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신화' 파괴한 '프리실라', 지금도 유효하다
[최해린 기자]
▲ 영화 <프리실라> 스틸컷 |
ⓒ A24 |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프리실라>가 국내 개봉했다. 세간에 '엘비스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프리실라 볼리외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그녀의 삶을 재조명하는 영화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매혹당한 사람들> 등의 영화로 이미 입증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잔잔하면서도 강렬한 리듬감이 전기 영화라는 특성과 맞물려 걸작을 만들어 냈다. 영화를 되짚어 보면서 <프리실라>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유를 살펴 본다.
이건 공포 영화다
<프리실라>의 한국 홍보 문구는 평면적이다. '엘비스가 사랑한 단 하나뿐인 여인.' 이 문장만 읽으면 본작이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로 보일 정도다. 하지만 <프리실라>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아기자기한 쿠튀르(couture) 감성에 포장되어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공포 영화다.
1959년, 군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서 살게 된 프리실라 볼리외는 유명 가수 '엘비스'의 집에 드나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독일에 있던 엘비스가 미국에서 온 동향 사람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이유에서다. 엘비스는 프리실라에게 자신의 감정적인 취약점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프리실라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게 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다소 일반적인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문제는 이때 프리실라가 9학년(한국 학년제로는 중학교 3학년)에 불과한 학생이었다는 점이다. 엘비스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프리실라는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집을 떠나 그와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영화는 프리실라가 엘비스에게 종속되는 과정을 덤덤하면서도 오싹하게 그려낸다. 엘비스는 어린 프리실라에게 온갖 선물과 칭찬을 해 주면서 그가 프리실라를 사랑한다고 강조하지만, 프리실라가 조금이라도 엘비스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곧바로 폭력적인 면모를 서슴없이 드러낸다. 심지어 드레스 종류나 머리카락 색에까지 간섭하면서, 프리실라를 자신의 완벽한 인형으로 꾸며 간다. 프리실라는 이런 엘비스를 두려워하지만, 폭력 이후 바로 돌아오는 공허한 사과와 피상적인 보상 때문에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야말로 그루밍(grooming)의 전형인 이 둘의 관계가 이어지는 영화 속에서, 관객들은 프리실라가 엘비스의 사탕발림이나 프러포즈에 기뻐할 때마다 역설적으로 한탄할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졸업부터 결혼까지, 프리실라의 인생은 전부 엘비스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가 초대하면 그에게로 향하고, 그가 금욕적인 생활을 시작하면 덩달아 자신의 욕구를 억제해야 하며, 그러다가도 그가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면 그에게 응한다. 엘비스의 관심을 제외하면 삶에 그 어떤 보람도 느낄 수 없도록 온실 속에서 키워진 탓이다. 영화 초반에 보였던 순진하고 호기심 많은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엘비스가 프리실라를 부르던 애칭인 '실라'만 남게 되는 모습은 웬만한 공포 영화보다도 훨씬 끔찍하다.
현대 사회에도 필요한, 정적인 여성의 탈출기
프리실라가 이러한 엘비스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것은 영화의 마무리에서다. 그는 언제나처럼 기분 전환용으로 프리실라의 몸을 탐하려는 엘비스의 손길을 떨쳐내고, 결혼 생활을 그만하겠다고 선언한 뒤 차를 타고 엘비스의 자택 밖으로 향한다. 이 과정은 상당히 정적인지라 충분히 극적이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감독의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교제폭력, 가정폭력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 내에서 벌어지는 압제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화려한 배경음악이 깔리는 '하이라이트 장면'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가해자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늪에서 빠져나오는 행위와 같다. 극적으로 발버둥칠수록 가해자의 마수에 더 깊이 빠져들어 버리고, 잔뜩 지친 후에야 온몸에 힘을 빼고 땅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그 피곤하고 힘겨운, 현실적인 투쟁을 고작 '극적인 순간'으로 소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인지라, 엘비스를 떠나겠다고 말하는 프리실라와 이를 듣는 엘비스가 주고받은 일문일답은 이 영화의 주제를 명확하게 정리한다. "다른 남자한테 가는 거야?" 하고 묻는 엘비스의 말에, 프리실라는 이렇게 답한다.
"내 인생을 찾아 가는 거야."
▲ 영화 <프리실라>스틸컷 |
ⓒ A24 |
<프리실라>는 지난 세대의 여성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 언제보다도 현재 사회에 절실해 보인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성이 '요즘 성차별이 어딨어?'라는 무지한 질문과 함께 돌아오는 차별을 견디고 있으며, 이별을 결심했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살해 당하고 있다. 갖은 교제폭력 사건에서조차 피해자들은 가해자와의 관계에 종속된다. 두어 번 데이트를 했다는 이유로 가해자의 '연인' 취급받고, 친밀한 사람과의 불화에 '과민 반응한 것 아니냐'는 같잖은 질문에 시달린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해자들 역시 자아를 가진 개인이라는 점이다. <프리실라>는 미디어의 특성상 이어지는 여성 폭력에 맞설 법·제도적 장치를 제안하지는 못하지만, 프리실라 볼리외 개인의 서사를 깔끔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임무를 완수한다.
프리실라는 '엘비스가 사랑한 단 하나뿐인 연인'도, '엘비스에게 학대 당한 가녀린 소녀'도 아니다. 그녀는 프리실라 볼리외다. 본작은 이 한마디만을 하기 위해서 110분의 러닝타임을 기다려 왔다는 것처럼 바깥세상으로 질주하는 프리실라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프리실라 앤 볼리외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둘러싼 '로맨스의 신화'를 묵직한 이야기로 타파한 <프리실라>. 본작이 던진 메시지가 우리 시대의 여성들에게도 힘이 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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