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민경배 (14) 동북아교회사학협의회 창설… 초대 상임의장 맡아

손동준 2024. 6. 20. 03:08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아라이 사사구 박사를 반갑게 만나 동북아교회사학협의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11월 일본 중국 홍콩 한국 네 나라의 교회사학자들이 서울에서 국제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동북아교회사학협의회는 내가 상임의장을 맡기로 하고 한국 일본 중국 홍콩 등지에서 연례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각 국제회의 때마다 한국교회사학협의회 기획실장이었던 임호빈 박사의 공로가 컸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본 중국 홍콩 한국 교회사학자들이
서울을 시작으로 매년 국제회의 개최
동북아 사학자들의 친교가 우선이지만
몇 사람 간계로 7차 회의 마치고 해산
2020년 11월 열린 한국교회사학연구원 20년사 출판기념회에서 연구원 관계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민경배 박사 제공


아라이 사사구 박사를 반갑게 만나 동북아교회사학협의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11월 일본 중국 홍콩 한국 네 나라의 교회사학자들이 서울에서 국제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그때 김선도 광림교회 목사님의 도움과 이승영 새벽교회 목사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국교회의 그 힘은 찬란하다. 그들은 실로 이 국제회의에 숙소와 교통 편의를 전부 제공했다.

동북아교회사학협의회는 내가 상임의장을 맡기로 하고 한국 일본 중국 홍콩 등지에서 연례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각 국제회의 때마다 한국교회사학협의회 기획실장이었던 임호빈 박사의 공로가 컸다. 그의 기획력과 동원력 조직력은 비상했다. 그가 이 모든 국제회의를 실제로 총괄 기획하고 편성하고 진행하고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이 국제회의를 큰손으로 돕고 기도해주신 이들이 박옥선 김선도 서광선 이승영 이영훈 강일구 오창학 임종달 박사님들이다.

그 찬란하고 둘도 없던 이 동북아교회사학협의회는 2009년 8월 24일부터 26일까지 중국 우한에서 개최된 7차 회의를 끝으로 중단됐다. 이해할 수 없는 몇 사람의 간계 때문이었다. ‘좀 더 학술적으로 하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국제회의 헌장에는 ‘교회사학자들 간의 코이노니아-친교와 교육 그리고 학문’이 명기돼 있었다. 동북아 교회사학자들의 친교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대학원 학생들의 진출을 위한 교육적 역할, 대학원 학생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이들이 함께 교회사학가들 간의 결속을 처음부터 견고히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학문 연구는 그다음으로 명시돼 있었다. 영국에는 교수들 명함에 직책을 명시하면서 학위 다음에 꼭 ‘펠로우(Fellow)’ 곧 학회 회원의 타이틀을 명예로 써넣는다. 가령 Min K. B./ B.A., M.Div., Ph.D., F.R.A., F.G.S.와 같은 것이다. 학회 정회원이란 뜻이지만 말 그대로 펠로우십(Fellowship), 곧 친교다. 학자들 간의 교제요 결속이다.

그런데 한두 사람이 국제회의가 덜 학술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해산시키려 한 것이다. 일본 학회원 몇이 여기에 동조하고 그런 기미를 보였기 때문에 일을 추진하며 주도했던 내 원칙이 그 구실로 단속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사학연구원에서는 류금주 권평 박종현 박사 등 세 명의 저자가 공동 집필 형식으로 2020년 ‘한국교회사학 연구원 20년사’를 간행했다. 830쪽의 거작이다. 스스로도 자랑스러웠다. 일본 그리스도교사학회에도 물론 4권을 보냈다.

그동안 일본 측에서 함께 손잡고 이 거대한 동북아의 교회사학자들 간 친교와 친애를 힘써 왔던 일본의 아라이 사사구, 도히 아키오, 게가 다케오, 하나지마 미치오, 이성전의 이름은 동북아 교회사학 역사에 길이 남아 빛날 것이다.

나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해 15개 대학교와 대학원에 출강했다. 내가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1963년 이후는 한국 신학계가 이제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 전란을 겪고 일어서던 때여서 교수들 수가 절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