 생존 가치 대 자기표현 가치, 세로축은 전통적 가치 대 세속적 합리적 가치를 나타낸다. 한국은 세속적 가치와 생존 가치에 기울어 있다. 세계 가치관 조사.

그러나 2021년 17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미국 퓨 리서치센터의 설문조사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에서 대부분의 나라가 1위 ‘가족’, 2위 ‘직업’을 뽑은 반면, 한국은 1위 ‘물질적 행복’, 2위 ‘건강’을 꼽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조사가 왜곡되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잉글하트-벨첼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도 한국은 선진국 중에 드물게 ‘생존 가치’(경제적·물리적 안전)가 ‘자기표현 가치’(시민으로서 갖는 정치·경제·인권 등에 대한 관심)보다 우선시되는 나라로 나온다. 철학자 탁석산은 이를 가리키며 한국인이 식민지·전쟁·독재·극심한 좌우 대립의 후유증으로 지독하게 현세주의적이라고 한 바 있다. 넘쳐나는 먹방과 건강 프로그램, 그리고 이제 그들의 웃픈 결합까지 나오는 현상은 그 서글픈 방증이 아닐까.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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