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8년 차... '교과서처럼' 살아왔는데 또 떨어졌다

이정희 2024. 6. 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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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

[이정희 기자]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의 한 장면.
ⓒ JTBC
 
취업준비 8년 차, 그중에서도 공무원 시험만 8년 동안 도전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김훈의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중 '영자'는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주인공을 내세운다. 
 
'저녁 여섯 시 무렵 노량진에서는 각자, 저마다, 혼자서 시장했는데,... 시장기는 개별적이면서 전체적이었고 보편적이면서 고립무원이었다... 구준생 백여 명이 컵밥 노점상 앞에 줄을 선다고 할 때, 그중 1.3 명 정도가 합격했다. 
저녁반 9급 영어 시간에는 분사구가 길게 늘어지는 영어 문장이 예문으로 나왔다. 동사와 목적어 사이가 멀어서... 억센 문장 구조에 짓눌려서 동사는 사물을 장악하지 못했고, 먼 목적지에 닿지 못해서 허우적거렸다.'

왜란 당시 비감한 현실에 맞부닥친 이순신 장군의 의지가지없는 심정을 간결하지만 비장하게 표현해 냈던 김훈의 글이 21세기 노량진 수험생이라는 한 개인을 통해 우리 시대를 비극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다. 컵밥 대열 100명 중 겨우 1.3명이라니, 어부 아버지의 배를 팔아 시험을 준비한 주인공은 그래도 그 무자비한 시험의 통과의례를 건넜다. 그런 그가 임지로 내려가 한 일은 동네 빈집을 살펴보고, 가축 예방접종 공문을 작성하고, 경로잔치 때 면장 축사를 쓰는 일이었다. 
8번째 국가시험에 낙방했다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의 한 장면.
ⓒ JTBC
 
하지만 그조차도 가닿지 못하고 매번 미끄러지면서도 8수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못한 이미진(정은지 분)도 있다. 바로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그녀를 주인공 중 한 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8번째 낙방한 국가 시험의 운명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동명이인이 있던 8번째 시험, 그녀는 낙방했으나, 또 다른 이미진이 붙는 바람에 부모님은 그녀가 비로소 그 등용문의 주인공이 된 줄 알고 날아오를 듯 기뻐하셨다. 차마 그런 부모님 앞에서 자신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던 이미진은 취업 사기의 올가미에 자신을 밀어넣는다. 다행히 그곳에 있던 계지웅(최진혁 분) 검사의 도움으로 사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이미진은 홀로 울분을 토해낸다. 다음 날 눈을 뜬 미진, 마치 어제 술을 마시고 흘려했던 한 마디 말처럼 몇 십 년이 흘러 중년의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그냥 이대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아무도 모르게 그냥 딴 사람이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의 한 장면.
ⓒ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 1회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8수생 이미진의 애환이다. 7급 공무원 2년+9급 공무원 2년+경찰 공무원 1년 반+법원 공무원 2년+환경직공무원 반년, 8번째 시험에 떨어진 그녀는 말한다. '맘놓고 쉬어본 적도 없었는데......', 시험을 잘 봐서 붙었건, 떨어졌던 그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의 마음가짐은 다 저 이미진의 한마디 같았을 것이다. 8수생 이미진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20대를 보내는 모든 젊은이들의 맘이 저렇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이미진에게 계지웅 검사가 묻는다. 왜 공무원 시험이었냐고. 이미진은 답한다. 딱히 자신이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부모님이 원하셔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자신이 다른 건 못해도 '성실'하기에, 8수에 이르기까지 그저 꾸준히 해왔었다고. 안타까운 답변이다. 그리고 그 답이 또한 많은 젊은이들의 선택이라는 게 더욱 안타까운 사실이다.

대학을 선택하고, 사회에 나와 자신의 일을 선택할 때까지 과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 사회 정해진 학력 시스템은 늘 '답정너'만을 가리켰고, 그 과정 속에서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찾을 엄두도, 찾을 기회도 누리지 못했다.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의 이미진은 그렇게 고지식하게 주어진 삶의 궤도에 충실하기만 한 젊은이의 좌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 터널에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멈추지 않았고 돌아보지 않았고 쉬지 않고 걸어왔습니다. 

중년이 되니 취업이 됐다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의 한 장면.
ⓒ JTBC
 
그렇게 정은지였던 이미진은 하루 아침에 이정은의 이미진이 되었다. 동안침도 맞아보려 하고, 성형외과도 찾아봤지만 그 어떤 과학기술도 이정은을 정은지로 만들 수는 없었다. 코가 빠지도록 낙담도 해보았지만, 출근을 독려하는 부모님께 아침에 해만 뜨면 이정은이 되는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감한 마음에 다리 난간에 섰던 그녀에게 운명처럼 휘말린 현수막, 시니어 인턴직 모집 공고문이었다. 

8번째 시험에서 제아무리 어필해도 자기보다 어린 동명이인 이미진으로 인해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던 이미진, 그래 내 인생에 한 번은 시험에 붙어보자라는 마음으로 '시니어 인턴직'에 응시한다. 

최연소 응시자, 거기에 다리찢기가 가능한 유연성 만렙에, 영어, 중국어까지 능통한 능력자에, 다른 시니어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간장 공장 공장장~' 하는 언어적 순발력까지, 공시생 8년 차가 되도록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심사위원의 열렬한 호응을 받으며 응시자 최고 득점을 얻으며 당당하게 시니어 인턴을 꿰어찼다. 그런데 그렇게 당당하게 꿰어찬 시니어 인턴직의 첫 임무라는 게 서한시 법원 청사 청소직이라니!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의 한 장면.
ⓒ JTBC
 
8수생의 공시생이 하루아침에 중년의 여성으로 변해 시니어 인턴직에 우수한 성적으로 드디어 취업을 하게 되어 법원 청소를 하게 된다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드라마는 낮과 밤이 다른 이미진을 설명해 낸다.

만년 공시생이었던 젊은 이미진이, 중년의 이미진이 되자 시니어 능력자가 된다. 그래도 사실은 본체는 젊은 이미진인지라 말끝마다 '쉣'과 '왓더헬'을 남발하지만 새로이 법원에 사회복무요원으로 온 전직 아이돌 고원(백서후 분)에게 염산을 뿌리는 스토커를 대걸레로 퇴치할 정도의 순발력을 가지고 있다. 젊은 본체와 나이든 외양의 언밸런스는 이미진이 이름을 빌린 임순의 능력치가 되는 것이다. 

이모의 이름을 빌어 임순이 된 이미진, 드라마는 낮과 밤이 달라진 공시생의 에피소드를 서한지청으로 부임한 계지웅 검사가 파헤치는 묻혀졌던 연쇄살인 사건 수사에 잇는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자존감마저 우물 안으로 빠져들었던 이미진은 임순이 되어 지난 8년 동안 그녀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갈고 닦았던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해내며 자신만의 전성기를 펼쳐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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