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적의 중심 타격한 부산포해전
이순신 장군 해전 현장 탐사 대원들이 15일간 항해를 마친 후 쓴 항해기입니다. 1차 항해는 5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동방항로, 2차 항해는 6월 3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방항로로 15일간입니다. <기자말>
[오문수 기자]
▲ 부산포해전이 일어났던 영도 인근 바다 모습 |
ⓒ 오문수 |
'율리안나호'는 이순신 해전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항해 중이다.
과거 왜수군과 세 차례 해전에서 승리한 조선수군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가 보낸 "일본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는 공문을 받고 1592년 8월 24일에 좌수영을 출발, 4차 출전에 나섰다.
첫째 날 남해 관음포를 거쳐 사량바다에서 원균과 합세 후 당포 앞바다로 이동했다. 다음날인 8월 26일 비바람 때문에 항해하지 못하다가 28일 새벽부터 가덕도 부근에 본대를 두고 일본 군선을 탐색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 이순신 해전 현장을 답사하고 있는 율리안나호가 정박한 가덕도 대항항 모습. 강풍 때문에 부산항까지 가지 못하고 정박했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한 해양요충지였다. |
ⓒ 오문수 |
▲ 태종대 앞 주전자섬 주변에 어선들이 모였다. |
ⓒ 오문수 |
총공격에 나선 연합함대는 초반에 선봉으로 나온 대선 4척을 맞이해 모두 격침시키고 장사진(長蛇陣)으로 돌진하며 일본 진영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모두 산위에 올라가 철환과 화살을 쏘면서 반격했다. 그러나 연합함대는 천·지자 총통과 불화살 등으로 공격해 일본측에 큰 손실을 입혔다.
전투 결과 일본군선 100여척을 격파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순신이 가장 아끼는 정운 장군을 포함 전사 6명, 부상 25명이라는 희생자가 나왔다.
부산포해전은 이전의 해전들과 달리 일본 수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했다는 점과 양측의 참전규모가 가장 컸다는데 의미가 있다.
부산포해전 결과 왜군은 조선수군과의 해상 전투를 피하고 육상에서만 전투하려는 경향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일본수군은 해전을 포기하고 해안지대에 성을 쌓고 육군의 지원을 받아 조선수군과 싸웠다.
부산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주무기는 총통이었으며 그 피사체는 장군전, 피령전, 장전, 편전, 철환 등이었다. 조선수군은 사정거리 내에서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여 왜선 100여척을 부쉈다.
"첫째, 조선군선이 일본군선보다 견고했고 기동력도 우수하였다. 둘째, 조선 수군의 총통이 일본군의 조총보다 우수하였다. 즉 사정거리가 길었고 파괴력도 상대적으로 큼으로써 성능이 훨씬 우수하였다. 셋째, 이순신의 전술이 뛰어났다.
넷째, 거북선을 이용한 돌격전을 수행하였다. 곧 거북선에서 대포를 쏘고 나서 적진에 마구 쳐들어가 부딪치면서 적 함대의 대열을 흩트리고 빠져나온다. 다섯째, 전투함의 기동이 용이한 넓은 곳으로 유인하여 군선이 집중 기동사격했다.
여섯째, 사정거리가 상대적으로 긴 총통을 이용하여 원거리에서부터 공격하되 적선의 사정권 밖에서 철환을 쏘고 나서 가까이에서는 총통전을 쏘아 화력을 집중하였다. 화력집중을 위한 전투진은 학익진이었다."
다음은 1592년 <예수선교회 연례보고서 부록편>에 기록된 자료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온 천주교인들이 쓴 글의 일부다.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온 천주교 신부들도 조선수군이 일본수군보다 뛰어났음을 인정한 글이다.
"절망에 빠진 꼬라이(coray)인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강력하고 거대한 배를 타고 바다를 떠다니며 일본으로부터 오는 모든 배들을 섬멸하였다. 꼬라이인들은 바다에 관해서는 일본인보다 더 훌륭한 장비와 재능을 가졌다. 그래서 꼬라이인은 일본인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고 이러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 일어났다."
가덕도가 해양 요충지인 이유
가덕도는 진해와 거제, 부산신항을 아우르는 바다를 품은 섬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중심에 섰던 전략요충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도 가덕도 부근에 본대를 두고 천성보에서 밤을 보낸 후 수색 작전을 펼치면서 부산쪽으로 전진했었다.
▲ 가덕도에 있는 대항항포진지 동굴요새 모습. 관광객과 비교하면 포신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1944년말 패전을 앞둔 일본이 미군의 본토 공격에 앞서 한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오키나와 전투처럼 결사항전하기 위해 파놓은 굴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팠다고 한다. |
ⓒ 오문수 |
▲ 가덕도 대항항 포진지 내부모습. 동굴요새 길이가 175미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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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항구에 정박한 후 구경에 나선 곳은 대항항포진지 동굴이다. 대항항포진지는 태평양전쟁 당시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군이 1944년말부터 파놓은 동굴요새다.
미군의 본토 공격에 앞서 한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오키나와 전투에서 결사 항전했던 것처럼 하기 위해 만든 동굴요새다. 해수면으로부터 약 8m 높이 암반속에 동굴길이가 175m에 달한 동굴요새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팠다고 한다.
시간 여유가 있어 산너머에 위치한 외양포 일본군 포진지를 구경하기 위해 나섰다. 가덕도 외양포 진지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진해항 입구인 거제도와 가덕도를 감제할 수 있는 곳에 만든 군사기지다.
▲ 가덕도 끝부분에 있는 외양포 포진지 모습. 러일전쟁에 대비해 1904년 일본이 설치한 포대이다. 한일합방전인 1904년가덕도에 일본군 포진지가 설치됐다는 건 조선이 이미 주권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수치스러운 현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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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덕도 인근에는 신공항을 반대하는 수많은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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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외양포 진지는 한반도에 러일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한편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전에 이미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치스런 곳이기도 하다.
이날 찾은 가덕도 일대에는 비행장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수백개 걸려있었다. 가덕도는 예나 지금이나 논란의 중심에 선 섬이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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