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 예상 뛰어넘은 위험한 동맹…'유사시 자동개입' 해석 갈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 정상회담 결과물로 내놓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은 예상을 뛰어넘는 관계 격상을 뜻한다. 두 정상은 새로운 군사 동맹의 탄생을 선언했는데, 푸틴이 직접 "(새 조약에 따라)한 쪽이 침략당하면 상호 지원을 제공한다"고 밝히면서 조·소 동맹 수준의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푸틴이 이날 정상회담 뒤 언론 발표에서 내놓은 구두 발언 외에 새 조약의 구체적 내용은 곧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 하는 만큼 조만간 조약 원문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의 "상호 지원" 발언을 자동 개입으로 보려면 침략 발생 시 상호 협의 등 어떤 중간 과정도 없이 즉각 군사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푸틴이 구두로 밝힌 내용만으로는 이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1961년 7월 북한과 소련이 맺은 조·소 상호방위조약은 유사시 "지체 없이" "온갖 수단으로" 군사 원조를 제공하도록 하는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담고 있다.
현승수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협정문 전문을 봐야겠지만, 일방이 군사적인 위협을 받을 경우 지원을 하겠다는 언급이 있다"며 "북·러 관계가 군사동맹에 육박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격상됐다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러가 각자 해석의 영역을 남겨둔 채 모호하게 봉합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푸틴 입장에선 전시상태인 러시아를 북한이 지속적으로 지원하도록 보장하는 장치를 만들기 위해 양국 관계를 명문화하는 방식으로 쐐기를 박은 것"이라며 "과거 보다 한층 더 높아진 군사동맹으로 가는 길목은 맞지만, 김정은이 바란 자동 개입 조항의 부활인지를 두고서는 인식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김정은은 언론 발표에서 유사시 상호 지원과 관련해선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의무 이행에 충실함에 있어서 그 어떤 사소한 해석상 차이에도 추호의 주저와 흔들림도 없을 것이라는 우리 정부의 의지를 엄숙히 선언한다"고 밝혔다. 원했던 대로 조·소 동맹 수준의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부활한 것이라면 "사소한 해석상 차이"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다만 북·러가 군사적으로 훨씬 연계성을 강화,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동맹 관계로 재탄생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상호방위조약의 자동개입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는 현 시점에서 조심스럽지만 상호지원에는 군사적 지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며 "일반적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보다는 높은 수준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푸틴은 러시아와 북한이 '획기적'인 협정을 맺어 관계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리게 됐다고 평가했다. 김정은도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 체결은 중요한 사건"이라며 "새로운 높은 동맹 수준으로 격상됐다"고 말했다.
이는 푸틴 입장에선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대비할 수 있는 다량·다종의 재래식 무기 확보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일각에선 러시아가 북한을 사실상 재래식 무기 생산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양국 정상은 향후 북한 노동자 파견, 경제 물류협력 등을 중심으로 제재를 회피할 수 있는 영역을 확대하고 구체화하는 것에도 사실상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제사회의 제재로 고통을 겪는 동병상련 처지에서 상대적으로 합의가 쉬운 영역이기도 하다.
실제 푸틴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주도한 무기한 대북 제재는 뜯어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면서 스스로 동의한 제재 결의를 무시하겠다고 대놓고 선언한 셈이다.
그는 이어 "북한의 나진과 러시아 하산을 잇는 철도 재건 보수 사업이 진행 중"이라며 "얼마 전 러시아 석탄을 나진항을 통해 중국 측에 운반했다"고 밝혔다. "두 나라 사이에 철도 교통이 재개됐고, 이미 통과객들이 많이 다니고 있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정유석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러시아에선 북한의 나진항을 통해 자국에서 생산한 주요 광물을 중국·베트남 등지로 수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며 "국제사회의 제재를 회피하는 것은 물론 자체 물류망까지 구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푸틴은 양국이 "두만강 교량 건설 관련 협정에 서명했다"며 보건·의학·교육·과학·관광 분야의 협정도 체결했다고 말했다. 북·러는 지난 2월 북한 나진과 러시아 하산을 잇는 자동차 전용 교량의 건설을 9년 만에 재개했다. 기존 항공·철도에 이어 화물차·버스 같은 차량까지 양국 간 주요 교통수단으로 가세한다면 북·러 교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특히 북한 노동자 송출 분야에서는 구체적 합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의 외화벌이 필요성과 푸틴의 극동 개발 필요성이 맞닿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푸틴은 "교육 분야에서도 두 나라 사이의 협조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북한 유학생 130명이 공부하고 있는데, 이 분야를 활발히 확대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는데, 이 역시 북한 노동자 파견을 염두에 둔 발언일 수 있다. 안보리 제재 상 북한 노동자 고용이 금지돼 있는데, 교육·관광분야 협력으로 포장해 '비자 세탁'을 통해 북한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꼼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날 확대 정상회담 배석자 면면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푸틴 대통령은 국방 장·차관과 함께 우주·에너지·자원·교통·보건 분야의 책임자들을 포진시키며 북한과의 국방 분야는 물론 전방위 협력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김정은은 김덕훈 내각 총리, 박정천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최선희 외무상, 임천일 외무성 러시아 담당 부상, 김성남 당 국제부장, 윤정호 대외경제상 겸 북러경제공동위원회 위원장을 배석시켰다. 이 중에서 경제관료 출신인 김덕훈은 2020년 총리로 발탁된 이후 경제 사령탑 역할을 맡고 있으며, 윤정호 북·러경제공동위원장은 북한의 무역과 외화관리를 총괄하는 대외경제상을 겸직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군사정찰위성 2호기 발사 실패를 자인하며 대내외적으로 체면을 구긴 김정은 입장에선 푸틴이 24년만에 방북해 동맹으로의 관계 격상에 합의한 게 외교적 성과일 수 있기 때문에 대내적으로도 리더십을 공고화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의 화려한 동맹 발족 선언이 실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새로운 관계 형성 자체가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정은이 내심 희망한 푸틴의 '사실상 핵보유국 인정'은 공개석상에선 이뤄지지 않았다. 푸틴은 "북한은 자주권 수호를 위해 합당한 조치를 할 권리가 있다"면서도 명시적으로 북한의 핵 보유를 '승인'하지는 않았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핵보유국으로서의 독보적인 지위를 중시하는 러시아 입장에선 북한 핵보유 공식 인정에 신중할 것"이라며 "북한은 물론 주변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구체적인 행동보다는 말로 선물을 대신하는 전략을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정영교·이근평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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