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피너츠>에 첫 흑인 캐릭터가 등장하게 된 이유

김준수 2024. 6. 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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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다양성, 편견, 차별에 관한 책, 박상현 지음 <친애하는 슐츠씨>

[김준수 기자]

20세기 미국의 인기 만화가 찰스 슐츠가 그린 만화 <피너츠>(Peanuts)는 한국에 '스누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50년에 연재가 시작될 때 <피너츠>의 모든 캐릭터는 백인이었고,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인종분리 정책이 합법이었다. 

<피너츠>에 다른 인종의 캐릭터, 정확하게 말하면 흑인 캐릭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연재를 시작한 지 18년이 지난 1968년이었다. 미국에서 1960년대는 흑인 민권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흑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8년 4월 백인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두 달 뒤에는 흑인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던 로버트 F. 케네디 상원의원이 대선 선거운동 중 암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너츠>에 흑인 캐릭터가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작가 찰스 슐츠는 어떤 고민 끝에 새로운 캐릭터를 연재 18년 만에 새롭게 등장시킨 걸까?

다양성과 편견에 관해 흥미롭고 자세한 사례들을 소개한 책 <친애하는 슐츠씨>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됐다. 

독자와 편지 주고받으며 만든 변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교사로 일하며 세 아이를 키우던 여성 해리엇 글릭먼은 인기 만화작가 슐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한 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 직후였다. 글릭먼이 타자기로 쓴 편지의 앞부분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슐츠씨께. 저는 마틴 루터 킹이 세상을 떠난 후로 우리 사회에서 (킹 목사의) 암살로 이어지게 된 상황, 오해와 공포, 그 폭력의 바다를 만드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본문 중에서) 

글릭먼은 미국 사회가 변화하여 인종 사이의 편견을 극복하는 데까지는 한 세대가 넘는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데"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피너츠>가 인종 간의 우정과 관용을 도모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독자인 글릭먼이 <피너츠>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중 흑인 아이 캐릭터를 넣을 것을 제안한 것이다. 
 
 2024년 애플TV+ 플랫폼에 공개된 <피너츠(스누피)> 특별편 'Welcome Home, Franklin' 중 한 장면. 흑인 캐릭터 '프랭클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담았다.
ⓒ 애플TV+
 
이에 슐츠 작가는 답장에 "흑인 이웃들을 내려다보는 태도로 보일 것 같아"서 선뜻 다른 인종 캐릭터를 넣지 못하고 있다며 "저는 해결책을 모르겠습니다"라고 썼다. 새 흑인 캐릭터를 묘사하는 시도가 어쩌면 시혜적인 태도로 보일까 우려한 것이다. 

몇 통의 편지가 더 오고갔고, 슐츠 작가는 글릭먼과 그의 이웃이 보낸 의견을 정중하게 읽고 또 답했다. 여러 사람의 고민 끝에 1968년 7월 <피너츠>에 첫 흑인 캐릭터 '프랭클린'이 등장하게 된다. 프랭클린은 주인공 찰리 브라운과 야구, 수영 등을 소재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전까지 흑인이 미국 미디어에서 주로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등장하던 것과 달리 주인공의 이웃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다. 이후 미국 미디어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났고, 더 이상 흑인이 등장하는 게 오늘날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약 60년이 지난 2024년 애플TV+ <피너츠> 특별편에서는 프랭클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제작된 에피소드가 공개되기도 했다. 

여성 옷의 작은 주머니가 보여주는 것 
 
 여성 의류의 경우 주머니가 작게 달려있거나 아예 주머니가 없는 경우도 있다.
ⓒ Pixabay
 
1899년과 2023년, 124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각각 발행된 두 건의 <뉴욕타임스> 기사에서는 똑같은 질문이 나온다. "남자 옷에는 주머니가 많은데 왜 여자 옷에는 주머니가 드물까?"라는 물음이다. 남자 옷에는 깊이가 충분한 주머니가 잘 달려있는데, 어째서 여자 옷에는 주머니가 너무 작거나 아예 찾아보기 힘든 걸까? 
 
1899년 8월 <뉴욕타임스>에 등장한 기사는 "아담과 이브가 세상에 왔을 때는 둘 다 주머니가 없었을 텐데, 그 후로 남자와 여자는 주머니와 관련해서 완전히 다른 발전 양상을 보였다. 남자 옷의 주머니는 발전하고 개선되고 그 수도 늘어난 반면 요즘 여자 옷은 오히려 후퇴해서 두 세대 전 사람들이 입던 옷보다 오히려 주머니의 숫자가 줄어들었다"라는 얘기로 시작한다. (본문 중에서)  

책 <친애하는 슐츠씨>에서는 남자와 여자 옷 주머니 차이에 관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주머니의 역사부터 파고들면서 그 맥락을 짚어낸다. 허리띠에 차서 늘어뜨리던 주머니를 바지 안쪽으로 꿰매 넣음으로써 1550년 처음으로 바지 주머니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남성 중심으로 한정된 걸까? 
 
 책 <친애하는 슐츠씨>의 표지 사진
ⓒ 어크로스
 
그 배경에는 주머니를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이 곧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역사가 있다. 1579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머니에 무기를 넣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고, 같은 시대 프랑스에서는 앙리 3세가 총이 들어갈 만한 주머니 부착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흑인이 노예가 되던 시절에는 노예들의 옷에 주머니를 만드는 것이 금지된 시기도 있었다. 긴 역사를 놓고 보자면 남자 옷과 여자 옷의 주머니가 다른 것도 각자 다른 위치에 따른 압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분명히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정도가 다른 데도 말이다.  
 
아이폰X가 완전히 들어가는 여자 옷 주머니는 40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남자 옷에는 100퍼센트 들어간다. (본문 중에서) 
  
무지에서 비롯되는 차별과 편견을 짚은 책 

앞서 언급한 인기 만화 <피너츠>의 사례가 <친애하는 슐츠씨>에 또 한 번 등장하는 지점이 있다. 1970년대 여성들이 스포츠계에서 차별을 겪던 시기에 <피너츠> 속 여성 캐릭터들이 테니스와 하키 등 스포츠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인물로 묘사된 것이다. 

책에는 1967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여성이 처음으로 참가했으나 제지를 겪어야 했던 일이 언급된다. 프로 스포츠 선수뿐만 아니라 당시 학교 안팎에서도 여자아이들이 체육을 하는 것 자체를 어색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짙었다고 한다.

<친애하는 슐츠씨>의 저자는 "미국인들이 <피너츠>의 캐릭터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자아이들이 스포츠 활동을 하는 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슐츠 작가의 아내 진 슐츠의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진 슐츠는 남편의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여성들이 불평을 하고 법안 통과를 촉구했기 때문이지, 남성들이 준 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친애하는 슐츠씨>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차별과 편견을 실제 벌어진 사건들을 예시로 자세히 짚은 책이다. 저자가 직접 인종, 성별, 성정체성과 성적지향, 빈부격차, 정신건강 등에 관한 사건을 들려주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쉽게 읽어나갈 수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첫 걸음은,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아닐까. <피너츠>의 작가 찰스 슐츠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독자의 편지에 응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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