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르륵 소리 조심" 이 영화에 붙은 '이색 안내문'

김상목 2024. 6. 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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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작 리뷰] <프렌치 수프>

[김상목 기자]

 영화 <프렌치 수프> 포스터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12살 때 남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하고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한창 사춘기로 접어들 시기에 온 가족이 함께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다행히 베트남 난민의 수난을 상징하는 '보트피플' 신세는 면하고 프랑스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식민제국이 선심을 쓰듯 받아준 과거 식민지 출신 이주민의 삶이 평온했을 리 없다. 알제리 독립전쟁 이후 발생한 난민과 귀환자 문제가 오늘날까지 사회적 쟁점이 되었다는 걸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소년은 다행히 큰 탈 없이 성장해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본 영화 한 편이 그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출하다>였다. 그는 뭔가 막혀 있던 당시 자신의 삶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했던 걸까? 그렇게 철학과 대학생은 영화에 도전한다.

1993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그 철학과 출신 청년의 첫 번째 장편이 초청되고, 기대되는 신예 감독에게 수여되는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다. 그 작품은 바로 <그린 파파야 향기>였다. 예술영화라면 서구 작가들의 전유물이라던 편견을 깨트려준 일군의 당시 동아시아 감독들 활약에 그 베트남계 프랑스 청년 감독의 작품 역시 추가된 셈이다. 중국의 첸 카이거, 대만의 차이밍량 같은 이들 작업과 해당 작품은 한 묶음으로 언급되곤 했다. 하녀의 운명을 향해 길을 물어 헤매다 도착한 어린 소녀의 호기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당시 유행하던 포스터 액자에 종종 들어가곤 했던 영화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남았다.

2년 후 감독은 두 번째 장편영화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꼽히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상(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그가 목숨만 건져 탈출했던 베트남으로 돌아가 그곳의 현주소를 예민한 시선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그리고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3부작 성격의 대미를 장식하는 2000년작 <여름의 수직선에서>도 호평을 얻는다. 아직 30대에 불과했던 그 감독의 미래는 탄탄대로로 보였다. 3편의 장편에 모두 출연했던 배우와 결혼하는 경사도 겹쳤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출발점이었다. 그가 베트남의 이국적 풍광의 다양한 단면을 포착하는 동시에 영화 강국 프랑스의 예술적 훈련을 겸비해 1세계 기술, 3세계 소재라는 이상적인 조합을 구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성공담일 테다.

하지만 이후로 그 감독 '트란 안 홍'의 이름은 사라졌다. 감독은 꾸준히 영화 작업을 이어갔지만 범작이라는 혹평과 실망이 21세기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그의 신작들은 이리 기울다 저리 기울다 하면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시아적 색채를 버리려다 강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프랑스 배경에서도 미지근한 데 그쳤다. 그렇게 한때 반짝하던 세기말 숱한 기대주에 머무는가 싶었다. 베트남 영화계 신진 감독들 지원에 공을 들인다던데 차라리 자기 자리를 찾아가나 할 만큼 어느새 트란 안 홍이라는 이름은 과거시제가 되어갔다.

하지만 20여 년 만에, 사실상 21세기 이후 거의 최초로 그의 새 영화에 주목과 찬사가 쏟아진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그게 사실인가?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궁금해하던 이들 앞에 펼쳐진 풍경은 무척 낯설었다. 감독의 영화라면 당연히 따라붙던 베트남의 아열대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프랑스의 좋았던 옛 시절이 펼쳐지고 '퀴진(부엌)'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대체 그 영화 <프렌치 수프>는 어떤 비밀을 듬뿍 농축하고 있을까? 한 번 확인해 보자는 충동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프랑스 요리로 시작해 프랑스 요리로 완결되다
 
 영화 <프렌치 수프>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때는 19세기 말, 과학과 이성의 시대인 동시에 제국주의와 세계전쟁의 그림자가 스르륵 솟아나던 초입이다. 한적한 교외에서 우아한 여성이 이른 새벽부터 경작지 곳곳을 분주히 누비며 채소를 거둔다. 찬찬히 관찰하니 농부의 수확이 아니라 요리에 쓸 재료를 선별하는 과정이다. 필요한 여러 가지를 확보한 여성은 보람찬 표정으로 귀환한다. 한편 아침 기상한 중년 남성이 그를 다급하게 찾는다. 사적으로 친밀하지 않다면 보여줄 수 없는 표정과 염려다. 그런 남성 앞에 의기양양하게 개선장군처럼 귀환한 여성이 오늘 쓸 재료를 구해왔다며 씩 웃는다. 곧이어 본격적인 준비와 그 수고를 누리는 손님들의 식사 장면이 장장 30분에 걸쳐 이어진다. 영화의 초반부는 온전히 이 만찬과 부엌 풍경에 바쳐진다.

