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 유사시 자동참전 길 열렸지만…브레이크도 심어놨다

박현주, 조수진 2024. 6. 2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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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평양에서 열린 북·러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뒤 악수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북한과 러시아가 19일 체결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통해 한반도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런 시나리오를 막을 수 있는 일종의 '제동 장치'도 달아뒀단 해석이 나온다. "한국과 교전 중"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이 러시아의 군사 원조를 자기 편의에 맞게 활용하는 걸 막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이번 조약이 외교적 고립에 빠진 북한을 안심시키면서도 실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에 유리하게 설계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유엔 헌장·국내법' 새로 삽입


북·러 조약 4조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돼 있다.

이 중 '유엔 헌장 51조'와 '북·러 (국내)법에 준한다'는 대목은 북한과 옛 소련 간 자동 개입을 명시한 1961년 '조·소 상호방위조약'에는 없는 내용이다.

러시아 연방 헌법은 '러시아 영토 밖에서 러시아 연방의 군사력을 사용하는 문제의 결정은 상원의 권한'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북·러 조약에 따라 '지체 없이 군사 원조'를 제공하려 해도 러시아 상원 재적 의원 과반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집단 방위' 조항이 담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헌장 등 자동 개입을 명시한 여타 조약들은 이처럼 '국내법에 따른다'는 전제를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 국제법 학자들 사이에서 "100% 자동 개입 조약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19일 김정은과 푸틴이 평양 금수산영빈관에서 원탁에 마주앉아 단독으로 회담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또한 북·러가 준용하기로 한 유엔 헌장 51조는 '유엔 회원국에 무력 공격이 있을 경우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가질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51조는 동시에 안보리가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로 자위권 행사를 사실상 제한하고 있다.

러시아가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지닌 상임이사국이라는 점에서 러시아 국내법뿐 아니라 유엔 헌장이라는 '이중 장치'로 자동 개입 의무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뒀단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자동 개입의 구체적인 실행은 양국의 법적 절차와 정치적 결정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라며 "원칙적으로는 북·러 조약에 따라 자동 개입을 약속하지만 실제 상황에선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재민 기자


직전엔 "위협 제거 협조" 명시


특히 문제의 4조 직전에 나오는 3조가 사전 절차이자 '완충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조는 "어느 일방에 대한 무력 침략 행위가 감행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협이 조성되는 경우"를 전제로 일방이 요구할 경우 "서로의 입장 조율", "조성된 위협을 제거하는 데 협조", "협상 통로를 지체 없이 가동" 등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협의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실천적 조치를 합의할 목적"으로 이뤄지게 돼 있다.

이 역시 1961년 조·소 조약에는 없는 내용이다. '자동 개입'으로 해석될 수 있는 4조를 발동하기 전 3조부터 실행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협의'부터 선행하자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 가령 한·미 연합 훈련 등 대북 압박 조치를 확장 해석해 북한이 러시아에 공조를 요구할 경우 즉시 개입이 아닌 긴장 완화에 방점을 두고 우선 협의를 진행한다는 뜻이다.

19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진행된 푸틴 환영식. 노동신문. 뉴스1.


한 외교 소식통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가 지금 북한을 돕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러시아는 이번 북·러 조약을 통해 신냉전 구도를 공고히 하고 한반도 문제에서 북·러와 한·미가 서로를 함부로 못 건드리는 '힘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평시' 北보다 '전시' 러시아에 유리


무엇보다 이번 북·러 조약은 현재 명확한 '전시' 상태인 러시아가 '평시'인 북한보다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4조가 '군사적 및 기타 원조 제공'의 발동 조건으로 '전쟁 상태'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지난해부터 포탄·미사일 등 전시 물자를 러시아에 전폭적으로 제공해오던 북한은 이제 이번 조약으로도 원조 의무에 구속된 셈이다.

반면 말로는 "전쟁 준비"를 외치지만 엄연히 '정전' 상태인 북한은 '위협 제거'를 권고한 3조의 상황에 더 가깝다. 북한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4조를 발동하려면 적어도 '북한이 무력 침공을 받았다'는 전제가 성립돼야 하는데, 한·미가 북한을 먼저 공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19일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푸틴 환영 공연. 노동신문. 뉴스1.


또한 유엔은 총회 결의 3314호(1972년)에서 '침공'(act of aggression)을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주권, 영토 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에 반하는 무력 사용 또는 기타 유엔 헌장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가령 북한이 남측을 먼저 공격해 한·미가 자위권 차원의 대응으로 북한에 무력을 쓰는 건 '침공'이 아닌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새로운 북·러 조약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도발에 대해 정부가 공언했던 "비례적 수준을 넘은 압도적 대응"은 여전히 유효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미국 CNN 방송은 20일(현지시간) "푸틴과 김정은이 서명한 새 조약의 4조를 통해 북·러는 나토 헌장의 5조와 유사한 군사 동맹을 맺었다"고 평가했는데, 큰 틀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점도 있다. 나토 헌장 5조는 "어느 체결국이든 공격받을 경우 그것을 전체 체결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했지만, 북·러 간 새 조약엔 그런 규정이 없다. 명시적 자동 개입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오는 이유다.

결국 '선택권'을 지닌 러시아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북·러 조약의 실질적인 효력이 달라질 수 있는 셈이다. 러시아는 자국 주도의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인 아르메니아와 자동 개입을 약속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도 2022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전력이 있다.

한편 이번 북·러 조약의 효력은 무기한이다. 효력 중지를 원할 경우 상대 측에 서면으로 통지하면 1년 뒤 효력이 중지된다. 실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조약은 기한을 두지 않으며, 효력 정지를 위한 사전 통보를 규정하고 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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