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북·러 공격 받으면 상호지원"… 김정은 "가장 강력한 조약"
합법적 핵 보유국인 러시아와 불법적 핵 개발국인 북한이 군사 동맹 수준의 협력을 선언하며 세계 안보지형을 흔들었다.
19일 평양에서 회담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에 서명한 뒤 언론 발표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선언했다. 푸틴은 "오늘 서명한 조약은 무엇보다도 협정 당사자 중 한쪽이 침략당할 경우 상호 지원을 제공한다"고 밝혔고, 김정은은 "두 나라 사이 관계가 동맹 관계라는 새로운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고 말했다.
푸틴과 김정은은 이날 오후 6시쯤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정상회담 뒤 생중계로 진행된 공동 언론 발표에서 "이번 조약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격상됐다"고 했다.
푸틴은 먼저 “양국 간 체결된 포괄적 전략 동반자적 관계에 관한 조약은 비약적 발전의 의미를 담은 문건”이라면서 “정치·경제·무역 ·문화 인도주의적인 분야와 안보 분야와 관련해 이정표를 세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조약에 따르면 어떤 나라에 침략이 있는 경우에 상호 지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밝혔다. 푸틴은 또 "우리는 모스크바 답방으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겠다"면서 김정은을 모스크바로 다시 초청했다.
조약 원문은 곧바로 공개되지 않아 그가 언급한 '지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러시아 타스 통신에 따르면 푸틴을 수행 중인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조약 4조에 따라 어떤 가맹국에 대한 침략이 있을 경우 서로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북한이 희망한 것은 1961년 7월 북한과 소련이 맺은 조·소 상호방위조약의 부활이었다. 해당 조약은 유사시 “지체 없이” “온갖 수단으로” 군사 원조를 제공하도록 하는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담고 있다. 이를 대체한 2000년 2월 ‘조·러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일명 신 조약)’은 “침략 당할 위기가 발생할 경우, 또는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그리고 협의와 협력이 불가피할 경우”에 “쌍방은 즉각 접촉한다”(2조)고만 했다. 푸틴의 발언으로 미뤄 사실상 자동 개입에 가까운 수준의 내용이 포함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외교부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 차관은 "상호 원조를 제공하는 기준이 조약상 명확히 규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기준'이 명시돼 있다는 것 자체가 조건 없이 군사적으로 참여하는 자동 개입은 아니라는 취지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양측은 우려했던 군사 분야 협력 의지는 명확히 했다. 푸틴은 “한반도 긴장의 원인은 미국의 침략적 대결적 정책 때문이며, 북한은 자주권 수호를 위해 합당한 조치를 할 권리가 있다”면서 “러시아는 북한에 대한 군사 기술 협조도 배제하지 않겠다”고도 밝혔다. 이는 북한의 불법적인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사실상 옹호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에 더해 북한이 원하는 정찰위성, 핵추진 잠수함 등 전략무기 개발을 위한 군사적 기술 이전 가능성도 엄포를 놓은 셈이다.
또 이번 조약 체결의 목적이 북한의 포탄 지원을 정당화하려는 사전 작업인 것처럼 암시하는 발언도 있었다. 푸틴은 조약의 '무력 침공시 상호 지원' 부분을 설명한 뒤 곧이어 “특히 강조하고 싶은 건 최근 미국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고정밀 장거리 무기 체계, (미국의)F-16 폭격기와 다른 첨단 무기, 러시아 영토 공격용 장비를 대규모로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 조약 상 상호 지원 조항을 '지금 러시아가 서방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약을 근거로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건네 받는 것은 정당하다'는 식의 논리를 세우는 근거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 전쟁을 방어적 성격으로 합리화하는 동시에 앞으로 지속적으로 북한으로부터 무기 지원을 받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는 북한이 한국을 공격해 놓고 ‘위협을 당해 공격했다’고 러시아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논리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정은도 “이번 조약으로 우리 두 나라 사이 관계는 동맹 관계라는 새로운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고 밝혔다. 이어 “두 나라 관계는 정치와 경제, 문화, 군사 등 여러 방면에서의 협력 확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조약의 성격에 대해 “평화 우호적이고 방위적인 조약”이라면서 군사 동맹 조약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푸틴과의 평양 정상회담을 “중대한 사변”이자 “조·러(북·러) 관계 발전의 분수령”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조·러 관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조약”은 “나라 지도부의 원대한 구상과 인민들의 세기적 염원을 실현시킬 법적 기틀이자 현 국제 정세와 새 시대 전략적 성격의 조약”이라고도 했다.
김정은은 또 "위대한 조로동맹" "불패의 동맹" 등으로 북·러 관계를 치켜세웠는데, 이 자체가 북·중 간 혈맹을 의식한 발언이란 해석도 나온다. 이제 전통적 우방국인 중국보다 새롭게 동맹을 맺은 러시아가 더 중요한 상대라고 부각한 것일 수 있어서다. 이는 최근 북·중 간 이상 기류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실제 이번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코너에 몰린 러시아가 '은둔의 나라' 북한과의 군사 협력을 대놓고 공약한 만큼 주요 국가의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과 일본,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역시 북·러 간 지나친 밀착을 경계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다음달 3~4일 카자흐스탄에서 개최되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모두 참석할 전망이다. 한반도 문제에서 조수석에 앉아 있던 푸틴이 운전석에 앉은 중국을 밀쳐낸 만큼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이와 관련해 어떤 입장을 주고받을지도 주목된다.
정영교·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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