반나절은 족히 걸린 것 같은 초반부 식사 장면과 그들이 먹어치우는 근사하고 조화로운 상차림은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해주지만 코와 위장에는 해롭기 그지없다. 그만큼 '누벨 퀴진'이라 우리가 대충 뭉뚱그려 언급하는 프랑스 요리의 정수가 시작부터 파도처럼 관객을 몰아붙인다. 그렇게 손님들을 만족시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하지만 여유 넘치는 표정의 여성 요리사는 온갖 신기를 보여주면서도 자신을 돕는 하녀 '비올레트'가 데려온 비올레트의 어린 조카 '폴린'에게 요리의 정수를 마치 시범 보이듯 친절하게 그려낸다. 관객은 폴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처럼 '부르기뇨트' 소스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수십 가지 재료가 세심하게 배열되어야만 하는 정교한 절차를 목격하게 된다. 이걸 보고도 경탄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는 감독의 씩 웃는 표정이 요리사 '외제니'의 보람찬 표정과 겹쳐 보이는 순간이다.

마침내 기나긴 만찬이 종료되었다. 주인과 손님들은 부엌으로 찾아와 요리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외제니가 진정한 예술가라며 누가 더 지극한 상찬을 풀어내는지 경쟁적으로 임한다. 레스토랑의 주인인 '도댕'은 그렇게 외제니에게 쏟아지는 예찬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하지만 외제니는 진정한 예술가는 따로 있다며 어떤 이름을 언급한다.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게 예리한 식감을 선보인 소녀 폴린에 대해 도댕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둘은 폴린이 평범하지 않다는 데 동의하지만, 도댕은 '마흔 전에는 미식가가 될 수 없다' 하며 과도한 기대를 식히려 한다. 하지만 결국 둘은 폴린의 부모에게 그가 재능을 지녔으니 한 번 자신들에게 맡기길 권하자는데 합의한다. 그리고 외제니와 도댕은 그들이 지난 20년간 벌여온 마치 자석의 극처럼 밀었다 당겼다 하는 정교한 감정의 교감 운동을 재개한다. 도댕은 간절하고 외제니는 생각이 복잡하다.

꽤 명망이 높은 미식가 도댕에게 이국의 왕자에게서 초대장이 도착한다. 그를 만찬에 초대해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다. 도댕은 자신의 만찬 동료들과 함께 참석하는 걸 조건으로 그에 응한다. 이 5인조는 자신의 식견과 부를 과시하고픈 왕자의 미식회에 다녀오지만, 화려하고 과시적일 뿐 제대로 된 식사는 하지 못해 속이 더부룩하다. 그들은 왕자의 장장 8시간 만찬에 대해 '풍성하지만 빛과 투명함이 없다'며 '관습만 있고 규칙은 없는 무질서한 행진'이라며 신랄하게 평한다. 도댕은 왕자를 이번엔 자신이 초청해 제대로 프랑스 요리를 선보여주겠다는 의욕을 보인다. 그에겐 외제니가 있으니 아무 걱정할 게 없다. 이참에 오랫동안 갈구해온 그의 꿈도 이루고 싶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영화 속 프랑스 요리에 가득 채워낸 시대와 역사의 향연
 
 영화 <프렌치 수프>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그저 몇 번의 식사 장면일 뿐인데, <프렌치 수프> 속에는 영화 초반 폴린과 관객을 동시에 경탄하게 만들던 부르기뇨트 소스 마냥 어마어마한 내용물이 가득 녹아 있다. 그저 눈을 즐겁게 만드는 화려한 프랑스 요리 풀코스를 기대했다면, 그 농축된 맛에 기절할지도 모를 수준이다. 그만큼 압도적이고 경이롭다. 이 영화는 배경이 된 시대상을 어떤 사회문제나 시사 쟁점 언급 없이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매끄러움을 시종일관 선보인다.

