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광고회사 국장 그만두고…韓 '사철 전통도검' 되살리려 칼 갈았다[K장인시대②]
대기업 나와 2001년 인사동에 전시관 열어
칼에 몰두한 수집狂, 4년 시행착오 끝 기술복원
75세 까지만 작업, 복원보다 전승 우선하는 현실 아쉬워
“누구나 자기 칼이 하나씩 있기 마련입니다.”
한정욱 도검장(71)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대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에게 칼은 무언가 베는 도구를 넘어 책임이자 신념이요, 어떤 희생과 명예, 자존이 깃든 상징적 기물이다.
지금은 명맥이 끊긴 한국 전통 도검을 만들기 위해 한 도검장은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서를 뒤졌다. 전국의 사철(沙鐵, 모래 모양으로 강이나 바다 밑에 퇴적된 철광석. 제철 원료로 쓴다) 생산지 중 흔적이 남은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모래부터 추적해나갔다. 당시 그를 본 사람들은 당연히 장인의 아들이거나 관련 전공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광고회사 오리콤 국장까지 지낸 샐러리맨이었다. 한 도검장은 은퇴 후 취미로 몰두한 칼에 투신해 인생 2막을 연 장인이다.
“중학교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면서 나무와 도구를 자르고 쓰기 위한 칼이 필요해 용돈으로 미 군용 M1 대검을 샀죠. 자연스럽게 칼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용돈이 생길 때마다 칼을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엔 모은 칼이 200여개더군요.”
다른 수집품도 많은데 왜 칼이었을까. 학창 시절부터 그는 늘 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고초도 많이 겪었다. “전 세계적으로 칼을 흉기로 분류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입니다. 지금 한국의 도검법은 일제강점기 때 생긴 것이죠. 과거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서는 작은 칼을 소장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칼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조선은 미신을 배격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왕실에서 직접 종친이나 충신에게 사인검(호랑이를 상징하는 인년(寅年) 인월 인일 인시에 제작, 온전한 양기가 깃들어 귀신과 재앙을 물리치는 기능을 했다고 알려졌다)을 하사했습니다. 실제 사인검은 호신이나 전투용 칼이 아닌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물건이기 때문에 후기로 갈수록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크기와 무게로 변형되는 경우가 많았죠.”
그는 직장생활을 마친 2001년 3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나이프 갤러리를 개관하고 그간 세계 각국을 다니며 수집한 각종 칼과 창 등을 대중 앞에 선보였다. “경찰청이 갤러리 오픈 신청서를 두 차례나 반려해 하마터면 문을 못 열 뻔했죠. 조폭 무기고 같다는 말도 들었지만, 문화의 거리 도검 문화를 전시하는 공간이 인사동에 생긴다고 이해해달라 요청했고 결국 문을 열었습니다.”
칼에 빠져 세계 각국의 칼을 모으고 나니 문득, 우리 전통 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사라진 사철 제련 방식의 강철 기술 복원에 나선다. 철광석에서 순수한 철을 뽑아 만드는 일반 철 가공과 달리 사철은 해변에서 철이 섞인 모래를 제련해 강철 만드는 방식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는 사철 생산지를 하나하나 방문해 뒤져본 끝에 경북 경주시 감포항에서 최적의 모래를 찾았다. 감포는 신라시대 부터 유명한 사철 산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이곳에서 사철을 채취해 무기 제작에 투입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삼국시대의 옛 검을 복원하겠다는 꿈을 품고, 2003년 양주에 제련소를 세운 그는 본격적인 사철 검 복원 작업에 돌입한다. 제철소에서 나오는 철판으로 만들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왜 사철을 고집할까. “우리가 보는 옛 선조들의 칼은 사철을 녹여 만든 강철로 만든 칼입니다. 제철소에서 만든 철로는 전통 칼을 만들기 힘들어요.” 불순물이 많은 사철은 얻을 수 있는 강철의 양이 적다. 철 한 근을 얻는데 사철 열 근 가까이가 든다. 또, 전통 방식을 고집해 소나무 땔감을 쓰기 때문에 칼 한 자루 만들 때 돈이 수백, 많게는 수천만 원씩 든다.
