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북한의 도발에는 당당한 원칙 견지가 답이다
“북한에 단 1명의 존엄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5000만명의 존엄이 있다.” 2013년 10월에 발표된 정부의 입장이다. 북한이 “최고 존엄(김정은)을 헐뜯는 자들을 단호히 징벌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자 당시 박근혜 정부는 “개개인이 모두 존엄인 우리 국민을 위협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당시 북한은 우리 언론에서 김정은을 비판하거나 대북 전단이 살포되면 막으라고 떼를 썼다. 그때마다 정부는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함부로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북한에 분명히 전달했다.
최근 북한은 대북전단에 대한 맞대응이라며 ‘오물 풍선’을 남쪽으로 수차례 날려 보냈다. 오물 풍선이 ‘인민의 표현 자유’라는 억지 주장까지 보탰다. 대북 전단 살포가 표현의 자유라는 우리의 입장을 비꼬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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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물 풍선 도발에 양비론 펼 땐가
목함지뢰에 강력히 대응한 경험
북한의 위협에 휘둘리지 말아야
」
하지만 개인의 자유에 대한 북한의 무지만 보여줬을 뿐이다. 북한은 김여정(사진) 노동당 부부장 등 당국자들이 직접 풍선 살포와 중단을 주도했다. 북한 주민의 자유의사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자신들의 명의로 오물이 다른 사람에게 배달된 것을 알면, 북한 주민도 상당히 기분 나쁠 것이다.
반면 우리 정부는 자의적으로 대북 전단을 방치한 것이 아니다. 국민의 기본권은 법적 근거 없이 제약할 수 없다. 더구나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9월 ‘김여정 하명법’이란 비판을 받은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위축한다며 위헌이라 결정했다.
북한의 잘못이 명백한데도 정치권에서는 시비를 뒤섞어 양비론을 제기한다. 남북 모두 ‘치킨 게임’을 그만두고 대화해야 한다거나 정부가 대북 전단 살포부터 중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양비론은 북한의 ‘남한 탓’ 논리만 부추긴다. 남북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 것은 대북 전단 때문이 아니라 북한의 도발과 과잉 대응 때문이다. 대북 전단이 중단된다고 남북 관계가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2020년 6월 김여정은 대북 전단을 저지할 법이라도 만들라고 당시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위협했다. 당시 문 정부가 관련 법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하자 북한은 공세 수위를 높였고, 급기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했다.
그런데도 당시 문 정부와 민주당은 ‘남북관계발전법’을 개정해 대북 전단 살포를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북한에 저자세로 대했는데도 남북 대화는커녕 북한의 콧대만 높아졌다. 대화 지상론에 빠져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든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지난해 헌재에서 이 악법이 위헌 판정을 받았다.
이번에 북한의 오물 풍선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북한과 똑같이 유치하게 쓰레기로 맞설 수도, 그렇다고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꺼낸 유용한 카드다. 다만 북한을 압박함과 동시에 군사적 긴장 고조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덜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의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 경험이 다소 참고가 될 수 있겠다. 2015년 8월 북한이 군사분계선(MDL) 부근에 매설한 목함지뢰 폭발로 우리 장병이 다리를 잃었다. 정부는 북한에 사과와 재발 방지책을 요구했고, 대북 압박을 위해 북한이 싫어하는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다. 처음에 북한은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는 등 오히려 긴장 수위를 높였다.
하지만 위협 전술이 먹히지 않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북한이 먼저 대화를 제안했다. 결국 나흘간 진행된 협상에서 북한은 지뢰 도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우리가 요구한 교류 활성화에 합의했다. 이 회담에서 정부는 북한의 잘못된 행동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며, 대화에 나서되 합의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북한에 휘둘리지 않고 국민 안전을 지키겠다는 정부의 당당한 자세에 국민은 지지를 보냈다. 그 덕분에 북한의 태도 변화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한반도 평화는 중요하다. 하지만 평화지상주에 빠지면 위험하다. 대화도 필요하지만, 북한의 선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대한민국 5000만 국민 개개인의 기본권과 안전이 훼손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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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용표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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