1885년, 서구는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며 그들의 시대가 무궁할 것임을 의심치 않던 시절이다. 특히 프랑스로선 '벨 에포크(좋았던 시절)'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요리에도 끝없는 변화와 혁신이 시도되던 때다. 겉은 뜨겁고 속은 차가운, 구현 불가능할 것 같던 모순적 비법 레시피에 의구심을 품은 손님들에게 도댕은 '거품 낸 계란 흰자는 훌륭한 단열재'로 미국의 과학자가 발견해 프랑스 요리에 최신 도입된 기술임을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요리는 과학'이라는 식이다.

폴린을 도제로 들이기 위해 외제니가 방문한 폴린의 채소밭에는 곳곳에 금속제 안테나가 세워져 있다. 이 흉물스러운 구조물의 용도를 묻는 외제니에게 폴린의 아빠인 농부는 안테나와 안테나가 땅속에 연결되어 지하에 전기를 흘리는 용도라 설명한다. 보온과 성장 자극을 위해 몇 년간 밭을 절반으로 나눠 실험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때는 쥘 베른의 과학소설이 창작되고 과학문명의 상상력이 분출하던 시기임을 웅변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도입부를 독차지한 도댕과 친구들의 만찬 장면은 그저 게걸스럽게 미식을 즐기는 식탐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요리와 와인을 향유하면서 그 음식들에 관련된 역사적 지식이나 이들이 만들어지는 복잡한 과정에 대해 막힘 없이 정보를 술술 풀어내고 토론을 벌인다. 그 대화 안에는 상식과 교양, 각자의 시각과 철학이 골고루 녹아들어 있다. 그 요리가 언제 어디서 탄생했고, 어떻게 역사의 현장에 함께 했는지 따라가려면 관객 역시 공부와 훈련이 제법 요구될 지경이다. 현학적인 과시가 아니라 자신들이 맛있게 먹은 음식에 대한 예찬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되기에 거부감보다는 경탄과 함께 본인의 무식을 한탄하게 만드는 순간들이다.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유서 깊은 와인 맛에 경탄하면서 중세 교회와 세속권력의 대립 결과인 교황의 아비뇽 유수와 그에 대한 평가가 흘러나오는 식이다. '와인은 역사를 바꿀 수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민감한 쟁점을 부드럽게 구현하는 재치가 가득 깃들어 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19세기 프랑스 요리계의 혁신과 변화가 개괄적으로 해설된다. 언급되는 이름 하나하나 허투루 등장하지 않는다. 초반에 외제니를 향해 예술가라 칭송하는 손님들에게 그는 겸손한 표정으로 '진정한 예술가'는 앙토냉 카렘뿐이라 언급한다. 19세기 초 활동한 천재 요리사이자 '프랑스 요리의 왕'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그는 국내에서도 요즘 유행하는 디저트 '에클레어'를 처음 만들었고, 오늘날 프랑스 요리를 넘어 프랑스의 소프트 파워를 상징할 때 다양한 의미로 인용되는 '에스카르고', 즉 달팽이 요리를 부활시킨 사람이다.

폴린에게 외제니가 비밀을 공개하듯 보여주는 레시피 북에는 친절한 삽화가 가득하다. 앙토냉 카렘은 우리에겐 '셰프'의 상징 그 자체인 요리사 모자를 창안한 이이기도 한데 그 기원을 옛날 동화처럼 소개해주는 대목이다. 아마 외제니가 평생 카렘의 책에서 메모해 암기했을 대목, "요리사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데서 일하는 사람이다"라는 문구는 곧 외제니의 정체성 자체가 된다.

도댕은 '주방의 나폴레옹'이란 칭호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한다. 실제로 요리에 뛰어난 것은 물론 다방면에 지식과 교양이 출중함을 영화 속에서 잔뜩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도댕의 친구들 역시 만만한 이들일 리 없다. 그들은 각각 명망 높은 의사, 혁신적인 농장주, 법률 전문가 등 지역사회의 유지라 할 이들이다. 그들은 함께 과시욕 가득한 외국 왕자의 마치 혼돈의 도가니 같은 8시간 만찬에 다녀온 후 이구동성으로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해"라며 한탄한다. 아마 감독이 프랑스 요리에 대해 정의를 내린 결론 그 자체일 테다. 도댕이 외제니와 폴린의 장래에 대해 토론을 벌이며 강조하던 '마흔 전에는 미식가가 될 수 없다'는 지론 역시 프랑스 요리에 대한 단순한 자긍심을 초월해 실제로 요리가 가진 삶과 세상의 기여분을 정당하게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요리 메뉴가 곧 이야기가 되는 경지의 작업
 