전문가가 해도 쉽지 않은 제련 과정이 수월했을 리 없다. 한정욱은 4년 가까이 사철이 녹기 위한 불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 숯과 사투를 벌였다고 했다. 숯을 잘 타게 하기 위해 바람을 불어 넣으면 사철이 잘 녹지 않았다. 게다가 제련소가 야외에 있다 보니 변수가 많았다. 삼국시대 대장장이들이 겪었을 시행착오를 그대로 반복한 그는 작업을 하면서 ‘사람 뜻대로 안 되는 일’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쇠 내림 작업 전에는 북어, 막걸리를 놓고 제를 올립니다. 종교적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자연께 도와달라는 의미지요.”
과거에는 철(무기) 만드느라 숲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지금은 사라진 방식이지만, 이 기술을 고집했다. 그는 나이테처럼 수 십겹의 줄로 이뤄진 무거운 철 덩어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수백 kg 사철의 쇠 내림을 거쳐 얻는 쇠는 고작 한 덩이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불순물을 걸러내고 쇠를 불에 달궈 접고 두드리는 단접을 수십번 반복해야 4000겹이 넘는 이 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때요, 아주 멋있죠?”
특별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한정욱의 칼은 그 고객 또한 비범하다. 신묘한 기운을 느끼고자 하는 기공 수련가부터 무속인, 이름만 들으면 알법한 유명 기업인과 외국 명사들까지. 칼을 만드는 장인은 다른 곳에도 많지만, 전통 사철 방식으로 만드는 건 한정욱 뿐이기에 이들은 명장이나 인간문화재와 같은 간판이 아닌 오직 칼만 보고 그를 찾아온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사철방식으로 제작하는 일본도의 경우 다섯 단계의 과정으로 나뉘어 분야마다 장인이 분업하는 구조로 만든다. 반면 한정욱은 장식을 제외한 전 과정을 오롯이 혼자 다 한다. 그 완성품이 더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노력 끝에 201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복원작업을 맡아 전문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환두대도는 손잡이 아래 둥그런 고리가 달린 큰 칼로, 특히 무령왕릉 출토 환두대도는 그동안 발굴된 것 중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복원작업에서 그는 쇠를 열다섯번 접는 단접기술을 적용해 당시 백제 최고의 기술을 고증을 거쳐 세밀하게 재현해냈다. 당시 칠지도와 환두대도 등 7점 복원 사업에 총 1억 8000만원이 투입돼 환두대도 한 점 가격만 2000만~3000만원인 셈이다.
홀로 사철 제련 기술을 복원해냈지만, 그는 2015년 중요문화재 시험에서 낙방했다. 전승 활동 미비가 이유였다. 국가 문화재 지정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부친이나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심사, 평가 기준과 다른 점이 많았다. “사철을 제조하는 방법을 이론적으로 아는 학자는 있죠. 하지만 사철을 직접 채취, 제련해서 강철을 만들어본 사람은 없습니다. 옛 선조의 방식이 아닌, 호주 철광석을 써서 공장에서 만든 은장도와 칼을 우리 전통 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술의 전승에 집중한 나머지 원천기술 보존에는 정부의 관심이 부족한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렵게 복원한 기술이지만, 한정욱은 75세까지만 망치를 잡고 이후엔 은퇴할 계획이다. 그가 작업할 때마다 아들이 와서 도와주긴 하지만, 이 일을 업으로 물려받을 뜻이 없다. 과거 일을 배워보겠다고 찾아왔던 제자들 역시 너무 힘들고 수입이 적다며 떠났다.
“사철제련 기술을 전수하려면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거나, 지자체 협의를 통해 전수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또, 제련소와 나이프갤러리 운영만 해도 칼 판매로 비용을 충당해야 합니다. 월세나, 제자들 인건비를 고려하면 개인이 감당하기는 어렵죠. 저로서도 아쉬울 따름이에요.”
씁쓸하게 미소 짓긴 했지만, 한정욱은 여전히 사철 제련 기술을 살리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아침이면 공방으로 출근해 자신의 칼을 매만지고, 오후면 인사동 갤러리로 나가 전통 칼이 생경한 관람객과 외국인 관광객에게 우리 칼의 역사와 전통을 알린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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