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전쟁에 빨려들어갈 위험, 더 커졌다
제 의견을 피력할 때에는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혹은 '조선'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조선에 대한 인식은 달라도 윤석열 정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대화는 말 그대로 상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인데, 상대가 반감부터 갖게 되는 표현은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너진 남북관계와 위기에 처한 한반도 평화를 재설계하기 위해서는 적대성의 완화와 대화 재개가 필수적입니다. 서로 '제 이름 부르기'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구합니다. <기자말>
[정욱식 기자]
▲ 북한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평양에서 열린 양자 회담 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19일 조선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가장 시선을 끈 내용은 제4조로서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부분이다.
이는 북·러가 사실상의 상호방위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체 없이"라는 표현은 '자동개입'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유엔헌장 제51조와 각자의 법을 언급한 부분은 해석상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다른 상호방위조약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상호방위조약과 비교해 보면
한미상호방위조약 3조는 제3자의 무력공격 시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고 되어 있다. 미일상호방위조약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헌법상의 수속은 대체로 국회(의회)의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동개입이 조약상의 의무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대규모의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어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간주되곤 한다.
32개 회원국이 집단방위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는 어떨까? 북대서양조약 5조는 '동맹국에 대한 외부의 무력 공격을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를 근거로 나토에는 자동개입 조항이 있다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5조에 대한 나토의 공식적인 해석을 보면, 회원국의 원조가 "반드시 군사 원조일 필요는 없고… 기여 방식은 회원국의 결정에 따른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 사이의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토는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은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이 보장되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그러한 공약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이 중국과 1961년 7월에 체결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조약 2조에는 "조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조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일반적인 상호방위조약과 달리 사실상의 자동개입 조항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들 조약과 북·러 조약을 비교해 보면, 주목할 만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북·러 조약이 상기한 조약들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들을 모두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에서 언급된 국내법, 나토에 담긴 유엔 헌장 51조를 북·러 조약에 담은 것은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이 두 가지를 언급하면서 '합법적이고 방어적인 조약'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또 북·중 조약과 비교해 보면 "유엔 헌장 제51조와 북·러의 법에 준하여"라는 표현만 포함되었을 뿐 조항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북·러 관계가 북·중 관계에 준하는 수준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양국이 조약 전문을 전격 공개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쌍방 사이의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고 조선중앙TV가 20일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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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러 조약은 한반도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정세가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조선은 자체적으로 '안보 3중 장치'를 갖게 되었다고 확신할 것이다. 기존의 북·중 조약과 고도화를 거듭하고 있는 핵 무력에 이어 군사 강국이자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의 동맹도 사실상 회복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 한미동맹 강화 및 사실상의 한미일 삼각동맹 추구 등과 맞물려 한반도가 신냉전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상가상으로 남북관계마저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엔 냉전 시대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윤석열 정부와 김정은 정권이 이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신냉전의 한복판으로, 그것도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나날이 강해지는 군사력과 동맹에 미소 짓고 있는 남북의 지도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동맹을 갖게 되었다고 자랑하는데, 과연 한국과 조선의 안보는 튼튼해지고 있는가? 군비경쟁과 안보딜레마를 격화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당사자가 바로 자신들은 아닌가?
전쟁과 군비경쟁과 지정학적인 대결이 첨예해지고 있는 국제사회에서 동맹 강화가 한반도의 운명을 타자화할 위험은 없는가? '몽유병자'처럼 동맹의 체인에 엮여 원하지 않는 전쟁에 빨려 들어가게 할 위험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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