 영화 <프렌치 수프>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그런 영화의 태도가 명백하기에, 이야기 전개 역시 프랑스 요리의 정수를 나눠 가진 몇 개의 요리들을 통해 구현된다. 무수한 메뉴가 가득 등장하지만 그 핵심이 되는 개별 요리들의 제조과정과 정체성은 곧 <프렌치 수프>가 선보이려 하는 이야기의 주제와 직결된다. 영화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될 지점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30분간 진행되는 첫 번째 만찬은 정석적인 코스 순서로 진행된다. 원래 프랑스 요리는 화력을 집중하듯 거대한 상에 오만가지 메뉴가 과시적으로 올라오던 '오트 퀴진', 즉 중세 왕후와 귀족들의 시끌벅적한 성찬이지만 근대 이후 좀 더 간소하고 손님을 배려하는 '누벨 퀴진'으로 변모해 갔다. 그리고 음식이 빨리 식거나 굳어버리는 걸 막기 위해 시간차를 활용한 코스 요리 개념이 러시아 요리 영향으로 19세기에 도입되기에 이른다. 그런 절차의 기원과 개념을 떠올리며 이 만찬을 즐긴다면 많은 걸 찾아낼 수 있다.

시작은 수프다. 그것도 걸쭉한 '포타주'가 아니라 맑게 걸러낸 '콩소메(Consommé de volaille)'가 출발을 알린다. 앞으로 많은 걸 위장에 집어넣을 이들에게 준비 동작을 위해 적절한 시작점이지만 맛 역시 포기할 수 없기에, 겉보기엔 그저 투명한 국물이지만 그 내용물은 여러 고기와 야채를 잔뜩 끓여내 헝겊으로 그 진액만 맛보기로 내놓은 것이다. 두 번째로는 프랑스 제빵의 자랑 중 하나인 '페이스트리'가 차지한다. 그런데 그저 수십 수백 겹으로 첩첩 쌓인 페이스트리가 아니다. 속을 파내고 수십 종류의 고기와 해산물, 야채를 소스로 버무려 채운 뒤 빵 껍질로 뚜껑을 덮은 채 등장한 이 요리 '볼로방(Vol-au-vent)'부터 대체 무슨 맛이 날까 침샘이 폭발할 법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우리가 선망하는 빵 속에 수프가 채워진 요리의 끝판왕 격이다.

그리고 뒤이어 푹신한 스펀지케이크 속에 아이스크림을 채우고 머랭으로 덮어 오븐에 구운 디저트가 등장한다. 겉은 불기운이 살아 있는데 속의 아이스크림은 녹지 않았다. '오믈레트 노르베지엔(Omelette norvégienne)', 노르웨이산 오믈렛이다. 아마 이 요리를 처음 만든 셰프는 온통 눈으로 덮인 '노르웨이의 숲'을 발견하길 기대했을 테다. (감독의 이전 작품 중 하루키의 소설을 각색했지만 망작으로 혹평받은 <노르웨이의 숲>과 묘하게 연결되는 대목이다) 요리사는 천지창조도 가능케 하는 '예술가'라는 격찬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영화감독이 화면 속 세계를 창조하듯 요리사도 가능하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제 시련의 순간이다. 외국 왕자의 도전에 참전하기 전 도댕과 친구들은 외제니가 아닌 다른 요리사의 음식을 맛보려 외딴 자리를 찾는다. 앙토냉 카렘의 뒤를 이어 프랑스 요리계의 거목이자 전환점 역할을 한 오귀스탱의 레시피에 따른 '오르톨랑(Ortolan)' 시식회다. 멸종위기종인 멧새 '오르톨랑'을 원래 2배로 푸아그라 제조과정처럼 살찌운 뒤 고급 와인에 익사시켜 오븐에 구운 요리다. 그 잔인한 요리법 때문에 현재 종 보호 차원에서 금지되었지만 고 미테랑 대통령이 임종 직전 원래 1개만 먹을 수 있는 걸 2개나 먹었다는 비화처럼 환상의 미식으로 유명한 이 오르톨랑을 전해지는 시식 과정을 완벽 재현해 선보인다. 궁금하다면 영화에서 확인해 보시라.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직후 연결되는 왕자의 8시간 만찬은 그저 스치듯 지나쳐버린다. 극 중 손님들이 평가하듯 굳이 언급할 의의가 없는, 프랑스 요리의 외형만 갖췄을 뿐 실제 정신과는 무관하다는 문화적 자부심에 의한 것일 테다.

