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세계인권선언 등이 말하는 ‘보편적 인권’, 구약성서에도 나오네

양민경 2024. 6. 2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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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일치 군주제와 신분제가 일반적이던 고대 근동 사회에서 이런 법 제도가 탄생했다는 게 어불성설 같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신명기에는 고아와 과부, 여성과 나그네 등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종)의 권리를 보호하는 율법이 곳곳에 등장한다.

저자는 이외에도 현존 최고(最古)의 성문법인 함무라비법전 등 고대 근동의 법과 구약의 '언약법전'(출 20:22~23:19)을 비교하며 율법 특유의 독특성을 밝힌다.

율법에 드러난 양성평등과 여성 인권을 다루는 부분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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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인권이 있었다/민경구 지음/IVP
고대 근동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함무라비법전은 현존 최고(最古)의 성문법으로 알려있다. ‘태초에 인권이 있었다’ 저자는 함무라비법전 등과 구약의 ‘언약법전’을 비교하며 율법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사진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함무라비법전 석비. IVP 제공

노동자의 쉴 권리 보장과 임금 체불 금지,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 무죄 추정의 원칙, 인신 매매·고문 금지, 극빈자 부채 탕감…. 현대 민주주의 국가 헌법에서나 볼 법한 이들 내용이 기원전 기록된 구약성서에 담겼다면?

제정일치 군주제와 신분제가 일반적이던 고대 근동 사회에서 이런 법 제도가 탄생했다는 게 어불성설 같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신명기에는 고아와 과부, 여성과 나그네 등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종)의 권리를 보호하는 율법이 곳곳에 등장한다. 가족 해체를 막기 위해 부모 채무에 자녀의 연대 책임을 묻지 않는 내용도 있다.(신 24:16)

구약성서 속 율법에 나타난 인권을 집중 조명한 이는 성서학자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는 민경구 교수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영과 토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가장 먼저 인간 창조에서 비롯된 ‘만민평등사상’에 주목한다.

신명기는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한다.(신 27:17) 경계표는 개인의 재산권을 상징하는 표지로 고대 근동에서 사용됐다. 사진은 바빌론에서 사용한 경계표인 '쿠두루'(kudurru). IVP 제공

창세기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됐다며 절대자 앞에 모든 사람이 동등함을 천명한다.(창 1:26~28) 지금에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개념이지만 당대로선 이해하기 힘든 별난 접근이었다. 창세기와 흔히 비교되는 바벨론 제국의 창조 설화 ‘에누마 엘리쉬’는 인간의 창조 목적을 ‘신들의 수고를 대신 짊어지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논리를 영리하게 활용한 게 당대 지도층이다. 이집트의 파라오 등은 ‘신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며 절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런 주변 가운데 창세기는 만민 평등을 외칠 뿐 아니라 살인의 부당성도 설파한다. 신의 형상을 지닌 동등한 존재끼리의 살육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자신 있게 “태초에 인권이 있었다”고 말하는 이유다.

저자는 이외에도 현존 최고(最古)의 성문법인 함무라비법전 등 고대 근동의 법과 구약의 ‘언약법전’(출 20:22~23:19)을 비교하며 율법 특유의 독특성을 밝힌다. 현재 세계 각국이 고민하는 난민에 대한 권리와 처우도 이 중 하나다. 일명 ‘도망한 종에 대한 율법’(신 23:15~16)이다. 종의 도주를 본다면 그를 주인에게 되돌리지 말고 원하는 곳에 거주하도록 허용하라는 게 핵심이다.

16세기 독일 화가 대 루카스 크라나흐의 '에덴동산' 중 아담과 하와 부분. 당대의 여성관이 반영돼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뱀의 모습이 동물 아닌 여자로 묘사됐다. IVP 제공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이었다. 종이 사라지면 주인은 가산에 손실을 보기에 도주하는 종을 주인에게 무조건 송환하는 게 일종의 ‘국제 조약’이었다. 그럼에도 율법은 ‘주인의 재산권’과 ‘종의 생명권’ 가운데 후자를 중시한다. 이는 ‘거주 및 이동의 자유와 박해를 피해 망명할 권리’를 명시한 세계인권선언 제13~24조를 상기시킨다. 저자는 오스트리아 신학자 게오르크 브라울릭의 연구를 인용해 “유엔 세계인권선언 30개 조항 가운데 22개가 신명기 내용과 연결돼 있다”며 “성서 규정이 오늘날 보편적 인권 개념으로 수용됐다”고 강조한다.

율법에 드러난 양성평등과 여성 인권을 다루는 부분도 신선하다. 저자는 창세기 1장 27~28절을 근거로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시 창조’됐음을 주장한다. 교회 안팎에서 상식으로 통용된 ‘남성의 갈빗대로 여성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창세기 2장에 들어가서야 나오는데 그간 주요 교부와 신학자는 이 내용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여성 창조 기사의 왜곡은 각 시대의 여성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한 뱀이 아예 여자의 형상으로 묘사된 중세 시대 작품이 꽤 많은 것도 이런 시각을 반영한다.

그간 인문학에서 주로 다뤄진 인권을 신학 관점에서 해부한 흔치 않은 책이다. 히브리어 원문을 해석해 율법의 진의를 밝힌 뒤 이에 영향을 받은 현대 법률을 열거한 끝에 저자가 얻은 결론은 “현대 인권의 기원은 성서와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 인권이 명시돼 있음에도 기독교 사(史)에서 인권은 줄곧 경시됐다. ‘율법에 대한 망각’이 성서가 말하는 ‘인간에 대한 망각’을 가져온 것”이라는 저자의 지적이 날카롭다. 성 평등 문제, 난민과 이주노동자 처우 등 각종 현안이 산적한 현시대의 교회가 진지하게 새길만 한 교훈이 적잖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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