그 대신 소개되는 요리법과 결과물은 언뜻 소박하고 평범해 보인다. 도댕은 원인불명의 증상으로 자꾸 쓰러지는 외제니를 염려해 손수 수프를 끓인다. 어릴 적 자식들이 속에 탈이 나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발을 구르며 만들어주시던 죽을 떠올리면 공감이 쉬운 순간들이다. 도댕 역시 조금이라도 먹고 기운이 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조심스레 간을 보고 수프를 우려낸다. 닭죽이나 삼계탕이 보양식이듯 도댕 역시 치킨 수프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애틋한 노력 덕분에 20년 동안 외제니에게 감히 다가서지 못하던 교감의 단계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 순간을 함께 맞이한 건 아무 특징 없는, 오직 만든이의 마음과 함께 하는 '완두콩 벨루테(Green pea velouté)' 수프다. 콩소메와 달리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보기만 해도 걸쭉하다. 외제니를 위해 수프를 끓이고 요리를 대접하는 정성, 최고의 요리는 남이 해준 음식이란 명제를 증명하듯 외제니는 그가 오랫동안 품었던 의구심, '결혼하고도 문 안 열어줄 권리가 있을까요?'를 거두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 태도변화에 마침표를 찍게 한 건 '푸아르 포셰(Poire pochée)'다. 배의 껍질을 벗긴 후 오랜 시간 졸여만든 달콤한 디저트는 인생에 비견되는 식사의 마무리로 더 바랄 게 없다.

도댕은 왕자에게 프랑스 요리의 정수를 알려주기 위해 초대를 준비한다. 그런데 메인 요리가 충격적이다. 프랑스 서민들의 식탁을 오랜 시간 상징해온 요리이지만 절대로 만찬에 올라올 일은 없던 메뉴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자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외국 정상에게 대접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도댕은 당황해하는 친구들과 외제니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대접할 메뉴표를 소개한다. 그 메인 메뉴가 바로 포토푀(Pot-au-feu)'다. 여러 가지 고기와 야채를 오랫동안 약불에서 서서히 끓여낸 수프다. 아마 프랑스 요리가 그저 화려한 게 아니라 마음과 세상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으로 발달해 왔음을 알리고픈 '진심'의 선택이었을 테다. 이 영화에서 조명되는 요리는 곧 프랑스 문화이자 세상이자 마음인 셈이다.

감독의 화려한 복귀에 담긴 건 그가 품은 세월과 세상을 보는 눈
 
 영화 <프렌치 수프>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그렇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평범해 보이는 단출한 사건 연속이 아니라 요리와 그에 반응하는 인물들의 상호운동에 따라가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구석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저 가격표나 화려한 외관, 유명세로 평가할 수 없는 요리의 정수가 오랫동안 찬찬히 공들여 촬영된 요리법으로 구현되기에 영화는 먹방물이 자주 취하는 '슬로-무비' 특성을 여실히 선보인다. 눈 크게 뜨고 요리가 천지창조 과정처럼 탄생하는 과정을 황홀경으로 응시하던 관객은 그 요리를 먹는 이를 질투하며 관찰할 테다. 그리고 그 요리가 만들어지는 공간, 요리사의 천지창조 현장인 부엌(퀴진)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외제니와 도댕의 부엌을 계속 보여주지만 막바지에 장대한 롱 테이크 장면에서 그런 반복은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는데, 이는 외제니와 도댕의 수십 년간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고 그들이 무엇에 도달했는지를 집대성하는 결착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명장면이다. 요리는 인생이자 삶 자체이며 세상이라는 프랑스 요리 애호가들의 재수 없어 뵈던 장광설이 사실 맞는 말이구나 하고 인정하게 해주는 마법의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베트남 출신 감독이 프랑스에 안착하고 다시 세계로 나아가는 그의 인생 편력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프렌치 수프>를 보고 나서 궁금한 바람에 트란 안 홍 감독의 데뷔작 <그린 파파야 향기>를 다시 재생해 봤다. 폴린과 또래인 어린 주인공이 겁에 질린 눈으로 주인집 대문을 들어서던 표정은 이어 그가 베트남 가정식 요리를 배우는 장면들로 연결된다. 그 영화에서도 베트남 요리를 만드는 과정은 천천히 또박또박 상세하게 조명된다. 그저 먹방이 아니라 그 묘사를 통해 주인공의 캐릭터와 그가 겪는 삶의 과정이 소개되는 활용 앞에서 이 20세기 말 촉망받던 감독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서구 영화제와 평단을 유혹하던 3세계의 낯선 요소가 아니라 자신이 정착해 뿌리를 내린 프랑스 문화를 온전히 소화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으로 귀환한 점은 여러모로 감독이 그저 전성기에 대한 향수를 넘어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도 치환될 수 있겠다. 이민자에 대해 야박해지는 프랑스 현재에 대해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라는 작가적 발언 격이다.

영화의 크레디트를 응시하다 문득 반가운 문구를 발견한다. 감독의 영화적 페르소나에서 인생의 반려자로 부침을 함께 통과해 온 아내 트란 누 옌 케에게 바치는 헌사다. 아마 1920년대 쓰인 소설 원작에 굳이 주목하게 된 것도 작품 속 도댕과 외제니의 관계에서 자신과 아내의 지난 여정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의상과 아트 디자인을 담당한 '동료'이기도 한 아내 누 옌 케의 과거와 현재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여기에 감독이 야심차게 선보인 '누벨 퀴진' 요약판 같은 영화 속 요리 연출을 위해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요리사 중 한 명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참전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요리 지도는 물론 특별출연도 했다.) 제작과정 에피소드로 모든 게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요리인지라 촬영 당시 음식 먹느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걸 어찌 막겠나 싶을 지경이다.

그렇게 영화는 프랑스 요리라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그득한 만찬 대신에 거기에 담긴 정수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수프가 제목으로 소환된 건 그런 감독의 의도를 잘 반영한 결과물인 셈이다. 트란 안 홍은 오랜 어둠을 견뎌내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강점과 출발선 때 의지를 조화롭게 풀어낸 영화 만찬으로 귀환신고를 제대로 마쳤다. 새로운 전성기가 시작될지 모를 감독이 차려낸 성찬을 즐기면 될 일이다. 다만 배급사가 친절하게 공지한 안내를 놓치면 안 될 일이다. 모르고 보다가 큰 낭패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렌치 수프>에는 꼬르륵 소리를 유발할 수 있는 요리와 음식 장면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공복인 상태의 관객 분들께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관람에 유의 부탁드립니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배를 꽉 채울 필요는 없다. 간단한 수프나 전채(오르되브르) 정도로 속이 너무 쓰리지 않게만 한 뒤 영화를 보면 된다. 아마 마치고 나면 곧바로 넘치는 식욕을 주체할 수 없게 될 테니까 말이다.

<작품정보>

프렌치 수프 The Taste of Things
2024│프랑스│로맨스/멜로/드라마
2024.06.19. 개봉│135분│12세 관람가
연출&각본 트란 안 훙
출연 줄리엣 비노쉬(외제니 역), 브누아 마지멜(도댕 역),
엠마뉄 샐린저(라바즈 역), 갈라테아 벨루지(비올레트 역), 보니 샤뇨-하부아(폴린 역)
아트 디자인/의상 트란 누 옌 케
음식 연출 피에르 가니에르
원작 [도댕 부팡의 삶과 열정 La Vie Et La Passion de Dodin-Bouffant, Gourmet]
(1920-24년, 작가 마르셀 루프)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제공/배급 ㈜플레이그램
공동배급 ㈜올랄라스토리

2023 76회 칸영화제 감독상
2023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컬리네리 지네마상
2023 보스턴비평가협회상 촬영상
2023 밀밸리영화제 월드시네마 관객상
2023 몽클레어영화제 월드시네마 관객상
2024 온라인비평가협회상 음식연출상
2024 뤼미에르영화제 촬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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